[데미안]은 청소년 권장도서로 적합할까? 맞다면 내가 비참해진다. 나는 20대 때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몰랐고, 30대 때 다시 몇 번 읽은 후에야 대충 감을 잡았는데, 10대가 이 책을 읽고 이해한다면 내가 너무 무능해진다.
[군주론]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원문 번역본을 본 적 없다. 입시 논술 가르치며 주워 읽은 게 있어 ‘사랑보다는 두려움’의 핵심만 이해하고 응용하는 정도다. 아는 게 없으니 [중학생을 위한 군주론]을 읽을 때도 힘 빡 줘야 한다.
청소년 권장 도서 목록을 신뢰하지 않는다. 좋은 책이지만 비현실적이다. 난해해서 혼자 읽기 힘들다. 청소년 권장 도서의 본질은 ‘너네는 이렇게 좋은 책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멍청하니까 열심히 공부하라.’는 데 있는 것 같았다. 고1 때 [소피의 세계], 고2 때 [권력 이동]에서 느낀 당혹감과 좌절감이 내 지적 성장에 발판이 되었다면, (욕, 욕, 욕) 싸우자.
당시에는 읽어두면 내 무의식 어딘가에 잠재해 있다가 지적 전해질로서 언젠가 우뚝 설 내 지식의 나무에 영양분으로 작동하길 바랐다. 최소한 언어영역 공부는 될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논술을 가르치면서 알았다. 내가 글로 표현하지 못하는 정보는, 그냥 모르는 거다. 이해를 위해 창의적 오독을 하는 과정에서 생각하는 힘이 일부 길러졌을지도 모르겠지만, 학교 교육에서 내 오독을 수습할 기회를 누리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청소년 권장 도서들은 재미없다. 지금의 청소년은 나 때와 달리, 광기에 가까운 선행학습이 일반화 되었고, 내신 쟁탈전에 수행평가에까지 자신을 갈아 넣어야 한다. 이런 학생들에게 제대로 교육 받은 성인도 읽기 버거운 책을 권하는 것은 가해다. 청소년은 수행자나 고행자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청소년 권장 도서를 청소년들에게 권장하지 않는다.
청소년 권장 도서들이 학교에서 다뤄지면 좋겠지만 공교육에서는 독서/논술 수업이 등한시 된다. (아이비에서 김애란을 다룰 때 반가웠고, 선생님들 고생하신다 싶었다.) 나는 귀양 가서 ‘임금찡, 저 좀 잘 봐주세요, 뿌잉뿌잉’들이 목민관의 어쩌구로 탈바꿈되는 것을 익힌 시간이 아깝다. 꾸역꾸역 글을 쓰다 보니 알았다. 시험 점수를 위한 공부는 내 사고력이나 인문학적 소양 함양에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내가 배우고 싶었던 것을 가르치고 있다. 나는 어린 내가 갖고 싶었던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학생들과 주로 읽는 책은 청소년 도서다. 기본적으로 재밌다. 성인들도 읽을 만해서 지인들이 책 추천을 요청할 때면 권했다. 상술과 예술 사이에서 적당한 균형을 이뤘다. [아몬드], [페인트], [불편한 편의점] 돌풍은 청소년만 사로잡아서 이룬 성취가 아닐 것이다. 김훈, 박민규, 김애란 이후 공석이던 최애 작가에 이꽃님을 들였다. [죽이고 싶은 아이], [당연하게도 나는 너를], [여름을 한 잎 베어 물었더니] 수업할 때 학생들은 대체로 좋아했다. 작가의 데뷔작 [시간을 건너 너에게로 갈게]는 학생에게 빌리기로 했다.
[아몬드]에서는 거울신경세포, 기형도의 「기억할 만한 지나침」, 아이히만과 연계해 공감의 사회적 기능을 논했고, [불편한 편의점]은 [편의점 인간]과 연계해 자본주의 사회 인간의 자기 소외(아이비에 진학한 학생A의 소논문 주제가 되었다)를 논했고, [죽이고 싶은 아이]는 인식의 주관성과 더불어 [동물농장]과 연계해 언론의 기능에 주목했고, [당연하게도 나는 너를]은 입센의 「인형의 집」, 카프카의 「변신」과 연계해 현대인의 타자화를 노논했고, [여름을 한 잎 베어 물었더니]는 진심 공유를 통한 인간 관계 형성을 이온의 결합 차원에서 설명하고 의미를 확장했다. 서사에 내재한 인문학을 내가 제대로 다루지 못할 수도 있지만, 학생이 뭔가 배워가고 있다고 느낄 만큼은 가르쳤다. 우리의 읽기였다.
청소년 도서에서 만나는 페미니즘은 난감했다. 페미니즘의 출발은 정당했을지 몰라도 작금의 페미니즘은 피해의식으로 점철되어 규형 감각을 잃었다. 청소년 사이에서도 페미는 일베와 동의어였다. 성인 도서에서는 그럴 수도 있었다. 내가 [내게 무해한 사람]에서 의심했다가 [밝은 밤]에서 은밀히 풍기는 [82년생 김지영] 냄새 때문에 최은영을 손절했듯, 이 글 때문에 내가 손절 당할지도 모르듯, 독자의 기호에 따라 안 보면 그뿐이었다. 그러나 청소년 도서에 내재한 [+학습] 의미소를 생각하면 좀 더 신중했어야 했다.
양성평등 관련 방어하자면, 개인적으로 현대 사회의 남성은 열등한 개체로서 남성성은 도태되어야 할 속성으로 인지한다. 폭력과 무질서는 대체로 남성에 의해 시발된다. 그래서 ‘내가 무해한 사람’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대체로 남성성이다. 그러나 남성이 열등하다는 사실이 남성 전반에 대한 회피나 혐오로 표현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책 좀 읽었다는 초등학생이라면 [푸른 사자 와니니]를 읽었을 것이다. 학생들은 남녀할 것 없이 좋아했다. 그러나 암사자 와니니를 띄우기 위해 생물학적 사실을 무시했다. 모든 수컷은 무능하거나 폭력적이었다. 성인 문학에 만연한 여성주의와 똑같은 방식으로 여성의 피해를 과장하고, 남성의 기능을 축소했다. 서사를 통해 은밀하게 이뤄지고 있어서 표지 나지 않게 학생들의 젠더 관념에 잡음을 더했다. 심지어 [어린이를 위한 민주 시민 교육]에서는 ‘여성은 같은 일을 해도 월급을 적게 준다’며 사실 관계를 호도했다. 유명한 책은 아니지만, 도서관 선정 도서라면 얘기가 달랐다.
책 좀 읽었다는 중학생이라면 [체리새우 비밀 글입니다]를 읽었을 것이다. 이 책은 여학생 선호가 높았고, 남학생 선호는 낮았다. 여학생들은 다현이게서 자신을 읽었고, 남학생들은 손절하거나 주먹다짐하면 될 일을 찌질하게 물고 늘어지는 사태를 답답해 했다. 다현이의 인간관계 맺는 방식은 여성형이지, 남성형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평에 서술된 “이 소설의 장점은 청소년의 삶과 심리를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리고 있는 점이다. 교실은 사회의 축소판이다. 그 안에서 아이들이 관계로 인해 겪는 복잡다단한 고충은 성인들이 사회생활에서 맞부딪치는 문제보다 결코 덜하지 않다.”는 편협했다. 다현이의 사례가 청소년으로 일반화 됨으로써 남성이 부정당했다.
어린이/청소년 사이에서 성차별은 남자 아이에게 향한다. 내 생각이 아니라 학생들 생각이다. 남학생들은 강력하게 주장했고, 여학생들은 인정했다. 체육 대회 때 땡볕에 앉아야 하는 것도 남학생이고, 같은 잘못을 했을 때 더 크게 혼나는 것도 남학생이다. 아마 첫째에 치이고 막내에 치이는 둘째의 기분일 것이다. 불합리함을 표시하려 해도 ‘남자가 그런 걸 가지고’가 스스로를 옥죄었다. 이런 남학생의 기분을 서사로 만든 어린이/청소년 도서가 있다면 추천 받고 싶다.
요즘은 청소년 권장 도서 대신 ‘생기부에 올릴 책’이 뜬다. 그래서 [불편한 편의점],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는 ‘도움이 되지 않는 책’이다. 정답은 모르겠다. 다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게 가장 도움이 되는 책은 ‘내가 그 책을 읽고 그 책에 대해서 할 말을 가진 책’이다. 뭘 읽든, 책을 한 입 베어 물었으면 불편하더라도 글을 남겨야 한다. 내가 쓸 수 있을 때, 독서가 완성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