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루오 Oct 22. 2024

오징어 게임 속 한국

한국은 오징어 게임 중이다. 아니, 넷플릭스를 시청하는 전세계가 오징어 게임 중이다. [기생충] 때처럼, 자본주의 사회가 만든 불공정과 양극화는 만국 공통인 모양이다. 우리는 세계라는 장기 판 위에서 VIP들이 가지고 노는 말이다. 자본 사회의 평범한 시민이라면 자신이 자본가의 가마우지가 된 것 같은 허탈함을 느껴봤을 것이다. 일은 내가 하는데 돈은 그들이 번다. 자가증식 하는 암세포처럼 돈이 돈을 번다. 우리는 노예처럼 일해도 서울에 집 한 채 사기 힘들다.


“도전하세요!”


해맑고 확신에 찬 응원이 어느 순간부터 거북해졌다. 누군가에게는 무책임한 위선이다. 흙수저와 금수저의 차이 중 하나는 기회의 불공정이다. 금수저는 실패를 어머니 삼아 칠전팔기로 성공에 다다르겠지만, 흙수저의 도전은 한 번뿐이다. 실패하면 개천도 아닌 시궁창행이다. 꿈은 낭만이 아니라 도박이다. 그래서 도박이 꿈이다. 경마에 매달린 456번은 꿈꾸는 자본 시민이었다. 시궁창의 바닥에 오징어 게임이 있었다. [오징어 게임]은 자본 사회가 구축한 우울한 시스템을 닮았다. 게임 탈락자는 죽는다.


자본주의의 가장 불공정한 점은 ‘자유’마저도 양극화가 이뤄지는 것이다. 돈과 자유는 비례했다. 오징어 게임 운영자는 공정성을 자부심처럼 여기고 그것을 참가자들에게 어필한다. 게임 참가 여부는 참가자들이 스스로 선택하게 했고, 게임 과반수가 찬성하면 언제든지 게임을 중단시켰다. 비록 납치의 형식을 띄었지만, 운영자가 설명하고 참가자가 동의함으로써 절차적 정의가 지켜졌다. 그러나 참가자가 ‘자유’롭게 선택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참가자들의 자유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지 않을 자유를 말하는 것과 같았다. 열악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라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참가자 중 부자는 없었다. 1번은 부자였지만, 그는 게임 설계자이자 운영자이므로 죽을 가능성이 없었다. 그저 참가자들의 절실함마저 가지고 놀 뿐이었다.


핑크보이들은 참가자들에게 총을 겨눌 권력이라도 갖고 있으니 사정이 낫겠다 싶지만 도긴개긴이다. 그들은 군인보다도 자유가 제한된 채 VIP에 봉사했다. 상명하복만 있을 뿐 하급자는 상급자에게 먼저 말을 걸 수 없다. 고시원 같은 방에서만 지내므로 개인 생활이랄 게 없다. 가면을 쓰고 있어 익명으로만 존재하는 사회의 부품, 꼭 우리 모습이다. 많은 사람들이 부품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마저도 실패해서 오징어 게임에 참가하고 만다.


게임의 내용도 불공정했다. 우승자는 남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여섯 개의 게임은 모두 운이나 힘을 필요로 했다. 운은 공평하지만 힘은 남자에게 유리한 기준이었다. 줄다리기는 노골적으로 여자를 불필요한 구성원으로 만들었다. 212번 여자는 살아야 했기에 몸까지 팔았다. 천운이 따라 여자가 결승까지 진출한다고 하더라도 우승할 가능성은 0에 수렴했다. 결승의 오징어 게임은 힘으로 상대를 죽여야 끝나는 게임이었다. 공정하려면 최소한 남녀를 분리했어야 했다. 그러나 공정하지 않아서 현실을 정확하게 은유했다. 현실의 운동장도 기울어져 있었다. 선천적 차이든, 구조적 모순이든 현실 게임은 아직 여성에게 불리하다.


[기생충]이 보여준 ‘부자라고 해서 나쁜 건 아니고, 가난하다고 해서 선한 건 아니다.’는 메시지는 다소 억울하다. 사실이더라도, ‘도덕성’을 좌우한 것도 결국 돈이다. 456번은 사십대 중반 나이에 나물 팔아 생계를 잇는 노모의 지갑을 터는 철없는 인물이긴 해도 치열한 경쟁 상황에서 약자인 여성과 노인을 보듬을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구슬 따먹기 경기에서 죽음이 코앞에 닥치자 상대를 속여 목숨을 보전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만 게임에 참가한 것처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 ‘선택’은 평생 마음의 짐으로 남을 것이다. 만약 456번이 해고당하지 않고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았다면, 어머니와 투닥투닥 친구처럼 지내고, 낙천적이고 사람 좋아하는 선한 시민으로 살아갔을 것이다. 그의 죄는 도덕성 결핍이 아니라 돈의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다.


부자가 나쁘지 않은 것은 나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상대의 10,000원을 훔치면 안 된다.’는 부자에게는 금기가 되지 못한다. 애초에 훔칠 가능성이 떨어진다. 오히려 그들은 자기 손에 들린 과자를 친구에게 나눠줄 수 있다. 또 사면 된다. 그들은 돈에 양심을 파는 것보다 돈으로 양심을 사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안다. 휴거(휴먼시아 거지), 엘사(LH에 사는 사람)처럼 가난한 사람이 혐오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니다. 비난 받고 없애야 하는 것은 가난이다.


88만원 세대 이후 N포 세대라는 말을 쓰기에도 번거로워질 정도로 청년 세대의 무희망은 일상이 되었다. 언젠가 역사가 용틀임칠지 모르겠지만, 청년 세대의 살아생전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양보해도 청년들이 아등바등 하느라 청춘을 청춘인지 모르고 다 허비한 다음일 것이다. 인생이라는 오징어 게임은 시작도 전에 이미 패배한 게임이 되어버렸다. [오징어 게임] 속에서도 승자는 상금을 독식한 1인 아니라 그들을 가지고 논 VIP들이다. 상금을 독식해봐야 검은 망토가 되어 VIP의 꽤 괜찮은 꼭두각시가 될 뿐이다.


이 불공정 게임을 끝내는 방법은 게임에 참가하지 않는 것뿐이다. 그래서 청년 세대는 자발적 멸종을 선택했다. 스스로 게임에서 빠져 나올 수 없으니, 다음 세대의 참가자만이라도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다. 저출산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 역시도 선택이라고 볼 수 없다. 불안정한 미래 때문에 행해진 ‘어쩔 수 없는 선택’은 자유가 아니다. 그러나 이 가짜 자유만이 VIP들의 놀이판을 깰 수는 유일한 방법이다. 말이 사라지고 나면, 게임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당신들의 물건을 팔아먹을 오징어들이 사라져 당신들의 자식과 손주는 무너질 것이다.


저출산에 대응하기 위해 외국인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은 명분과 실리를 갖춘 해법이다. 그러나 자발적 멸종까지 해가며 오징어 게임 판을 부숴버리고 싶은 우리의 꿈틀거림조차 그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서 씁쓸하다. 질 수밖에 없는 게임만 계속된다. (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