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No : 티키타카 열망
폭염만큼 매미 소리가 싫다. 자기주장의 떼창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우리는 매미를 닮았다. 땡볕을 썰어내려는 톱니 같은 굉음을 지속하는 말매미를.
다문화 시대라지만, 이질적인 것들과의 관계는 더 어색해졌다.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연결하는 인터넷은 개인에게 다양성의 바다가 아니다. 개인은 인터넷 속에서 동질적인 것과 관계한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커뮤니티, 내 취향을 공유할 수 있는 동호회처럼 동질적인 집단 속에서 기존의 ‘나’를 강화할 뿐이다. 다문화 시대가 아니라 파편화 시대다.
신은 죽었다. 그 자리를 인간이 차지했다. 이제는 인간마저 죽었다. 신에서 인간으로 이어진 왕관을 ‘나’가 차지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옳다. 왜냐면 다양성은 존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가 절대 명제가 되었다. 다양성 존중은 내가 존중받기 위한 방편일 뿐, 타자에 대한 이해는 관심 없다. 인간은 이질성과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사회적 관계를 맺어 상호 고립 관계를 형성했다. 우리는 공존할 뿐, 공생하지는 않는다.
화음이 귀해진 시대다. 우리는 떼창은 할지언정 합창은 하지 않는다. 다양한 밈이 형성되는 것에서 다양성의 가치를 재어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결국 유머 코드를 떼거리로 공유할 뿐이다. 혹은 가십이다. 가십은 ‘나’ 가까이 있는 것 같지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되는 것이므로 결국 멀어지고 잊힌다. 나와 다른 것들 사이를 가십이 채운다. 그래서,
화음을 갈구하는 시대다. 사공이 많으면 화음이 깊어진다. ‘MSG워너비’는 이질적인 소리들이 화음으로 하나 될 때의 아름다음을 환기해줬다. X세대는 ‘나’의 왕관을 쓴 한국 최초의 세대다. X, M세대를 전후한 사람들이 [무한도전]을 그리워하는 것은 서로 다른 캐릭터들의 티키타카 때문이고, MZ세대를 전후한 사람들은 [런닝맨] 멤버들의 잡담에서 티키타카를 맛본다. 당장 여름밤, 풀벌레 소리를 들어보면 그 많은 사공들이 개별적이되, 개별적이지 않은 청량함으로 귀결되는 마법을 귀로, 몸으로 체감할 수 있다.
화음의 기억이 멀고 아련하다.
2. Super yes : 민주주의의 종말
초중고등학교에서 조별과제는 없어져야 한다. 조원들의 실력 차가 커서 결국은 성적 좋은 학생의 노력에 조원들이 무임승차하는 구조가 될 수밖에 없다. 내가 조별과제에서 학습한 것은 무능과 비양심에 대한 환멸이었다.
성적으로 걸러진 대학은 그나마 낫다. 모든 조별과제가 무임승차 게임인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잡음이 많은 과제 수행 방식이다. 대학 조별과제에서는 내가 빌런이었다. 교양에서 조장을 맡았을 때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조원들도 관심이 없어 우리 조는 아예 과제를 제출하지 않았다. C-는 합당했다. 전공에서 조장을 맡았을 때는 후배에게 과제 방향을 제시하며 관련 서적을 소개하고, 밥을 사준 다음 모든 것을 위임했다. A+은 부당했다.
한낱 대학 조별과제도 평탄치 않은데, 국가 단위의 조별과제는 더 난감해진다. 민주주의, 이 초대형 조별과제는 아슬아슬하다. 사공이 많아도 너무 많다. 더 난감한 점은 무능하고 양심 없는 사공도 노 저을 권리를 동일하게 갖는 것이다.
코로나 시대를 관통하며 나는 인류를 혐오하기 시작했다. 고작 대한민국이 인류 최상위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다니, 선진국에 대한 환상이 박살났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란 정치-경제 엘리트와 언론이 합작한 부패 카르텔의 의도대로 다수의 개돼지가 휘둘리는 속 뒤집어지는 게임이었다. 가짜 뉴스는 언론의 자유라는 미명 하에 자유롭게 창작되었고, 사람들은 자신의 취향과 동질적인 커뮤니티에서 뉴스의 진위여부와 무관하게 자신의 생각을 강화했다. 잰 체 하지만 나 또한 수십 퍼센트의 개돼지 성분을 함유하고 있을 것이다. 코로나 와중에도 누군가들은 방역 실패를 바라는 듯한 인디언 기우제를 올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방역과 경제를 그럭저럭 잘 막은 국가에 손꼽혔다.
백신 등장 이전 선진국의 대혼란은 시민의 품질 차이 때문이었다. 미국 시민들은 무식했고, 무식한데도 당당했다. 마스크를 쓰는 것이 정부의 음모라는 말도 안 되는 선동에 놀아났다. 프랑스 시민들은 이기적이었고, 이기적이어서 당당했다. 개인의 자유는 공동체의 안녕에 무관심했다.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서도 전염병 상황에서 카페와 교회에 사람들이 득시글한 묘사가 나타나는데, 프랑스는 70년이 지나도 바뀐 것이 없었다.
안타깝게도 최상위 민주주의 국가의 미래는 미국과 프랑스의 교집합쯤에 있을 것 같다. ‘사흘’의 상식 여부가 논쟁이 될 만큼 무식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시대다. 대학이 필수가 아닌 시대로 접어드는 만큼 기초학력 유인은 앞으로 더 줄어들 것이다. 게다가 자유주의와 이기주의는 이미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종교의 자유, 청춘의 자유, 유흥의 자유가 공동체 안녕의 발목을 붙들었다.
플라톤이 민주주의를 고작 전제정치보다 나은 수준으로 규정했는지를 납득해가는 요즘이다. 사공의 품질은 점점 낮아질 것이다. 브렉시트와 트럼프는 산으로 가는 배의 예고편이었다. 민주주의, 이 배만큼은 산으로 가서는 안 되는데, 내 생전에 그 꼴은 안 보기를 바랄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