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No : 플렉스(Flex)
보통의 사람들이 돈을 개처럼 벌지 않았던 시대는 없었다. 수렵 시대 사람들은 목숨을 걸었고, 농경 시대 사람들은 간당간당하게 목숨을 건사했고, 현대인들은 가슴에 사표를 품고 다닌다. 늙어 죽는 게 자연스러워진 최초의 시대, 아직 워라밸은 말뿐, 절대 다수가 악착 같이 돈을 번다.
어떻게 벌든 이제 ‘먹고 살만 한’ 시대가 되었다. 먹고 사는 것 외에도 돈을 적극적으로 쓴다.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고민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속담은 ‘개 같이 벌어 정승 같이 쓴다.’였다. 그런데 정승 같이 쓰라니, 꼰대 소리라고 매도되기 좋다. 내가 번 돈 내가 어떻게 쓰든 말든 타인이 간섭할 일이 아니라고들 한다. 요즘은 플렉스 시대다.
시장 논리가 곧 정의다. 광고는 끊임없이 개인의 욕망을 자극하여 소비를 생산한다. 욕망은 주체적으로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이식된 것이다. 그래서 소비라는 목줄에 개 같이 끌려 다니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욕망에의 복종이다. 개 같이 돈을 버는 이유가 개 같이 끌려 다니기 위해서라면 서글프지만, 욕망이 충족될 때 개는 꼬리친다.
스님이나 청교도처럼 청렴하게 살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라다크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세계 10대 경제 대국 대한민국에서 산다. ‘나는 욕망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자본주의 시민의 미덕이다. 욕망은 인간의 성취동기를 자극해 자아를 개선해 나가도록 만든다. 또한 경제 순환 고리 상에서 소비가 미덕인 부분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플렉스가 대중의 실천 윤리가 된 지점에서는 욕망 충족은 정당성의 선을 넘었다.
어느 시대나 사치와 허영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땡그랑 한 푼, 땡그랑 두 푼, 벙어리저금통이 너무 무거워’의 시절에도 사치와 허영은 가난한 이들의 꿈이었다. 닿을 수 없기에 공상이었다. 그러나 최근 플렉스에서 비롯된 ‘내돈내산(내 돈 주고 내가 산다)’은 소비 시민의 도덕적 가치를 획득했다. 내돈내산을 실천 윤리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정승처럼 쓰라는 말은 부당한 간섭이다.
TV와 SNS 속 인플루언서들의 과시는 시청률, 좋아요, 구독자로 보상되었다. 자본주의 시민들에게 민주주의는 다수결로 단순화 되어 다수는 곧 정의가 되어 공리주의가 왜곡된다. 남들이 그러하듯 나도 그러하면 우리는 정의롭다. 개 같이 벌어 개 같이 쓰는 시대에는 광고만 반짝거린다.
2. Yes : 그분의 요구르트
2012년 2월의 일이었다.
노파는 삼 주째 오지 않았다. 한파 때문에 어떻게 되신 거 아냐? 대구에는 잘 오지도 않는 눈마저 잦은 1월이었다. 쌓이는 신문에서 오래된 요구르트 냄새를 맡는다.
내가 폐지를 챙겨드릴 때면 노파는 이미 90도로 굽은 허리를 또 한 번 숙였다. 자판기 커피 값도 안 될 폐지를 가지고 가면서 손자뻘인 내게 ‘고맙습니다.’를 서너 번씩 또박또박 발음했다. 쓰레기를 나눠주는 것조차 권력이 되는 것이 도시 생태다.
학원에서는 폐지도 많이 나오고 광고물 순환도 활발해서 학원가에는 폐지 줍는 노인들이 많았다. 종이는 시간 불문하고 문밖에 내어 놓으면 금방 사라졌다. 기력이 있는 할아버지들은 리어카를 끌고 다녔고, 할머니들은 장바구니 카트를 끌고 다녔다. 노파도 녹이 슨 카트를 끌고 다녔다. 작은 체구에 허리까지 굽어져 있어 카트의 키와 노파의 눈높이는 거의 같았다. 노파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무덤을 끌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노파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왔다. 일주일치의 신문과 복사기가 씹어 먹은 A4지는 가벼웠다. 노파는 무겁게 받았다. 다른 사람에게 주지 말고 자기한테만 달라고도 부탁했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어차피 학원에 고개를 내미는 사람은 노파 외에는 없었다. 노파는 사 주째 오지 않았다.
마지막에 왔던 때는 수업 중이었다.
“할머니, 지금은 수업 중이거든요.”
“아이고, 미안합니다. 나는 지나가다가 그냥 들른다고…….”
“늦은 저녁에는 수업이 있으니까 안 되고요. 3시에서 6시 사이에 오실래요? 그때는 챙겨드릴 수 있어요.”
“아이고, 미안합니다.”
노파는 내 말을 듣지도 않은 채 허리를 바닥까지 숙였다. 수업 때문에 급히 들어가려는데 노파가 나를 붙들었다. 어기적어기적 카트로 돌아가서 쌀자루를 뒤지더니 65ml짜리 요구르트 두 줄을 꺼내왔다.
“미안합니다.”
요구르트 10개의 폐지를 줍기 위해서 노파는 겨울 속을 몇 시간씩 뒤져야 했을 것이다. 골목길을 휘감아 치는 겨울과 뼛속으로 오는 겨울은 노파의 살가죽을 안팎으로 포위했을 것이다. 좁혀오는 포위망을 폐지를 지펴 버텼을 텐데, 내가 무심코 던진 당부에 노파는 하루치, 혹은 한나절치의 폐지를 내게 내주었던 것이다.
노파는 ‘폐지 줍는 노인’이 아니라 ‘염치를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내 자존감을 위해 내 한나절치의 일당을 포기할 수 있을까? 단언컨대, 없다.
3. Umm... : 개와 정승 사이
공정 무역 제품을 소비하거나 부도덕한 기업 제품을 불매하는 소비 풍조가 플렉스와 병행되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나는 둘 다 아니다. 나는 플렉스하지도 않지만 공정 무역 제품을 소비하기는커녕 돈쭐을 내거나 기부한 적도 없다. 부도덕한 기업 제품 불매도 그저 대체제가 있기에 실천할 뿐이다. 부끄럽지만 볼펜은 약간의 편리 때문에 일본 제품을 포기하지 않았다.
다들,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나 모르겠다. 인스타 감성의 플렉스한 먹거리 뒤에는 유튜브를 보며 김치에 계란 프라이 하나로 끼니를 때운 일상이 버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밥보다 조금 나은 끼니에서 알게 모르게 훼손된 자존감 복원하기 위해서 플렉스가 필요했을지도. 치킨의 플렉스는 사실 좀 우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