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No : 산타 할아버지의 규칙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줄 때, 정(情)은 추잡해진다. 규칙을 지키려고 울음을 참는 아이의 도덕성을 무위로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대체로 울음을 참는 축에 속했다. 우는 아이가 나와 같은 떡을 받아갈 때, 나는 울음뿐만 아니라 내가 조롱당하는 기분까지 참아야 했다.
내게 규칙은 절대적이었다. 규칙이 정해지는 과정이 공정했다면, 윤리적 문제가 발생하거나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지켜져야 했다. 12시 약속에 12시 1분에 도착하면서도 사과할 줄 모르는 뻔뻔함이 싫었다. 1분‘밖에’ 안 늦은 것이 아니라 1분‘을’ 늦은 것이다. 규칙을 지키는 일을 사람들은 인간미 없다고 했다.
학원에서 강사들은 3~5분 늦게 수업에 들어갔다. 늦는 학생들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정시에 시작했다. 약속을 지킨 사람들이 어긴 사람들 때문에 피해를 보면 안 되었다. 지각하는 학생들은 강사에게 배려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학생에게 사과해야 했다. 자기 돈 내고 자기 수업 늦는 것은 괜찮지만, 그들 때문에 수업 흐름이 깨지는 것은 문제다. 자기 돈 내고 자기 수업 듣는 학생들이 피해를 봐서는 안 되었다.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볼 때도 결이 같은 짜증이 났다. 멤버들이 끼니를 걸고 경쟁하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멤버를 응원했다. 게임의 규칙대로라면 승자가 독식하고 패자는 굶어야 했다. 그러나 패자들은 한 입을 구걸했고, 승자는 정이나 개인기를 빌미로 음식을 나누었다. 징징거림을 허용하는 규칙은 존재 이유가 없다. 십 만원 안팎의 일당을 받는 노동자의 부실한 한 끼는 안타깝지만, 수백 만 원의 출연료를 받는 연예인들이라면 촬영 내내 굶어도 그 분배는 정의롭다.
날라리들을 다루는 대중문화의 태도도 불만이다. 드라마나 영화는 술, 담배를 그 시절 그럴 수도 있는 일탈로 치부하고, 그들이 삐뚤어진 이유를 조명하여 일탈에 집행유예를 선언한다. 그것이 지식인의 윤리의식인양 포장되지만, 그들 때문에 피해 받는 사람들의 고통과 동일한 조건 속에서 바르게 자란 사람들을 무시하는 기만일 뿐이다. 오히려 날라리가 주인공일 때, 모범생들은 공부 기계나 기회주의자쯤으로만 묘사되니 바르게 산 사람들은 두 배로 억울하다.
무법자를 어물쩍 넘기는 것이 인간미 있는 것은 아니다. 정과 부패는 구분되어야 한다. 지각하는 학생 때문에 수업을 늦게 시작하는 것은 강사 편의의 부패다. 익숙해서 부패인지도 모르는 인습이다. 그렇다고 약속 10분 늦은 사람에게 싫은 티내는 사람은 나도 싫다. 소소한 무법자에게도 관용이 필요하다. 무법자들은 관용을 자기중심적으로 이해하고 활용하고 있어서 뻔뻔할 뿐이다. 배달 어플 리뷰에는 무법자들의 흔적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떼쓰면 작은 서비스를 받는 경험이 반복 학습되었기에 이들은 자신이 잘못한 지도 모른다.
우는 아이가 떡 하나 더 받아먹으며 버릇이 나빠지는 동안 울지 않는 아이는 소외 받았다. 선량한 규칙주의자들은 죄가 없다. 선물은 울지 않은 아이의 몫이어야 한다. 산타할아버지의 실천 윤리를 본받아야 할 때다.
2. Yes : 떡집 사장님들
우는 아이의 눈물에 주목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눈물의 진실성이 떡의 당위를 결정한다. 아이는 오죽하면 울었을까. 단순 떼쓰기가 아니라 하루를 꼬박 굶은 아이의 눈물은 생명 윤리를 호명한다. 아이의 고통을 볼 줄 모르는 좁은 시야는 차가운 정의의 성에서 저 혼자 고고하다.
진짜로 떡이 필요한 아이의 울음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너도 나도 각자의 이유로 울고 있어 노이즈가 넘쳐난다. 내게 수강했던 편입 준비생이 해를 다음 해에 문득 돈을 빌려 달라고 요청해 왔을 때, 나는 오죽하면 내게까지 우는 소리를 늘어놓나 싶어 빌려줬다. 그러나 약속 기한을 넘겨 몇 번 문자를 넣어도 답이 없었다. 전화를 해보니 없는 번호로 나왔다. 그 이후로 내 마음은 좀 더 닫혀버렸다.
떡이 간절한 사람들은 울지 못하기도 했다. 울어 봤자 소용없는 현실을 학습한 때문이기도 했고, 울 기력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고, 우는 시간에도 어떻게든 살아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들은 소리가 없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누군가에게 발굴되어 SNS에 의해 공론화 되었다. 사람들은 이들을 직접 돕기도 했고, 이들을 돕던 떡집을 돈쭐 내기도 했다. 떡을 나누는 행위가 자신의 인격을 포장한 액세서리로 쓰인다고 하더라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
아직 세상에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울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 울음을 꾸역꾸역 찾아 떡을 나누는 소박하지만 따뜻한 떡집 아저씨, 아줌마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당신들은 마음의 사장님이다. 나는 사원이나 대리여서 산타 보기엔 당당해도 당신들 보기엔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