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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Jan 11. 2022

대형마트 - 시민 충전

취향은 특가에 비례했다. 라면의 구매 기준은 행사 유무다. 대형 마트에는 항상 ‘+1’ 상품이 있었다. 우유도 할인을 하거나 요구르트 하나라도 더 주는 것을 택했다. 김, 휴지, 치약, 세탁 세재도 다르지 않았다. 좋은 품질과 예쁜 광고는 나를 유혹하지 못했다. 주머니 사정만이 선택의 기준인 것이다. 평소에 좋아하지 않던 빵도 깜짝 반값이 되면 갑자기 먹고 싶어졌다. 내 주머니에 자유민주주의는 없었다.


민주 시민이라고 하지만 민주주의를 체감하기는 어려웠다. 기껏해야 투표권 정도인데 수 년 마다 한 번씩 행사할 뿐이었다. 그나마도 내 뜻대로 되지 않았고, 된다고 해도 내가 꼭 필요했던 것은 아니어서 민주시민으로서의 나는 자각되지 않았다. 그 외의 민주주의는 아비투스보다 멀었다. 상품 선택뿐만 아니라 거주지, 학교, 배우자도 지갑이 지배했다. 자유에도 가격이 있는 것이다. 자유가 자유롭지 않아서 나는 정치적 시민이라기보다는 경제적 시민이었다. 하긴 정치도 분배 정의를 결정하는 방식일 뿐이니 둘은 다른 말이 아니겠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것을 모를 때는, 내가 휴일에 짬을 내어 대형 마트에 가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동네에 있는 할인 마트와 대형 마트는 가격 차이가 거의 없었다. 왕복 시간과 차비를 감안하면 동네 할인 마트에 가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막상 가도 특별히 살 것이 없었다. 혼자 살고 있어서 대형 마트에서 묶음 판매되는 것들은 참치 캔이나 3분 요리가 아닌 이상 대체로 유통 기한을 넘기기 마련이었다. 손에 들었다가도 집 앞에서 사도 되는 것을 굳이 무겁게 들고 갈 필요 있겠나 싶어서 도로 놓기 일쑤였다. 그런데도 일정 기간 동안 가지 않으면 금단현상처럼 가고 싶어졌다.


빈 카트를 끌고 매장을 돌면 상품숲이 고즈넉한 산책로가 된 것처럼 여유로웠다. 카트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남들과 다를 것이 없어져서 카트의 빈 공간만큼 내 선택 권한이 커지는 것 같았다. 카트를 끌고 있는 한 나는 못 사는 게 아니라 안 사는 것처럼 보였다. 그 얄팍한 권리의 기분 때문에 대형 마트에 가는 모양이었다.


일상에 없는 자유였다. 일상이란 할 수 없거나 하면 안 되는 것들로 구성된 금전의 질서였다. 나이가 들수록 아비투스의 그늘은 짙어져 내가 나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연봉 주변 이야기뿐이었다. 결국 연봉만큼의 자유만 누리는 것이다. BMW를 타는 아주머니의 자유와 버스를 타는 내 자유는 동음이의어일 뿐, 현실적으로 외국어나 다름없다.


그러나 카트만 있으면 대형 마트 매장을 거니는 사람들은 모두 평등해진다. 백화점과는 사정이 다르다. 백화점에서는 연봉의 최전선에서 과시적 소비가 이뤄진다. 몇 달, 몇 년을 건 ‘각오’가 서지 않은 한 상위 계층과의 소비 격차는 메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대형 마트에서는 연봉의 후방에서 생필품 위주의 소비가 이뤄진다. 생필품에도 가격 차이는 나지만 벽이 생길 정도는 아니다. 축협 우유를 먹다가 서울 우유 정도는 먹을 수 있고 에비앙 생수 하나를 산다고 해서 허리가 휘지는 않는다. 게다가 마트에는 외출복이 아닌 생활복을 입고 만만하게 가기 때문에 다들 비슷하게 생긴 목구멍 소비자처럼 보여 위축되지 않는다. 내가 싸구려 수트라도 입고 가는 날에는 겉보기로는 계층 전복도 가능하다.


BMW와 버스가 100원짜리 카트에서 자유의 의미장이 겹쳐진다. 나와 똑같은 카트를 끌고 있는 당신들의 얼굴이 내 얼굴 같다. 나는 사지 않을 수 있어서 매장의 상품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경제가 민주화되어서, 나도 이 세상에 허락된 시민이 된 것 같다. 민주 시민의 발걸음은 빈 카트만큼 가볍다.


자유의 환각은 카트가 채워지면서 금이 갔다. 카트 안에 담기는 상품들은 부자유의 물증이었다. 가끔은 괜한 저항 정신이 발휘되어 마구잡이로 물건을 담을 때도 있지만 아비투스는 혁명보다 힘이 셌다. 계산대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현실은 ‘삑’, ‘삑’ 소리를 내며 바코드로 된 창살을 날렸다. 무리했던 물건들을 빼는 것으로 급하게 고해성사를 바쳤다.


마트를 나오면 약간은 허무한 기분도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다음부터는 굳이 대형 마트에 가지 않기로 번번이 다짐했다. 그러나 국가 경제가 성장하고, 경상수지 흑자가 어떠하고, 누군가가 FA 대박을 터뜨리고, 누군가가 고급 전원주택을 공개할 때마다, 움직이지 않는 내 연봉과 위로만 움직이는 물가 앞에 선 내 시민은 착실히 고갈되었다.


그래서 대형 마트로 가는 악순환을 끝낼 수 없다. 100원짜리 카트를 밀며 어슬렁어슬렁 시민을 충전해야 한다. 나는 자랑스러운 카드 명세서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카트 공화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한다. 아니, 다짐된다. (끝. 2018년 논객닷컴 칼럼 공모전 2위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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