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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Jan 05. 2022

연말연시의 음식 - 무의미 축제

“자넨 왜 자살하지 않은 겐가?”

이 글은 내 사후, 옥황상제가 내게 물을 예상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2011년 12월 31일 ~ 2012년 1월 1일 


연말연시의 세상은 희망들로 가득 차 있고 나는 그 희망들이 불쾌했다. 나무를 휘감아 놓은 하얀 전구들, TV 방송마다 지껄이는 새해타령, 포털 첫 화면에 장식된 용 그림, 보기 싫어도 보이는 일출 관련 뉴스들은 저 세상에만 찬란했다. 나의 내일은 닥쳐온 목구멍의 하루일뿐인데 세상은 무언가 대단한 것을 보내고 더 좋은 무언가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들만의 축제가 강간처럼 나를 관통했다.


정리할 것이 없어서 계획할 것도 없었다. 내가 살았던 1년은 70여 만 원이 남은 잔고로 기록되었고 그나마도 카드사가 우선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내가 살아갈 1년도 카드사에 납부하기 위해 숫자를 날라야 했다. 사적인 계획은 숫자의 변수 앞에서 무용지물이었다. 이를 테면 나는 69편의 논술 답안을 작성할 계획이었지만 원장님은 교재 출판을 계획하고 있어서 내 계획은 입도 뻥긋 못했다. 나는 그냥 작년처럼 살아남으면 그뿐이었고, 나의 생존은 내 의지보다는 세상의 뜻에 달려있음을 이제 인정한다. 2011년 마지막으로 받은 문자 메시지는 동네 할인 마트에서 컵라면 한 박스를 비롯한 식료품을 사고 결제한 카드사의 알림 메시지였다.


12월 31일 밤, 대학 친구들이 송년회 자리에 불렀지만, 누군가를 만나서 떠들어댈 기분이 아니었다. 아프리카TV로 [무한도전]을 보면서 어제 먹다 남은 양념 치킨을 마저 먹었다. 꾸들꾸들해진 양념 때문에 닭튀김에 달라붙은 은박지가 씹혔다. 컵라면에 학원에서 추석 선물로 받은 스팸 몇 조각 썰어 넣고 먹었다. 같이 산 귤 10개도 다 먹었다. 한 달여 전 어머니가 갖다 주신 마른 오징어도 구워먹었다. 나는 먹으며 설사를 했고 한석규는 SBS 연기 대상을 탔다.


한석규가 동료에게 감사를 전할 때, 나는 버스 정류장 앞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를 파는 내외를 떠올렸다. 50대 후반쯤의 그들은 나오지 않을 때도 종종 있었고, 아주머니만 나올 때도 있었다. 거동이 느렸던 아저씨가 아프거니 했다. 내외는 항상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손님들과는 거의 말을 섞지 않았다. 기름때가 껴 손의 주름이 깊어 보였다. 2011년의 마지막 날에도 아주머니는 혼자 빈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를 팔고 있었다. 후줄근한 노동은 재활용 쓰레기를 수거하는 아주머니로 건너뛰었다. 그녀는 서너 달 전부터 옆 원룸 공터 앞에 재활용 쓰레기를 모아다 날랐다. 처음에는 폐지만 모으더니 플라스틱과 깡통도 모았다. 통닭 냄새를 빼내려고 창을 열었을 때, 그녀는 새해를 한두 시간 앞두고 폐지를 정리하고 있었다. 멀리 중방동에 그어진 ‘e-편한 세상’ 3단지의 붉은 스카이라인이 불편했다.


새해 첫 문자를 출근 버스 안에서 받았다. 혹시나 했지만 수협이었다. ‘나는 돈을 번다, 고로 존재한다.’는 잠시 후 인근 온천에서도 증명해왔다. KB에서, 신한은행에서, 삼성전자에서, 하이마트에서, VIPS에서, 롯데 백화점에서, 대구 백화점에서, 기아자동차에서, 더 많은 곳에서 나를 증명해줬더라면 나의 새해 첫 끼니가 달라졌을까. 사무실은 히터를 틀어도 추웠고, 새해 처음 입에 넣은 음식은 샤니 포켓몬스터 빵과 두유였다. 새해 첫 날에도 학생을 실어오는 학부모님을 향해 활짝 웃었다.


눈이 왔다. 눈이 귀한 대구에, 차 천장에 쌓일 만큼의 눈이 새해 첫 날 내린 것이고, 부산과 대구에만 살아왔던 내게 새해 첫 날의 눈은 처음이었다. 다른 선생님들은 제각각 아내나 남자 친구와 먹을 저녁 메뉴를 눈에 맞추고 있을 때, 나는 기어이 참지 못하고 내게 읊조리고 말았다. - 씨발.


선배 강사의 아내 분이 백화점에 가기 전에 카드를 받으려고 돌이 지난 아이를 데려왔다. 선배 강사는 식구 이야기를 할 때도 무심한 듯 건조하게 말하면서도 아들을 안아 올린 그의 얼굴은 환했다. 내가 학부모님께 보여드렸던 가면이 아니라 뿌리가 튼튼해 미소를 거두어도 얼굴에 생기가 남았다. 퇴근 후, 그는 아내를 데리러 가서 식구들과 함께 ‘눈도 오니까 우아하게’ 순대국밥을 먹을 것이었다. 그가 누리는 생물학을 먹먹하게 바라봤다.


퇴근길에도 눈발은 약하게 날렸고 나는 우산 없이 눈을 맞았다. 옷에 묻으면 곧장 사라지는데도 눈송이들은 무거웠다. 집으로 가는 지름길은 으슥해서 인적이 드물었다. 얇게 쌓인 눈 위로 발자국 두 개가 나란히 이어져 있었다. 나는 한 쌍의 발자국을 피해 걸었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눈길에 찍힌 내 발자국은 나를 따라와 멈춰 있었다. 내 발자국은 길게 이어진 카드 명세표 같다고 생각했다. 새해 첫 날도 카드사의 연속성에서 위배되지 않았다.


비빔면으로 저녁 겸 야식을 먹고 아프리카TV로 [1박2일]을 봤다. 엄태웅의 절친으로 나온 이선균은 시민에게 자신의 아들 사진을 보여주며 뿌듯해 했다. 선배 강사와 똑같은 생물학의 행복이 모니터에 가득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자아실현만이 인생 최고 가치인 것처럼 배웠고 그렇게 살아왔지만, 사실은 인간도 생물을 벗어날 수 없어서 인간 최고의 행복은 생물학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2012년 1월 1일 22시경에 인정했다. [1박2일]을 보며 혼자 웃다가 [개그콘서트]를 보며 혼자 웃었다. 속이 부대꼈다.




2021년 12월 31일 ~ 2022년 1월 1


저 글을 썼던 사실은 기억했지만 10년 전인지는 몰랐다. 사회생활, 처음이라 그래 며칠 뒤엔 괜찮아져 그 생각으로 벌써 10년이다. 세상이 만든 기념일마다 외로움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혼자 남은 블라디미르나 에스트라공이다. 희망찬 새해는 10년째, 아니 사실은 그 이전부터 고도처럼 오지 않았다.


내가 돌연사 한다면 내 방은 나의 죽음을 자살로 증언할 것이다. 책상에서 부엌, 화장실까지 두세 걸음 생활권인 좁은 방, 12년 이상 된 벽지와 장판, 행거에 계통 없이 걸린 싸구려 옷가지, 쌓아 둔 인스턴트식품과 그 옆의 약봉지까지, 당근마켓에서도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속수무책의 중고만이 나를 설명했다. 그러나 내 방의 증언은 거짓이다. 내 현실 자아는 이미 죽어버린 이상 자아의 시신을 파먹고 사는 벌레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나는 아무튼 살아남았다. 그저 삶이 시시하고, 이 시시한 걸 위해 숫자의 고단함을 감수하자니 번거로울 뿐이다.


2011년 12월 31일 한석규가 [뿌리 깊은 나무]로 연기 대상을 탔고, 2021년 12월 31일 나는 또 [뿌리 깊은 나무]를 보고 있다. 네 번째인가, 다섯 번째다. 이도가 지랄하고 자빠졌다고 이야기할 때, 나는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하며 입 안에 든 한 해 마지막 음식을 꼭꼭 씹었다.


올해도 내 한 해 엔딩 클리셰는 변하지 않았다. 어김없이 치킨이었다. 치킨 값이 올랐다고 하지만, 배달앱에서 7,000원 할인 행사를 한 덕분에 배달비 포함해도 10년 가격보다 저렴했다. 내가 먹는 것은 치킨 집 사장들의 희망차지 않은 새해인 셈이었다. 그들은 무슨 재미로 살까.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김 선생,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원장님은 이런 학원을 바닥에서부터 일구신 거 아니세요? 멋지십니다.”

“그래, 돈이라도 벌어야지.”


10년 전이었나, 위로 받아야 할 사람은 나인데, 원장은 질문을 가장한 자조 섞인 탄식을 흘렸다. 원장은 나이 마흔이면 강의하지 않겠다고 하더니, 그 나이에 이르자 아예 대치동에 새 학원을 차렸다. 서울-대구 강사 회의로 대치동에 갔다가 원장을 만났을 때, 원장은 이제 법인 체제이므로 자신을 ‘대표’라 부르게 했다. 내가 들은 마지막 풍문은 목동으로 진출한 것이었다. 서울대 출신이 사교육계로 미끄러졌을 때는 그 만한 사연이 있었을 텐데, 당신은 10년 안 걸려 수렁에서 벗어나 당신 동문들과 어깨를 맞댈 만한 직함과 알맹이를 얻었다. 대표는 이제 그렇게 살아도 되는지 자조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이 마흔이 넘어서도 강의로 밥 벌어 먹고 있었다. 원장이 대표로 환골탈태하던 시기보다 한두 살 많아진 2022년, 나는 첫 끼니로 편의점 샌드위치를 먹었다. 몸 생각해서 양상추가 많이 든 것을 골랐다. 포켓몬스터 빵에 비하면 진수성찬이다.



나는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과체중, 빈약한 모발, 상시 복용 중인 약은 10년 전에 없던 것들이었다. 앞으로의 10년은 지난 10년보다 더 나빠질 것이 자명했다. 낡을 대로 낡은 스마트폰을 더 비싼 유지비를 들여가며 평생 써야 하는 것보다 더 막막한 사태다.


1월 1일의 퇴근 길, 또 살아가야 한다는 실감에 맥이 빠졌다. 올 연말에 맞을 치킨의 클리셰가 364일 전부터 지겨웠다. 지겨움은 상상할 필요 없는, 고이고 고인 현실이었다. 욱 하는 마음에 올 연말에는 치킨보다는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어이없게도, 새해 계획이 생겨버렸다.


작년 가을 돌연 사라진 폐지 줍는 할머니도 연말연시만큼은 맛있는 음식을 먹었으면 좋겠다. 물론, 우리 삶은 여전히 소중하지 않다. 그러나 삶이란 무(無)에서 뜬금없이 태어나 죽음을 향해 쓰는 생떼이므로 몽니를 부린들 이런들 저런들 어떠하지 않다.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을 때까지 상상력이 부족하길 바란다. 그렇게 옥황상제에게 할 대답을 찾았다.



“이렇게 살지 몰랐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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