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기적인 청소년들
캠프의 목적은 휴식을 통한 "자존감과 에너지 회복"이다.
수많은 캠프 경험과 전국 기숙사 운용 학교를 통해서 군대식 캠프나 합숙은 실패한다는 생각이다.
중고등학교 기숙사의 실태를 아는 학부모는 아이를 보내고 싶지 않을 정도이다. 한마디로 돼지우리. 이유를 알아야 한다.
현대로 올수록 아이의 성장은 느려진다. 유럽의 경우 18세기부터 장난감이 상품화된다. 공장에서 만든, 돈 주고 사는 장난감의 출현이다. 그때부터 아동은 시장으로 탈바꿈한다. 돈 많은 노인들이 늘어나자 실버산업이 커지는 것과 같다. 아이들은 다음 세대 구성을 위해 건강하게 빨리 자라서 생산성을 확보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다가 자본주의 시장의 한축을 구성하게 되자 노동시장의 편입을 최대한 늦추게 만든다. 한국도 70년 대 이후 아이 및 청소년은 부모의 주머닛돈을 기업으로 흐르게 하는 매개로 역할 지워졌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장차 생산의 주체가 될 것이란 생각을 아예 하지 못한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학습노동은 생산성 zero의 삽질이다. 의미 없는 '삽질'을 해야 학습지 출판사가 먹고 산다. 사교육 시장이 2009년을 기점으로 한국 전체 농어촌 GDP를 앞지른 것도 의미 없는 삽질 덕분이다. 그런 녀석들을 어느 날 갑자기 낯선 공간에 넣고 청소, 이부자리, 취사, 빨래, 학습, 훈련을 하도록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20살이 돼야 성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근대의 이데올로기이다. 미성년과 성인의 경계는 매우 유동적이다.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보이듯 19세기 영국의 아동노동은 일반적이다. 20세기 초 미국의 통계자료에는 5살 노동자가 기록돼있다. 니카라과 반군의 9살 전사는 해외토픽으로 소개된 적도 있다. 16세 유관순 '누나'를 생각해보라. 유관순은 치밀한 전략가였고 사상가였다. 4.19 때 거리에서 총 맞아 죽은 중2 여학생은 미리 써놓은 유서에서 민주화를 위해 언니, 오빠들과 함께 하겠다고 썼다. 그 끝이 비록 죽음이라고 할지라도. (18일 여수로 내려오는 버스에서 TV를 켜놓았는데 4.19 다큐가 나오고 있었다. 자료사진에 초등학생 데모대 모습이 보이니까 근호가 흥분한다. "선생님, 말이 되나요? 초등학생이 거리로 나와 데모를 하다니. 저거 거짓말이죠." "아니, 사실인데" "아아~ 저럴 순 없어" 정치인이 장래 희망인 근호가 자기보다 어린 친구들의 현실 정치 참여에 감탄한 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현대사에 대단한 관심과 지식량을 자랑하는 근호 입장에서 자신이 몰랐던 사실이 TV에 나온다는 것에 대한 한탄이었다. 정말 재밌고 귀여운 녀석이다.)
그러니까 "캠프"는 소비자로만 역할하는 아이들을 붙잡아놓고 갑자기 생산력을 갖춘 성인이 되라고 협박하는 프로그램이다. 남자는 군대를 갔다 와야 철이 든다고 하는 말의 배경도 똑같다. 물리적 폭력으로 협박하여 한치도 어긋남이 없이 시간표대로 생활하게 하는 것이 군대니까. 우리 아이들뿐만 아니라 한국의 청소년들은 "캠프"에 적응하기에 너무 준비가 없다. 사실 대안학교는 공교육 아이들을 학교 밖으로 빼내서 특별한 과정을 통해 철든 성인으로 빨리 자라게 하는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철든 청소년들은 학습이든 노동이든 참고 견딜 것이기 때문이다.
대안학교 1세대 386 교사들은 자신의 경험에서 그 해법을 찾았다. 386들은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는 소비에 집착하는 철없는 청소년이다가 '조국'의 암담한 현실을 알게 되자 '투사'로 변신하게 된다. 강한 도덕적 무장을 통해 성실성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고 살아간다. "조국의 민주화와 민중의 해방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변신에 스스로 놀라고 흐뭇해했던 경험이 있다. 비록 옛날이 돼버린 이야기일지라도. 그런 386세대 교사들의 시도는 거의 실패한다. 지금 아이들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의 부모가 그런 386세대이다. 성실함으로 승부하여 성공한 경우이기 때문에 자식 양육 태도도 대안학교 1세대스럽다. 자신의 경험을 그대로 자식에게 이식하려고 한다. 문제는 아이들이 부모세대와 다른 종이라는 것이다. 기업이 아이들을 다른 인간으로 만들어놓았는데(예비적 생산주체가 아닌 마치 영원한 소비자로 남아있을 것 같은 존재;타의로 강요된 피터팬들) 눈치 채지 못한다.
그러니까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넌 왜 성실하지 않지?" 이런 질책과 공격은 의미 없다. 아이들은 성실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안 하고 있는데 왜 성실하지 않냐니.... 잘 이해하지 못한다. 더구나 니들(기성세대)이 자신들을 그렇게 자리매김하고 뭔 딴소리냐하는 투다. 아이들에게 생산의 경험을 돌려줘야 한다. '준다'가 아닌 '돌려줘야 한다'는 표현은 빼앗았기 때문이다. 원래 인간은 생산 본능이 있다. 무엇이든 하려고 하지 가능한 하지 않으려고 않는다. 안 하는 것이 편안한 것은 결코 아니다. 몸이 묶여 있으면 머리로 공상이라도 한다. 어른들은 멍 때린다고 표현하는 공상은 대단한 생산작업이다. 청소년은 당연히 공부도 해야 한다. 문제는 학교식 학습은 생산과 거리가 먼 '삽질'이라는 것이다. 생산적인 공부는 지구에 뭔가 남기는 작업이다. 몸으로 하는 작업이다. 공상이 허용되는 작업이다. 칼라 작업이다. 소통하는 작업이다.
고스톱이 딱 들어맞는다. 고스톱은 몸을 쓴다. 끊임없이 경우의 수를 상상하고 높은 확률을 계산한다. 내 편과 소통하고 적을 견제한다. 화투장이 칼라다^^. 화투 담요 위에 돈이 남거나 팔뚝 위에 손가락 자국이라도 남는다. 결국 고스톱보다 못한 공교육 공부를 가지고 성실성을 들이대면 현재 청소년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른들이 할 수 있는 말은,
"잔말 말고 그냥 하라면 해!!!!!"
반대로 해야 한다.
핵심은 자기 자신이 생산의 주체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인데, 이건 절대 주입식이 불가능하기에 부모나 교사가 성실성을 보이고 아이들이 생산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 처음엔 어쩔 수 없다. 이 과정을 건너뛰어 아이들을 몰아붙일 수 없다. 그러니까 기숙학교들은 비용의 부담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서비스를 제공해야 성공할 수 있다. 방청소, 빨래, 식사, 침구 정리까지 도와주는 것을 넘어 완벽하게 서빙해야 한다. 처음엔 그렇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아이가 스스로 하겠다고 할 때까지. 그때가 교육과정의 완성이다. 그때는 반드시 온다. 그러면 학교를 졸업하게 되고 나이와 관계없이 어른이 된다. 졸업 조건일 수 있는 덕목을 입학과 함께 요구하는 것은 잘못이다. 자기 앞가림 잘하는데 뭐하러 대안학교에 가나.
그런 생각으로 교복(敎僕)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자기 몸뚱이만 씻으라고 했다. 하지만 아이고~ 자꾸 잔소리가 는다. 뒤치다꺼리가 한도 끝도 없다. 빨래 거리도 가방 구석이나 책상 틈에서 꺼내야 한다. 급기야, 침대 시트의 똥칠(?)까지 처리해야 했다. 실상은 이렇다. 엄지손가락만 하게 낱개 포장된 허쉬 초콜릿을 7개 확보한 근호가 3개는 잠자기 직전 먹고 4개는 곁에 두고 잠들었다. 방은 뜨끈뜨끈했다. 초콜릿은 포장지 안에서 물이 됐다. 아침에 일어난 녀석들이 아무 생각 없이 밟았다. 터진 초콜릿 물이 방바닥으로 흘렀고 발에 묻었다. 더 자겠다는 녀석의 발을 따라 침대로 따라간 초콜릿 물을 내가 똥칠로 착각했었다. 근호가 뭘 알겠는가? 터진 초콜릿을 보고도 아무도 치우지 않았지만 하다못해 내게 하소연이라고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얘네들 아무 생각 없다. 아마 그 상태로 한 달도 두 달도 살 것이다. 위에서 말한 돼지우리의 첫 시작이다. 어쩔 수 없이 근호에게 잔소리한다. "방에서 군것질거리 먹지 말아라" 두 손 두 발 다 들게 만드는 일은, 다음 날 허쉬가 아닌 초코파이로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헐~
어쨌든 침대 패드를 들어내고 빨래 거리를 다 모아서 첫 빨래를 했다. 옥상 빨랫줄에 널린 빨래를 보니 기분 좋다. 절대 이타적 행동이 있을까? 고행도 그 속에서 기쁨이 있을 때 가능하지 않겠는가. 정신없이 아침부터 밤까지 달려가지만 맑아지는 머리를 느낀다. 아이들의 계속적인 엽기 행각이 내 수행의 소재가 되니 고맙기만 하다. 반어법이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