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달나무 Nov 05. 2017

고마운 선물

선생을 했다기 보다는 좋은 도반을 만난 경우라고 봄

1.


3년 전에 중2 남2 여1 학생과 함께 주말마다 석달을 만났다. 동기는 썩 훌륭하진 않았다. 말귀 잘 알아듣는 아이들과 공부해보면 어떨까 싶었다. 당시 기준 1년 전에 중3 남학생 2명과 석달을 공부했는데 결과가 참담했다. 학교운영이 힘들어 고육책으로 과외를 한 것인데, 담배 사주고 소주 사주면서 조공하다가 끝났다. 금요일 저녁에 만나서 일요일 점심 때 헤어지는 스케줄이었다. 아이들에게도 미안하고 돈 주고 맡긴 부모에게도 미안하고 그랬다. 나는 지칠대로 지쳤지만 고난의 행군을 과외비 덕분에 살아남았다. 하지만 내게는 큰 상처였다.
그래서 이번엔 다른 색깔의 중2 세 명을 만났다. 오기가 발동했다. 교육비를 받지 않았다. 11주를 만났다. 찰스키핑 프로젝트라고 이름했다.
그 아이들이 지금 고2, 곧 고3을 맞는다.


2.


찰스키핑은 내가 좋아하고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영국 그림책 작가이자 유명 일러스트레이터다. 국내 번역된 7권을 모두 가지고 있었고, 번역되지 않은 몇 원서도 소장하고 있었다.
그림책 분석과 내용에서 끌어낼 수 있는 20세기 현대사(마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야기 같은)와 어느덧 널리 퍼진 구조주의에 대해 살피는 시간을 가졌다. 수학공부를 기하 파트를 중심으로 진행했고 영국 원어민 선생님과 원서수업을 하도록 했다. 유일한 찰스 키핑의 biography를 아마존 uk에서 사놓은 게 있어서 영국 선생님과 함께 읽기를 했다. 당연히 원서읽기가 버겁지만 그냥 버티라고 했다. 모르는 단어 투성이지만 모르는 채로 그냥 읽으라고 했고 원어민 교사에게는 중요한 단어만 영어로 설명해주라고 부탁했다. 매주 3시간 원어민과 상당히 두꺼운(국배판 500쪽) 키핑 전기를 다 읽었다. 

원어민 패이를 내가 지급했다. 원어민과 매주 3시간씩 책읽기, 그것도 매우 전문적인 성격의 biography를 중학생이 뜻도 잘 모르면서 닥치고 30시간을 읽었을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매우 궁금했다. 일종의 실험이었기에 비용지불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실험동기는 「무지한 스승」에 있었다. 나는 그 원서를 읽을 능력이 없었지만 랑시에르 덕분에 아주 당당한 '무지한 선생'이 될 수 있었다. 아이들에게 집에서 복습이나 예습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원어민 교사를 만나는 3시간만 집중하라고 했다.
의자에만 앉아있는 지루함을 이기려 국립중앙박물관에도 가고, 당시 개봉한 다이빙벨도 관람하고 이상호 기자도 잠시 만났다. 또 뭐했지? 타임슬립을 주제로 한 영화를 연속적으로 감상하기도 했다. 암튼 매주 토요일 12시간 정도 함께 했다. 11주 동안.
이 모든 것이 실험적인 프로젝트였다.

학습결과물을 각자 책으로 편집했다. 그 중 한 쪽

3.


프로젝트 결과보고서를 3년 만에 받았다. 예상보다 빠른 결과물에 좀 당황스럽다. 하지만 이렇게 페북에 글을 쓸 정도로 기쁜 일이다. 세 학생은 각자 개성이 달랐는데, 그들은 학생이고 내가 선생 명찰을 달고 만났지만 모두 고마운 존재였다. 무모한 프로젝트에 숨 차 하면서도 끝까지 완주해줬기 때문이고 종종 나의 스승이 돼주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마지막 날에는 아이들 스스로 보고서를 마무리하느라 자정까지 있다가 헤어졌다. 밤을 새겠다는 아이들을 내가 힘들어서 집으로 보냈다. 헤어질 때 학생 한 녀석이 양말봉투 같은 걸 내밀면서 고마워서 주는 선물이라고 했다. 집에 와서 꺼내 보니 자신이 찍은 사진을 흑백으로 리터치해서 단순한 프레임에 넣은 작품이었다.

사진선물을 받아서 집 책꽂이에 보관하고 있다


이 친구는 이미 '훌륭'을 가슴에 붙이고 있던 녀석이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중2가 있을 수 있지" 
뭐 이런 소리가 절로 났다. 그래서 내가 종종 말했다. 
"너 잘난 거 너도 알거야.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잘 난 건 대부분 걸림돌이 된다. 잊지 말아라"
*아래 공책 사진 : 이 아이가 11주 수업을 노트 한 권 가득 정리했다. 부분 부분 읽어보니 그야 말로 입이 쩍~ 내가 공부하고 싶어서 그러니 공책을 스캔하자고 했지만 아이는 확실히 거절했다. 그후 1년이 지나서 다시 한번 스캔 뜨는 걸 부탁했지만 또 다시 거절했다. 나는 그 노트를 손에 넣으면 어디서든 자심감 있게 프로젝트 수업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11주 프로젝트를 나는 정리한 게 없어서 또 다시 진행할 수 없다.

11주 동안 공부한 내용이 대학노트 한 권에 빼곡히 쌓였다

4.


양평에서 아이들과 한 달을 지내고 집에 복귀했더니 작은 소포가 책상 위에 있다. 전화를 받아서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3년 전 놀라운 노트를 보여준 아이가 친구와 함께 프로젝트 시집을 발간해서 내게 한 권 보내주고 싶다고 주소를 물었다.
시집은 3년만에 발간된 찰스키핑 프로젝트의 결과 리포트다. 한 10년 정도 지나서 받을 줄 알았던 보고서를 예상보다 빨리 받은 것이다. 가슴이 뛰었다. 소포 포장을 뜯고 가슴은 더욱 뛰었다.


5.


네 명의 고등학생이 프로젝트 팀을 만들어 옴니버스 시집을 낸 것이다. 자가출판이 손쉬운 부크크에서 발행했다. ISBN 바코드도 있고, 정가 8700원도 표시된 정식 출판물이다.
네 명은 이름 대신에 필명만 표시했다. 빛길/칠흑/혜윰/한울 네 명이다. 그중 3년 전 내가 만난 중학생 도반은 '빛길' 이름을 썼다. 빛길은 빗길이기도 하다며, 빗길을 걷는 이에게 부디 빛길처럼 걷길 바란다는 기원을 써놓았다. 시집 제목이 「비를 긋다」

시집 『비를 긋다』


6.


표지를 넘기니 속지에 뭐라 썼더라. 속지 색깔 때문에 글씨를 얼른 알아보기 어려워 밝은 불빛 아래에서 눈에 힘을 주고 읽었다.
"항상 감사했습니다. 지지학교에서 보낸 한 계절이 그 다음에 맞은 모든 계절을 바꾸었습니다. 2017년 가을 찰스키핑 프로젝트 김○○"
한 계절이 다음 모든 계절을 바꾸었다니.... 그래야 고작 10번 정도의 계절을 맞았을 텐데.... 
먹은 게 언친 것처럼 명치 끝이 묵직하다.

7.


기쁘다. 물론. 이 아이는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내 공부 도반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학습결과물 책  中


8.


거의 30년 전이다. 해남 대흥사에서 한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당시 40 초반으로 보였던 비구가 말했다.
삶이 지나가도록 시간을 죽이는 겁니다. 오직 그것 뿐입니다.
수행하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고기를 먹는다는 큰 형님
뻘 비구에게 들은 말에 충격이 상당했고, 지금까지 화두로 잡고 있다. 당시 그 비구보다 훨씬 나이를 더 먹고 이제 조금 알 것도 같다.
이제 진짜 내가 나에게 하고 싶은 말.

칭찬 받을만큼 잘 크고 있는(이미 잘 성장한) 과거의 내가 만났던 학생에게서 칭송을 받는 것을 보람으로 생각하지 말아라. 
그런 보람으로 코 끝이 새끈하고 가슴이 먹먹해진다면 내가 얼마나 속 썩이는 녀석들을 원망했던가를 떠올린다. 
선생하면서 보람을 염두에 두지 말기를 바란다.
사랑하지도 사랑받으려고도 하지 않는 경지처럼 내가 만난 어린 목숨들의 목표를 마음에 두지 말아라.
나는 단지 어린 목숨과 만나 대화한 그 날 그 시간만 서로 존재했을 뿐.
내가 선생을 하면서 만나는 학생이 누구인가를 마음에 담지 말기를 바란다.


9.


흐름
-빛길-

겨울의 끝자락
날이 너무 따뜻한데
곁에 당신이 없어
흰 눈이 울었다
-봄이다


10.


아직은 이 어린목숨이 많이 이쁘다.

0416

아이야
다음 생에는
봄꽃으로 태어나거라

한철 세상 빛깔 칠하고
한없이 피어
짧은 생 서럽지는 않도록

아이야
다음 생에는
파도로 태어나거라

너울너울 밀려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세상 둘러보고
여기 사람들 마음까지 닿도록

아이야
어쨌든 이 세상 사람으로는
오지 말거라

봄꽃도, 파도도 아니어서
떨어지고 부서지기 두려운
이 세상에는 태어나지 말거라

봄꽃으로
파도로
그 무엇인가로 태어났다가
한참 후에나
다시 오거라

-빛길
완성된 학습결과물 책 中


매거진의 이전글 대마도에서 상상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