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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달나무 Nov 13. 2017

독해력의 핵심

자기 경험을 유보하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가

1학년 교실에 들어갔다. 한 차시만 수업했는데 89년 1학년 담임을 한 이후로 처음이다. 남녀 각 10명씩 20명의 교실은 말 그대로 오순도순 분위기. 89년 당시 한 반에 50명이었는데 어떻게 학급운영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창의적 체험시간” 수업이라 1학년 아이들에게 다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약간의 몸짓과 목소리 연기를 했더니 처음에 떠들던 아이들이 금세 이야기에 빠져서 모두 귀를 기울인다. (아래 이야기는 축약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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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키에 얼굴도 잘 생긴 청년 형제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운동을 열심히 해서 몸매도 멋졌습니다. 육체미대회에 나가서 모두 상을 받을 정도입니다. 이들이 길을 걸으면 많은 아가씨들이 관심을 보였습니다. 특히 여름철 해수욕장에서 형제의 인기는 최고입니다.
그런데 형제 모두 부끄러운 약점이 있습니다. 바로 목소리가 아기와 같아서 외모에 반한 사람들도 목소리를 들으면 호감이 금방 깨졌습니다. 고민 끝에 형제는 병원을 찾았습니다.
“의사 선생님, 저희 형제의 목소리를 남자답게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의사는 각종 검사를 해보고 심각하게 대답했습니다.
“음... 한 가지 방법이 있지만 말씀드리기가 쉽지 않네요.”
“어떤 방법이든 받아들이겠습니다. 제발 방법을 알려주세요.”
“말씀드리기 곤란하지만.... 그건 남자의 성기(꼬추/거기 등으로 나이에 맞게 적절히 표현)를 자르면 목소리가 남자다워질 수 있습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것만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형제는 아기 목소리가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살자고 다짐했습니다. 마침 여름철이니 해수욕장에 놀러가서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며 놀기로 했습니다.
해수욕장에서 수영복만 입고 돌아다니던 형제는 예상대로 뭇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목소리는 절대 입 밖으로 내지 않았습니다.
바다에서 수영을 즐기던 형제는 해안에서 멀리까지 나왔습니다. 그 때 식인 상어 죠스가 나타났습니다. 먼저 형이 죠스를 발견했습니다. 깜짝 놀란 형은 전속력으로 해안 쪽으로 헤엄치면서 동생을 불렀습니다. 
“동생아, 죠스가 나타났어. 빨리 도망쳐야 해”(아기 목소리)
하지만 아무리 빨라도 죠스보다 빠를 순 없습니다. 죠스가 형의 배 밑으로 지나갔습니다.
“동생아, 죠스가 나타났다니까. 죽지 않으려면 빨리 도망치거라.”(저음의 남성적인 목소리)
갑자기 형의 목소리가 변했습니다.
동생도 죠스를 발견했습니다. 전속력으로 해안 쪽으로 헤엄치면서 형을 찾았습니다.
“형, 어디 있어요. 죠스가 나타났어요. 빨리 피해야 해.”(아기 목소리)
물 속에서 죠스보다 더 빠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삼각 지느러미가 동생의 배 밑으로 들어가더니 물 밖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죠스가 나타났다(아기 목소리). 형 빨리 피해야 해(저음의 남성적인 목소리). 죠스가 나타났다(아기 목소리). 난 죽고 싶지 않아(저음의 남성적인 목소리).”
동생의 목소리는 아기 목소리와 저음의 남성적인 목소리를 왔다 갔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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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의 경우와 동생의 경우로 나눠서 어찌된 일인지 물었다. ①왜 형의 목소리가 변했나? ②왜 동생의 목소리는 아기 목소리와 남자 어른의 목소리로 번갈아가며 변했나?
정답을 말한 아이는 두 명. 둘 다 여자 아이다. A가 정확하게 ①번 답을 말했다. “죠스가 형의 꼬추를 물어뜯었어요.” 그런데 A는 ②번 이유를 모르겠다고 한다. B가 나서서 ②번 답을 말한다. “죠스가 동생의 꼬추를 물었다 놨다 했어요.” 3분의 2 아이들은 아무 반응이 없다. 문제와 답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이다. 나머지 아이들은 답을 듣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뒤늦게 답을 이해한 것이다. 실망스러운 결과다. 25년 전과 비교했을 때 정답을 말한 아이들 비율도 낮다.
몇몇 아이들은 다양한 상상의 답을 내놓았다. 바닷물을 마셔서 목소리가 변했다, 소리를 많이 질러서 목소리가 굵어졌다 등의 대답이 나왔다.
좀 더 놀라운 건 6학년 교실에서 일어났다. 똑같은 이야기를 6학년 아이들에게 들려줬다. 25명 중 정답을 말하는 아이가 2~3명이다. 예상을 크게 밑도는 정답률이다. 1학년 교실에서처럼 소리를 질러서 목소리가 변했다거나 바닷물을 마셔서 그렇다는 대답이 있었다. 동생의 목소리가 왔다갔다 변한 건 바닷물을 마셨다 뱉었다 했기 때문이라는 괘변을 늘어놓기도 한다.
이런 실망스러운 결과를 보이는 것은 왜일까? 이 정도면 개콘을 보고 웃을 수 없다는 거다. 몸개그 일변도의 웃찾사가 뜨고 주 시청자인 초등학생을 위해 출렁이는 뱃살과 커다란 엉덩이를 흔들거나 외모와 뚱뚱한 몸매를 대놓고 무시하는 내용으로 개그콘서트가 채워지는 현상도 관련 있지 않을까.
하나의 이야기를 듣거나 읽었을 때 등장인물의 행위에 대해 원인을 해당 이야기 속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독해력의 핵심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내가 만난 초등학생 1학년과 6학년 모두 제시된 문제의 답을 해당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경험에서 찾으려고 했다. 이야기는 의사가 제시한 치료법과 죠스가 형의 배 밑으로 지나갔고 동생의 경우엔 배 밑에 들어가서 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장치를 걸어놓았는데 청자인 아이들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말이다. 
자기 자신의 경험적 맥락을 유보하고 새로운 이야기(정보)의 맥락 속으로 들어가야 독해가 될 것이고 양자 간 대화도 가능하다.
현장교사인 최은희 선생님이 쓴 『그림책을 읽자 어린이를 읽자』에 존 버닝햄의 <지각대장 존>을 1학년 아이들에게 읽어 준 경험이 소개된다. 늘 지각하던 존이 지각을 하지 않던 날, 항상 존을 야단치던 담임선생님은 털복숭이 고릴라에게 잡혀 천장에 붙들려 있고, 도와달라는 선생님을 무심히 쳐다보는 존이 “우리 동네에 털복숭이 따위는 살지 않아요”하며 지나간다. 그리고 이야기는 끝난다. 
그러자 1학년 아이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고 한다. 존이 멋지게 담임선생님에게 복수를 했다는 거다. 아이들은 자신이 통쾌하게 복수라도 한 냥 좋아했단다. 자신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이야기를 자신의 경험으로 가지고 들어온 결과다. 저학년 일지라도 제대로 독해가 됐다면 “어, 이번엔 존이 고릴라를 보지 못하네!” 이런 반응이 나와야했다. 자신을 혼내는 어른에 대한 반감을 내세우며 이야기를 보거나 들은 아이들은 주인공의 변화를 무시하고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해석해버리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학습에 큰 장애물이 된다. 학습을 하려면 이야기에 자신을 열어놓아야 한다. 새로운 정보를 접할 때 자신의 경험을 유보한다는 말이다. 지금 아이들은 반대다. 자신의 경험을 앞세워 이야기를 재해석하려고 한다. 자기 경험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정보는 수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낯선 경험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태도다. 학습이 될 리 없다. 잘못된 해석에 대해서 비판을 받으면 화를 내고 고집을 부린다. 한국의 현직 대통령을 닮았다.
박근혜 대통령의 어이없음과 정치적 부도덕성에 분노가 치밀지만 차분하게 생각하면 지금의 어린이청소년들이 근혜 스타일을 보인다는 것이 더 큰 공포다. 이 문제를 물고 늘어져야겠다. 서술이 처방(Description is Prescription)이라는 아포리즘에 기대어 일단 생생한 아이들과 접점을 기록한다.

201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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