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달나무 Dec 31. 2017

패터슨

짐 자무쉬 감독 2016년 작품

2016년 부산영화제에서 개봉 전에 먼저 선보인 짐 자무쉬 감독의 <패터슨>을 보고 왔다. 관람을 추천한다. 나는 상암cgv에서 봤다.
짐 자무쉬 이름 정도만 듣고 있었지 아무런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볼만한 영화를 뒤지다가 직감적으로 선택한 영화~
보고와서 인터넷에서 관련 정보를 찾아봤다.
영화를 보면서(또는 보고 나서) 느낀 점과 인터넷에서 알려주는 영화 정보의 괴리가 크다. 마치 좋아하는 영국 일러스트레이터 찰스 키핑의 그림책에 대한 내 관점과 인터넷 서평이 크게 차이나는 것과 같다.
아마도 거장 칭호의 짐 자무쉬 감독의 다음 진술에 크게 영향을 받은 탓으로 보인다.(일반적인 인터넷 평론들)
---------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세요. 
의미를 다 헤아릴 필요는 없어요. 
사실 저도 모르거든요.  

이건 그냥 평온한 이야기입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야기. 
인생이 항상 드라마틱한 건 아니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그저
이 영화의 순간순간
거기 있어주기를 바랍니다. 
(짐 자무쉬가 한 말이란다)
--------

그래서인지 영화평들은 "평범한 일상의 아름다움을 그렸다"투의 내용이더라.
나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세요"는 "어마무시한 장치를 삽입했으니 다 헤아리려다가는 다쳐요"처럼 들린다. 물론 맥거핀(의미 없는 관객 낚시용 영화적 장치)도 보인다.
사실 어떤 현상이나 사건에 대한 개인적 견해는 자신의 것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언론이나 오피년 리더들의 SNS 글이 재생산되면서 마치 내 생각인냥 착각하면서 스스로 재생산기지가 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인문학의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자기 생각이 사실은 남의 생각의 반영일 뿐이라는 걸 알기 위함이 인문학 공부의 목표가 아닐까 한다.
<페터슨>은 주인공의 영화 속 이름이면서도 또한 페터슨이 사는 지명이기도 한다. 뉴저지 주 페터슨 市에 페터슨(아담 드라이버)이 공영시내버스 운전사로 설정됐다. 주인공 이름과 영화 제목을 페터슨으로 정하고, 영화적 배경을 패터슨으로 한 것이 우연일까.
<패터슨>은 주인공 패터슨과 패터슨의 아내 로라(골쉬프테 파라하니), 부부가 키우는 애견 마빈(잉글리쉬 불독 種)을 중심으로 반복되는 일상을 지루하게 보여준다. 반복의 패턴 속에 매일 다른 사건이 개입한다.
패터슨은 시내버스 기사이면서 등단하지(출판하지) 않은 시인이다. 아내 로라는 그림과 요리에 자부심이 있으면서 기타를 새로 배워 컨트리가수가 되길 꿈꾸는 전업주부다. 그들은 자식으로 여기는 강아지 마빈을 키운다.
대사 없는 영화는 있어도 화면 없는 영화는 없을 것이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시각 정보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패터슨>은 등장인물과 시공간 배경의 기본 구조 속에 예술의 전 분야를 배치했다. 문학이 나오고, 미술이 나오고, 음악이 나오고, 영화가 나온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집 <PATERSON>

실제 패터슨에서 살았고 시집 <패터슨>을 발간한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를 주인공이 좋아하는 걸로 그린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는 풀리처상을 수상한 저명한 시인이면서 의사였다. 하지만 영화 속 패터슨의 시어는 엉성하다. 
아내 로라는 기타를 인터넷으로 구입하여 연습 첫날 남편에게 노래를 들려주는데 지판도 더듬거리고 음정도 정확하지 않다. 그러면서도 컨트리 스타 테일러 스위프트나 미란다 램버트를 거론하며 자신도 스타가 될 지 누가 알겠냐고 한다.
로라는 인테리어를 위해 벽에 페인트 도색을 하고, 직접 그림을 그린 커튼을 만들고, 자신의 옷에도 핸드프린팅을 하며 컵케잌을 멋지게 구워 주말마켓에 가지고 나가 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누가 봐도 열정적인 아마추어리즘에 불과하다.
부부는 주말에 영화관도 찾는다. 오래된 흑백 스릴러물을 보고 즐거워 한다. 단순한 대중 오락영화다. 남편 패터슨은 관람한 영화의 스모키 화장 짙은 여배우와 아내가 쌍둥이처럼 닮았다고 말한다.
총천연색 영화이지만 온통 흑백 디자인 천지다. 산책을 나간 패터슨과 마빈의 의지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향해서 기 싸움을 하다가 패터슨이 결국 마빈이 이끄는 방향으로 산책을 간다.
영화의 절정은 매일 조금씩 시 구절을 쓴 패터슨의 비밀노트를 마빈이 물어뜯어서 복원불능상태로 갈갈이 찢어놓은 사건이다. 로라가 노트를 복사해두라고 잔소리를 했지만 아직 복사를 해놓지도 않은 상황이다. 패터슨은 마빈이 밉다고 독백을 하고, 로라는 마빈을 주차장으로 내쫒고 집안에 못 들어오게 한다.
억지스럽게도 마지막에 패터슨과 우연히 만난 일본인 시인이 패터슨에게 빈 노트를 선물로 주면서 대사를 하나 친다.
"때론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

내 기억에 영화는 패터슨이 해군에서 근무했다는 증거 사진을 두 번 보여준다. 영화 속 각각 클립들, 대사들, 에피소드는 계획 없이 배치된 것이 아니다. 만약 그런 것들이 감독의 말대로 무계획의 계획이었다면 로또를 연속으로 5번은 당첨될 희소한 확률의 우연이 겹친 것이다. 현실에서 그런 일은 없다.
골치 아프게 일일이 확인하고 해석하는 것만이 좋은 관람 태도는 아닐 것이다. 다만 영화가 작가와 감독이 의도적으로 시청각 매체로 스토리텔링을 넘어 스토리두잉을 하는 것이기에 관객은 질문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관객의 실시간 질문을 통해 영화는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면 영화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질문 없는 관객만 있다면 영화는 아무런 역할이 없다. 작가나 감독이 무엇을 의도했든 관람 주체로서 '내'가 중요하다.
당연히 보는 내내 질문을 했다. 대답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질문한 것만으로 "우리의 영화"는 순조롭게 상연된다.
마지막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주인공은 애견 마빈이라는 깨달음이 올라왔다. 나는 그렇게 영화 <패터슨>의 관람 주체가 됐다.
다시 한번 관람을 추천한다.

패터슨 부부의 아들 마빈
매거진의 이전글 독해력의 핵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