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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달나무 Feb 17. 2018

우리는 걷는다

걷기가 왜 문제를 해결하는가

<나는 걷는다>3권이 출간되며 유명해진 베르나르 올리비에(올해 80세)는 걷기여행의 그루(스승) 칭호를 얻었습니다.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가난으로 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독학으로 바칼로레아에 합격한 후 30년 동안 유수한 신문과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습니다. 은퇴 후 4년에 걸쳐 이스탄불에서 시안까지 12,000Km를 걸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도보여행을 통해 비행 청소년을 교화하는 단체인 쇠이유(Sueil;'문턱'이라는 뜻)를 설립했습니다.

쇠이유는 벨기에 정부가 지원하는 오이코텐협회를 본 딴 민간단체입니다. 오이코텐은 범죄청소년들이 해외장기걷기를 통해 교화되도록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나는 걷는다> 출판으로 번 돈을 몽땅 쏟아 부어 쇠이유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두 명의 쇠이유 이사와 함께 공저 <문턱이라는 이름의 기적>(효형출판;2014)을 내놓았습니다.

<문턱이라는 이름의 기적>을 읽어봐도 걷기가 왜 비행 청소년을 구원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저 효과가 있다는 것, 쇠이유가 실행한 구체적 방법, 너무 많은 돈이 들어 힘들다는 토로만 있습니다.

걷기가 왜 좋은 프로그램인지 제가 밝히려고 합니다. 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진안 고원길 정도만 아이들과 짧게는 3일, 길게는 일주일을 걸은 게 다 이지만, 나는 왜 걷기가 아이들을 변화시키는지 고민해왔습니다. 벨기에 오이스텐협회나 쇠이유가 비행 청소년과 함께 걷는 프로그램을 실시하지만, 걷기는 모든 어린이청소년의 변화를 이끈다고 확신합니다. 어른의 경우와 어린이청소년의 걷기는 결이 다릅니다. 걷기의 작동 메카니즘도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걷기는 곧 시간의 흐름입니다. 적어도 걷기에서 시간의 흐름은 왜곡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의 막바지 단계에서 나타난 신자유주의는 사람들에게서 '시간'을 빼앗았습니다. 45년 전에 발표한 미하엘 엔데의 <모모>가 정확하게 예견한 것입니다.

우주에서 시간은 물질과 한 몸입니다. 시간의 존재로 인해 물질은 변화합니다. 나서 자라고 쇠퇴하고 죽습니다. 예외 없습니다. 시간은 변화의 추상성을 물리적으로 보여줍니다. 따라서 "비포"와 "애프터"가 존재합니다.

상품판매자의 입장에서 시간의 흐름을 무시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낡아서 새 물건이 필요하다거나 고장 나서 새 제품을 구입해야 한다면 매출액 증가에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소비자가 "기다리는 상황"은 상품판매에 불리합니다.

원인과 결과의 과정을 따져보는 것도 상품판매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생각하는 소비자는 반갑지 않습니다. 오직 소유하고 싶은 욕망으로 충실한 인간만 매출상승에 기여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세상이 동시성으로 가득 찬 것으로 세뇌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작이 존재하고, 시간이 흐르고, 따라서 기다려야 하고,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시 처음부터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여야 하고, 결국 결과를 도출하고, 궁극적으로 소멸하는 세계를 인정하는 것은 상품판매자가 싫어하는 ‘진리’입니다.

시장에 권력이 넘어갔다는 건 세상이 회색신사들(미하엘 엔데의 모모에 등장하는 자본의 은유)의 거짓선전에 속아 시간을 빼앗겼다는 말입니다. 회색신사는 사람들의 시간을 갈취해야만 목숨을 이어가는 존재입니다.

시간을 빼앗긴 사람들은 자신의 시간이 저축돼있다고 착각하면서 부족한 시간 때문에 전전긍긍합니다. 결국 과정을 무시하고 모든 결과가 자신이 마음먹은 타이밍에 도출되기를 바랍니다. 시작과 끝이 동시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불가능한 설정이 세련되고 현대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됩니다.

시간이 증발된 상황에서는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변화가 없다고 착각합니다. 지금 눈앞의 상태가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믿습니다. 지식의 영원성을 신봉합니다.

시간의 흐름과 변화를 부정하는 분위기가 학교에서는 평가시험으로 구현됩니다. 모든 과정은 시험 당일 시험지로만 수렴됩니다. 시험지에 답을 기입하는 순간만 남고 모든 과정은 소거됩니다. 오로지 정답만 많이 기입하면 메리트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동원 가능한 모든 수단이 정당화됩니다. 내일을 위한 오늘의 애씀은 어리석고 진부한 일이 됐습니다. (내일 시험을 위해 오늘 문제집 풀기는 다음을 위한 애씀이 아닙니다. 문제집 풀기가 곧 무시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공부가 문제풀기에 갇히는 한 과정은 소거된 것입니다)

걷기는 다릅니다. 한 걸음 내딛기 없이 다음 걸음이 불가능합니다. 시간의 순서가 소거되면 걸을 수 없습니다. 백 걸음이 백 걸음만큼 거리를 만들고, 천 걸음이 천 걸음만큼의 거리를 창조합니다.

한 번에 압축적으로 걸을 수도 없습니다. 시간을 소비하지 않고 걸을 수 없습니다. 걸은 만큼 시간이 흘렀음을 인지합니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변화가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시간이 흘렀는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우주 법칙의 위반입니다.

“시간이 흘렀다”와 “변화가 일어났다”는 상호 간 필요충분조건입니다. 현실적으로 변화의 감지로만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있습니다. 시간은 시계 속에서 흐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청소년의 오래 걷기는 모모를 만나는 일입니다. 회색인간에게 시간을 뺐기는 일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회색인간과 싸울 수 있는 힘과 의지를 기르는 일입니다. 어른은 혼자 걸을 수 있지만 어린이청소년은 혼자 걸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걷기 파트너가 있어야 걸을 수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지 않으면 걸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은 변화로만 알 수 있는데, 변화를 알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닌 타자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파트너와 함께 오래 걷기는 아이들의 변화를 이끕니다.

그리고 변화하면 문제는 해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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