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준규 Feb 27. 2018

규슈 여행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난 설날 다음날 처가 식구들과 2박 3일 규슈 여행을 다녀왔다. 1년 전부터 계획하고 매월 여행비를 조금씩 적립한 계획이다. 일본어에 능숙한 우리 집 아들이 가이드를 하기로 하고 6남매 부부들만 다녀왔다. 여행 중 몇 가지 의미 있는 기억이 있어서 남긴다.


#1 [규슈 박물관]

규슈박물관


일본의 국립박물관 중 교토박물관에 두 번, 나라 박물관에 한 번 방문한 적이 있다. 일본 국립박물관에는 한반도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콘텐츠가 상당히 많아서 우리 박물관과 연계해서 관람해야 하는 필수코스다. 
국립 규슈 박물관은 교토박물관이나 나라 박물관보다 현대식 건물인데 전시물의 규모나 기획, 어린이 역사교육 프로그램이 알차고 활발해 보였다. 막상 도착해보니 칠지도 실물을 바로 전날까지 특별 전시하고 있었다. 아쉬운 대목이다. 한국에 있는 여러 곳의 칠지도는 모두 복제품이다. 칠지도를 둘러싼 한일 역사학계의 엇갈린 주장은 한반도와 일본 고대사에서 핵심적 쟁점이다. 규슈 박물관에 광개토왕('대왕'이나 '태왕'의 표현은 없었다) 비석 앞뒤 탁본이 벽면 가득 괘도처럼 걸려있는 까닭도 일본 열도의 문화가 한반도에서 유입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독자적 일본 문화를 한반도로 전래한 것이라는 주장을 위한 것이다. 
일본이 칠지도를 50년 대에 국보로 지정한 것도 한반도 남부를 실제로 통치했으며 백제와 역학관계에서 조공받은 물품이라는 주장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부여에서 조선총독부 발굴단에 의해 칠지도와 유사한 유물이 발굴됐다는 기록은 있으나 실물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 유물이 일본의 어딘가에 숨어있거나 고의로 폐기됐을 가능성을 생각한다. 칠지도를 처음 보면 누구나 "왜 칠지도일까. 육지도가 맞지 않나" 생각한다. 일본에서도 육차모(六叉鉾)라고 불리던 것을 19세기 말에 "七支刀" 명문이 금상감으로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일본서기>에 나오는 "七枝刀"의 실존을 증명하는 명백한 유물이라고 1953년에 국보로 지정한다. 고대 한반도 식민지를 증명하는 사료로 사용하는 것이다.
광개토태왕비가 압록강 지류의 냇가에 뉘어져 버려진 상태에 있던 것을 '발견'하고 학계에 데뷔시킨 인물이 19세기 말 일본 육군 중위 사카와였다. 당시 사카와 중위가 비석을 쪼아서 글씨를 일부 조작했다는 얘기를 한국에서는 계속 주장하고 있다. 물론 주장하는 이들은 대부분 재야사학자이기에 주목받지 못하고 있긴 하다.
일본의 재야 고고학자 후지무라 신이치의 희대의 구석기 유물 조작 사건에서 보듯이 '스토리텔링으로서 역사'를 창작하기 위한 증거 만들기는 세계 어느 나라를 망라하고 자행했던 일이다. 창작이라 말함은 조작과 구분하기 위해서다. 원본이 명확해야 조작도 성립하지만 원본이 없다면 창작만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한국이 일본보다, 일본이 한국보다 역사가 깊고 어느 일방향으로 문명을 전달했다는 창작품으로서 역사에 관심이 없다. 탈역사성이 화두가 된 시대에 하드웨어로 박물관의 존재를 어찌 볼 것인가-몇 군데 정치지향성의 한국과 일본 박물관을 보고 든 생각이다.


#2 [조몬토기]


일본 국립박물관 전시 초입에 꼭 보이는 것이 조몬시대(신석기시대) 토기들이다. (아래 두 번째 사진) 4500년 전 유물이라고 자랑한다. 공룡의 다리뼈 하나로 전체 몸뚱이를 복원하듯이 토기의 일부분을 꿰맞추고 손질을 해서 방금 만든 것처럼 상태가 양호하다. 조형미도 뛰어나다. 어쩜 이리도 유려하고 섬세하며 세밀하게 디자인했을까 감탄하게 된다. 교토박물관에서 본 조몬토기는 사람 어른만 한 크기도 있었다.
일본에서 발견된 공예품 성격의 토기와 토우가 3~4천 년 전 것이라면 한반도의 3~4천 년 전은 어땠을까. 현세 인류와 관련이 없다지만 한반도에 구석기 문화가 분명히 존재했고 중석기, 신석기, 청동기로 이어지는 중단 없는 인류의 삶이 과연 추레한 무문토기와 빗살무늬토기 수준이었을까. 한반도와 만주, 연해주, 요서지역에 걸친 고조선이 마치 전설 속에 있었던 신기루처럼 취급된다. 한반도 남쪽에 있었다는 삼한 이전의 '진'을 증명할 별다른 유적 유물이 없기 때문에 역사에서 배제돼있다. 
코리아의 조상이 훌륭하다는 발상이 아니라 수천 년 전의 과거를 들여다볼 때 현재 지도에 그어놓은 국경선은 자유로운 사고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 조상 너네 조상 식으로 과거 인류의 삶을 토막질한다면 역사시대든 역사 이전 시대든 팩트 없는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될 뿐이다. 수천 년 전 조상들은 적어도 우리가 만들어 놓은 "민족"의 개념은 없었을 것이다.

조몬토기 약 5천년 전


#3 [안악 3호분 벽화]


황해도 안악군에 있는 고구려 고분인 안악 3호분은 4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안악 3호분은 벽화로 유명한데, 교과서에도 나오는 익숙한 벽화가 규슈 박물관에 걸려있었다. 사진 프린팅으로 제작한 것인데 보자마자 충격적이었다. 
1949년 발굴한 안악 3호분의 발굴 주체가 북한 이어서일까. 아래 사진(인터넷 사진)처럼 흐릿한 사진만을 접해왔다. 1700년 전 무덤 속 벽화라서 퇴색과 변색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규슈 박물관의 안악 3호분 벽화 프린팅을 보기 전에는. 걸려있는 벽화를 사진에 담으려고 했지만 규슈 박물관 직원이 찍지 못하게 제지했다.
벽화 프린팅은 마치 방금 전 붓질을 한 그림으로 보였다. 특히 붉은색의 채도는 매우 높았다. 선명함이 벽화가 아닌 캔버스에 그린 현대작품 같았다. 1700년의 차이를 단번에 소거한 느낌이다. 스케치 수준을 오늘날 작품과 비교해서 양적 평가를 할 수 없다. '잘 그렸다, 못 그렸다'의 생각이 지극히 자기중심적 사고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의 공기를 마시면서 21세기 중심적으로 회화를 바라본다면 제대로 감상하지 못하는 것이다.
안악 3호분 벽화를 통해서 우리가 조상보다 문명의 진보를 이루었다는 것은 엄청난 오해라는 걸 확인했다. 나아가 시간이 과거로부터 흘러와 현재를 통과하여 미래로 진행한다는 개념도 잘못된 것이다. 시간은 한 줄 흐름이 아니라 다양한 층위에서 동시에 흐른다. 마치 1층 시간과 2층 시간, 3층 시간이 중첩해서 하나의 건물을 이루고 있는 것과 같다. 1700년을 단박에 압축해서 순식간에 4세기 중반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예술품이라는 매체이다.

안악3호분 벽화


#4 [안다는 것]


안다는 것이 무엇일까. 여행 마지막 날 22일 후쿠오카 하카다역에서 신칸센을 타고 35분을 달리니 구마모토에 닿았다. 전차로 세 정거장을 지나니 구마모토성이 나온다. 웅장한 규모의 대단한 건축물이다. 많은 관광객이 모이는 곳이다. 엔저 현상으로 여기저기 한국인 관광객이 흔하다. 
일본인들은 구마모토 지명을 쓸 때 꼭 한자로 熊本으로 나타낸다. '熊'은 곰을 말하는 것이니 곰 →고마 →구마로 변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갑자기 어느 한국 관광객이 熊本城 간판을 "능본성"이라고 읽는 소리가 들렸다. 熊과 能을 구분하지 못한 경우일 것이다. 하마터면 '능본성'이 아니라 '웅본성'으로 읽어야 된다고 훈수를 둘 뻔했다. 
내 쓸데없이 넓은 오지랖을 여미며 훈수를 멈출 수 있었던 것은 불현듯 "웅본성이라고 읽든 능본성으로 읽든 어떤 차이가 있나. 熊을 能으로 착각하지 않고 熊은 '웅'으로 能은 '능'으로 읽는 것을 의미 있는 지식이라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熊本城을 능본성으로 읽은 초로의 한국 아저씨의 머리에 '웅본성'이 아닌 '능본성'이 남는 것이 아니다. 100년 전 내전에서 불탄 구마모토성의 목조건축물을 20년 전에 복원해서 웅장하게 내 눈 앞에 있는 구조물과 '능본성'이 1대 1 대응한 것은 '웅본성'과 구마모토성이 1대 1 대응한 것과 다르지 않다. 
한자에 대해 착각하거나 무지한 예는 수없이 많다. 한자를 사전의 음과 훈으로 읽는 것은 지식이 아니다. 단지 글자를 읽는다는 것이 무엇을 생산할 수 있겠는가. 이번 여행에서도 재밌는 예가 있었다.
22일 규동 집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메뉴판에 '鍋'가 여기저기 있었다. 아들에게 '鍋'자를 알고 있냐고 물었더니 냄비라는 뜻이고 '나베'라고 읽는다고 했다. "아니, '鍋'자를 한국어로 뭐라 읽느냐고?" 아들은 모르겠다고 했다. 나도 자신이 없었다. '蝸'를 '와'라고 읽으니 형성 문자로 보면 '鍋'도 '와'라고 발음하지 않을까 짐작했을 뿐이다. 나중에 찾아보니 "노구솥 과"였다. '鍋'자가 들어간 메뉴는 전골냄비를 쓰는 국물요리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鍋'의 음과 훈을 모른다고 '알지 못하는 상태'로 평가할 수 없다.
또 있다. 규슈 박물관에서 조몬토기를 구경할 때였다. 유물의 설명 팻말에 '繩文時代'라고 쓰여있다. '繩'자를 모르고 있었다. 조몬시대 토기는 빗살무늬토기라고도 부르니까 '繩文'을 '櫛文'로 짐작했다. 내 짐작은 틀리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즐문'을 일본 발음으로 '조몬'이라고 읽는다고 확신하면서 '繩文'을 '즐문'으로 읽는 것이 내 지식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繩'은 '줄 승'자다. '櫛'은 '빗 즐'자다. 옥편과 달리 내 신념에 의한 그릇된 지식은 '틀린 것'인가.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을 구별하는 기준이 사전에 있지 않다.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을 가르는 기준은 행위의 유무에 있다. 행위를 함으로써 안다는 형성 된다. 하지 않음으로 모르는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뇌 속에 어떤 데이터가 자리하고 있는 것인가는 기준이 될 수 없다.
학교가 모르는 아이를 아는 상태로 바꾸는 일을 하는 곳이라면 학교가 할 일은 가만히 있는 아이를 acting 세계로 들여보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가만있지 않는 아이'가 교육과정의 목표인 것이다.

구마모토 성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는 걷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