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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규 Dec 10. 2017

교육과정에 대한 단상

비 오는 날 장떡 부쳐 먹기

  아마 2004년도 일 거다. 영등포 하자센터에서 심포지엄인지 포럼인지 열린다고 해서 근무 조퇴를 하고 달려갔다. 그땐 학교 교사였고, 대안교육에 대해 관심은 있지만 정보가 없어서 목말라하던 때다. 주제가 대안교육의 미래 정도였을 것이다. 기억에만 있고 기록이 없는 일이라 세부적인 내용은 좀 흐릿하다.
흐릿한 중에 또렷한 것이 있는데, 성공회대 고병헌 교수가 마이크를 잡았다. 
  “어떤 대안학교에 방문한 날 비가 왔습니다. 선생님과 학생들은 대청마루에서 마당에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었구요. 선생님이 먼저 말씀을 하셨습니다. ‘얘들아 비도 오는데 장떡 부쳐 먹자’..... 이건 아니라고 봅니다.”
  대안학교에 대한 충격적인 첫인상이었다. 학교 밖에서 공부할 게 얼마나 많고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을 텐데.... 오해일 수 있겠지만 교육과정이 변변치 않은 대안학교의 모습이 무기력한 루저들의 이미지로 들어왔다. Alternative School을 한국에 소개하면서 대안학교 작명을 한 장본인이라고 소개한 고 교수는 대안학교에 대한 애정이 대단하다고 봤다. 그가 한국에서 대안학교가 더욱 확산되고 발전하려면 지금 같은 주먹구구 교육과정 운영은 지양해야 한다는 취지로 얘기한 것이라 기억한다. 
  2006년까지만 학교 교사를 하고 2007년부터 직업 없이 오피스텔에서 공부도 하고 상담도 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때 민들레 49호부터 정기구독을 했는데 50~54호까지 대안학교 교육과정에 대한 양 진영의 논쟁적 글이 연속해서 실렸다. 꽃피는학교의 김희동 교장과 간디학교 양희규 교장의 논쟁으로 시작하여 당시 유학생인 이병곤 선생과 고양자유학교 이철국 교장이 가세하여 이야기는 풍성해졌다. 바로 패턴을 가진 교육과정과 학교규칙의 명문화를 둘러싼 공방이었다.
  나는 지식교육을 강조한 이병곤 선생의 글에 마음이 기울었다. 제도 학교가 제대로 된 지식교육, 특히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리터러시)에 대한 공부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절름발이 신세가 된 것이라 믿었고 좋은 대안학교는 인문학을 위한 기초 훈련부터 포스트모더니즘과 구조주의에 대한 철학적 담론까지 다루고 이를 위해 깊은 독서와 글쓰기를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발도르프 연수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이왕이면 외국어 교육도 2가지 이상해야 한다고 봤다.
  “제대로” 된 대안학교를 꿈꾸면서 밑그림을 그릴 때 주춧돌은 교육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기둥도 교육과정이고 서까래도 교육과정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교육과정을 완벽하게 짠다면 학교 운영이 수월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교육과정을 잘 짜기 위해서 공감하고 미래지향적인 교육철학이 있어야 하겠고, 올바른 철학을 위해 공부가 필요하다고 봤다. 철학 공부의 주체는 교사다. 학교에서 학생들과 생활할 교사들이 부지런히 연찬하여 내공을 높이고, 그를 토대로 치열한 토론을 거쳐 교육과정을 워드프로세서든 파워포인트든 엑셀이든 작성하여 책자를 만들어 대내외적으로 배포하고 늘 참고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교육과정의 압축된 중핵이 주간시간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 단위 교육과정을 한 장의 종이에 인쇄해서 걸어놓는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고 나중에 학교를 운영하면서 실제로 주간 시간표를 복도에 걸었다. 어쨌든 비 온다고 장떡 부쳐 먹는 일은 대안학교로서 저질러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그 후로도 오래 동안 믿었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재수(再修) 없이 대학에 들어갔고 졸업 후 교사로 30년 가까이 살았으니 내 삶의 대부분이 학교에 묶여있다. 어느 날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분명 잘못됐다. 어디서부터 꼬인 거지?”
  한눈팔지 않고(때론 술을 과하게 마시긴 했지만) 땀 흘려 뛰어왔는데 더욱더 성실했어야 했나? 도대체 어찌해야 실패하지 않는 옳은 길을 갈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더 노력해야 하는 덕목은 무엇일까?
  상당한 시간과 공력을 흘려보내고 나름 깨달았다. 나름이라 토를 단 것은 오늘의 깨달음이 내일 새로운 깨달음으로 지워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깨달음의 중심은 적지 않은 세월 동안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왔다는 자신감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즉 교육과정을 중심으로 교육철학을 점검하고 부단한 연찬에 게으르지 않으며 교육 콘텐츠의 정리 작업을 진행하면서 학생이 없었다. 학생을 잊었다는 것이 아니라 마틴 부버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너의 근원어가 아닌 ‘그것’으로 학생을 설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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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시 부버의 『나와 너』에 밑줄을 치고 가겠다. 부버는 강한 크리스천 색깔로 한계를 보이지만 내게 참으로 큰 영감을 준 철학자다.  

  *'그것'화(化)한 인간이라는 것은 이를 향하여 우리가 '너'여! 하고 근원어를 건네는 산 인간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 하겠다. 꾸며 만든 것은 아무리 그것이 고상할지라도 결국은 물신숭배에 지나지 않는다. (p. 29)

  *그것은 하나의 현실적인 사실이다. (중략) 사랑은 '나'의 안에 있는 것이 아니요, '나'와 '너'의 '사이'에 있는 것이다. (p. 30)

  *진실로 '나'는 '나에게-작용하는-너'와 '너에게-작용하는-나'라는 중대한 근원어로부터만 출현한다. (p.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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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을 ‘너’의 자리가 아닌 ‘그것’의 자리에 놓아서는 “현실적인 사실”일 수 있으나 ‘나’와는 다른 세계에 놓이며 ‘나’는 ‘그것’에 다가가려고도 안 하고 다가갈 수도 없는 것이다. 즉 ‘그것’인 학생은 교사인 ‘나’와 아무런 상관없는 존재이며 마치 먼 산에 자라는 한 그루 나무일뿐이다. 그 나무를 만나러 내가 산에 갈 리도 없고 갈 수도 없는 것이다. 그저 먼 산의 나무일 뿐이지 ‘그 나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무든 학생이든 ‘그것’이 아닌 ‘너’의 자리에 놓인다면 그건 곧 ‘나’이기도 하다. ‘나’가 된 학생을, ‘너’가 된 선생인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저명한 서양의 철학자를 들먹이지 않아도 이미 그래야만 했다. 이런 깨달음은 공부나 독서와 관계없이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부버의 문장을 패러디해서 말하자면, 교육과정은 교사 안에 있는 것이 아니요, ‘선생’과 ‘학생’의 ‘사이’에 있는 것이다. ‘사이’가 핵심이기 때문에 선생이 학생일 수도 학생이 선생일 수도 있다는 전도의 허용이 가능한 것이지 역할을 바꾸라는 말이 아닐 것이다. ‘사이’의 존재가 가능하려면, 세상의 근원어가 ‘나-너’ 짝말인 것처럼, 선생-학생 세트를 주체로 설정하는 파격이 필요하다. 이건 ‘선생과 학생’ 표현과 다른 것이다. 
  따라서 교육과정을 선생이 열심히 노력해서 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열심히 만들어도 먼 산의 이름도 없고 위치 특정도 없는 나무에 불과하다. ‘나’와는 상관없는, 즉 ‘선생’이나 ‘선생질’과 아무 관계가 없다. 더욱 생각을 집중해야 하는 것은 교육과정을 ‘학생’과 함께 짠다는 말이 아니다. 주체가 ‘선생’과 ‘학생’ 듀오가 아니다. ‘선생-학생’이라는 솔로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선생-학생’이 교육과정을 짜는 것이 아니다. 결국 교육과정은 짜는 것이 아니다. 선생과 학생 사이에 교육과정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만들어가는 교육과정’을 언급할 수 있다. 그러니까 ‘선생-학생’ 주체는 선생도 학생도 없는 것이다. ‘선생-학생’ 주체 가 곧 ‘사이’에 대한 표현일 뿐이다.
  설마 ‘선생-학생’ 주체가 ‘사이’에 대한 표현이라고 해서 선생과 학생의 물리적 거리를 말하겠는가. ‘사이’란 선생의 삶과 학생의 삶의 만남이다. 만남은 실체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만남 이전과 조우의 순간과 이후 헤어짐을 포함하는 시퀀스를 말한다. 우리는 만남의 순간 ‘나-너’ 관계에 놓인다. 만나기 전이야 ‘나-그것’ 관계였고 아무런 상관이 아니었고, 헤어짐은 ‘나-너’의 관계의 해제를 말하는 것이다.
  교육과정이란 것이 있다면(필요하다면) 만나는 순간의 연속을 의미할 것이다. ‘나-그것’이었던 세상을 ‘나-너’로 바꾸는 찰나 속에만 가르침이 있으며, 찰나의 순간은 미리 위치와 시각을 예정할 수 없다. 예정 가능성이 곧 ‘나-그것’의 관계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교육과정이 필요하고 교육과정을 개념화하고 내용을 채우려면 사후에만 가능할 뿐이다. 순간순간의 짧은 불꽃이 튀고 사라진 불꽃의 기억만을 모은 추억의 기록이 교육과정으로 이름 지어질 수 있다.
  선생이 전인(全人)일 수 없고, 학생도 결국 전인이 될 수 없다. 전인이 바로 ‘사이’를 뜻한다. 결국 인간, 사람과 사람의 사이를 말하는 것이다. 선생의 삶과 학생의 삶이 만나서 함께 전인을 구성한다. ‘나’든 ‘너’든 독단적으로 전인의 이름표를 달 수 없다. ‘너’가 없는 ‘나’가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학생을 만나지 않고, 즉 학생을 만나는 순간을 맞이하기 전에 미리 교육내용을 설정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다. 단지 매일 내 삶이 너의 삶을 만날 뿐이다. 그밖에 아무것도 없다. 비 오면 장떡 부쳐 먹는 일 말고 무엇을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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