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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규 Dec 13. 2017

새로운 실험이 필요하다

교실은 실패할 줄 알면서 계속 반복하는 장소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거쳐 결론을 도출한 후 새로운 가설을 구성하는 일련의 과정은-언제나는 아니지만-유효하다.
  무중력에서 강낭콩은 지구중력장에서 싹이 나는 것과 어떻게 다른 모습일지 상상할 수 있다. 실험은 쉽지 않다. 우주로 날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지상에서 항구적 무중력 공간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주에 로켓을 보낼 수 없을 때에는 강낭콩의 무중력 상태 발아에 대한 상상도 불가능하다. 우주 체험이 현실화되면서 무중력 발아에 대한 가설을 세우고 실제 실험도 진행한다. 
  아이들의 성장을 둘러싼 교육담론도 마찬가지다. 1957년 스푸트니크 발사 이전에는 우주 공간은 담론의 세계 밖이었던 것처럼 교육에 관해 우리의 상상 조차 허용하지 않는 미지의 공간이 있다. 바로 역량 함양을 고려하지 않는 공간이다. 경쟁력을 성장 담론에서 제거한 공간이다. 그것은 성장을 양적 개념으로 보지 않는 전혀 새로운 담론의 세계다. 
  함양은 쌓거나 축적한다는 것이며 역량을 양적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질적개념으로 치환하면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플러스)" 벡터를 갖지 않는다. 질적인 존재는 변하는 것이지 쌓이지 않는다. 푸른 풋사과가 붉은 사과로 익는 것이지 사과 한 개가 두 개가 되는 "달라짐"이 아닌 것이다. 우주 공간에서 위 아래 구분이 불가능한 것처럼 "+"와 "-" 벡터성을 구분하지 않는 개념이다. 붉은 사과가 푸르게 변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며 유효한 변화로 받아들인다.
  교육을 조금이라도 고민하고 마주하는 이는 교육적 성장이 시험성적을 올리는 것이라는 설명을 단호히 거절한다. 하지만 그런 단호함도 현실에서 항상 견지되지 못한다. 시험 성적의 목표가 0점인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영어단어를 가능한 깡그리 잊어버리는 일을 교육의 이름으로 말할 수 있는가. 자기 의견를 말할 때 버벅거리고 어눌하게 말하는 것을 충분한 성취라고 할 수 있는가. 진보적인 고민을 하는 교육학자나 교사들은 "없는 것"에서 "있는 것"으로, "빈 상태"에서 "채워진 상태"로 진행하는 "홈 파인 공간"을 벗어나지 못한다. 늘 일방향으로 작용하는 중력장에 갇힌 것과 같다.

  우주 무중력 상태에서 강낭콩을 발아시키는 것은 강낭콩의 굴지성이 작용될 수 없는 환경에 있을 때 강낭콩의 성장을 관찰하는 것이다. 지상에서와 다른 우주선 안 일조량과 태양 폭풍으로 인한 우주 방사능 노출 따위가 부수적인 변량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주요 변수는 중력이다. 언제나 중력과 반대 방향으로 싹을 밀어올리던 강낭콩이 중력이 사라졌을 때 과연 싹의 방향에 패턴이 존재할까, 아니면 랜덤으로 사방팔방으로 떡잎이 나올 것인가. 
  나도 새로운 실험을 하고 싶은 거다. 내가 하고 싶은 실험은 성장을 변화의 질적개념으로 보고 '퇴행' 이 소거된 세계에서 아이들과 만나는 일이다. 어떤 방향으로 떡잎이 나오더라도 성장으로 인정해주고, 아이들은 탈락의 우려가 제거된, 즉 경쟁 프레임에서 자유로운 공간에 있을 때 지식과 정보를 어떻게 유통하는지 관찰하고 싶다. 
  물론 가설은 있다. 가설 설정의 동기는 간단하다. 지상에서 할 수 있는 실험은 다 했다고 본다. 다양한 방법으로 시험공부를 시켜봤다. 체벌을 하기도 최대한 친절과 서비스를 제공해보기도 했다. 공교육 교실에서 아주 과감한 프로젝트를 해보기도 했도 학교 밖에서 더 과감한 프로젝트를 해봤다. 아들 딸이 성인이 됐고, 초중고 아이들과 함께 먹고 자면서 관찰했다. 어떤 가설도 실험 결과와 일치하지 않았다. 이제 남은 곳은 무중력 우주 밖에 없다. 아이들을 '홈 파인 공간'에서 '매끈한 공간'으로 옮기고, 아이들의 모든 성장 벡터를 인정해주는 시공간으로 설정하면 지금과 같은 이기적 모습에서 벗어날 것이란 가설을 세웠다. 이 실험의 결과는 두 가지 중 하나다.   하나는 드디어 숨어 있던 답을 찾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모든 교육은 케바케로서 패턴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일 것이다. 후자의 결론이라면 ‘교육’이란 근대어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죽는 말(言)이 될 것이다. 일단은 마지막 남은 답을 찾을 것이란 확신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미 제한적인 조건에서 무중력 실험을 했고, 가설에 걸맞은 결과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험을 진행하는데 결정적인 걸림돌이 있다. 실험 환경과 실험 내용에 학부모가 동의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교육비를 학부모가 지불하는 조건에서 동의를 구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교육의 수혜자 부담이 없어야 하고 흔쾌히 학부모가 동의하도록 설득해야 한다.
  깊은 종교적 신심에 대해서 충분히 존중하지만 기도만으로 악성종양을 앓는 아이를 살릴 수 있다는 부모의 고집을 인정할 수 없다. 항구적인 중력장에서 벗어나 무중력을 경험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능력주의(메리토크라시)나 경쟁이 좋은 성장 조건이라는 담론을 고집하면 안 된다. ‘핵심역량강화’나 ‘경쟁력 제고’의 발상은 철저히 어른 교육자(권력자) 입장의 서술이다. 역량이나 경쟁력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아이들에게 웰빙의 조건은 역량 함양이나 경쟁력 강화라고 아무리 설득해도 공염불에 불과하다.
  교육비 해결과 학부모의 동의를 무엇으로 해결할 것인가. 함께 고민할 동지가 필요하다. 

어머, 이건 꼭 실현해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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