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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규 Jan 28. 2018

두 번의 눈물

40년 동안 두 번 울었던 이유에 대한 회상

내가 교사 정체성을 과시하려고 할 때, 중2 때부터 과외선생을 시작해서 40년 동안 선생 노릇을 했다고 말한다. 
40년 세월 동안 아이들 부모 앞에서 눈물을 글썽인 적이 두 번 있다.
88년에 발령(성북구 장위동 소재)을 받고, 담임을 갑자기 그만둔 선생님 대신 서울올림픽 직전 6학년 담임을 했다. 아이들은 50명 넘었고 분위기는 엉망이었다. 엄석대도 있고, '저 하늘의 슬픔이'도 있고, '삼룡이'도 있다. 응팔에 나오는 덕선이나 선우, 보라, 정환이 캐릭터는 찾을 수 없었다. 때리고 울고 보복하고 물건 없어지고 기물 파손하고.... 수라도의 초등 버전이라 할 수 있다. 25살 초임교사로서 감당하기 힘겨웠다.
더 힘든 것은 교장과 교사 분위기였다. 당시 교실 스피커 내부에 마이크가 달려있었다. 그래서 쌍방향 인터폰이다. 교무실에서 개별 교실 스위치를 올리면 교실 상황이 들린다. "박 선생님, 교무실에 전화 왔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네~"하고 대답할 수 있다. 
교장은 종종 교무실에서 교실 상황을 엿들었다. 공공연하게 봉투를 요구하고 선생들은 그런 요구에 응했다. 주임교사가 되거나 선호 학년에 배정되려면 돈봉투 없이 불가능했다. 부모가 6학년 주임을 통해 돈을 찔러 넣어야 운동회 하이라이트 차전놀이에서 우두머리 장수가 될 수 있다. 급식 영양사(당시에 대부분 도시락 점심인데 그 학교는 급식 특별지정학교였다)는 당시 돈으로 매월 100만 원씩 교장에게 상납했다.(직접 증언을 들었다. 매우 충격을 받았다. 내 월급이 30만 원....) 수영장을 가도 스케이트장을 가도 두당 300원을 리베이트로 받았다. 담임선생 퇴근 후 고기 한 근 사가지고 집에 들어가란다. 스카우트는 더욱 한심한 상황이고 젊은 남자 교사는 육성회 간부 엄마들을 위해 카바레에 동원되던 시절이다.

 60대의 1학년 선생님은 다음 해 5학년 담임을 맡아서 눈물 바람이 됐다. 자기는 도저히 고학년 수업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좀 도와드렸는데 방정식 계산이 불가능하고 해캄을 머리카락이라고 우겨서 실소를 자아내는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부모들에게 금전이나 각종 생필품을 요구했다. 
한마디로 첫 발령받은 교사에게, 나름 정의감에 불타서 공장에 안 가고 학교를 선택한 내게 학교 현장은 미쳐 돌아가는 아수라장이었다.
89년 2월에 아이들 졸업식장에서 학부모로 꽉 찬 교실에서 마지막 인사말을 하다가 눈물을 왈칵 쏟았다. 아마도 처음 맡은 아이들을 떠나보내는 회한으로 눈물 흘린 줄 알았겠지만, 전혀 아니다. 당시 학부모가 지금은 6~70대 나이다. 이들이 한국전쟁 이후 베이비부머이자 산업화 시대 "역군"들이다. 자신을 기만하는 군부파쇼정권의 속임수에 넘어가고, 언론 개새끼들에게 농락당하고, 역사적 모순을 자기 자식에게 고스란히 넘겨주는 "못난 부모"에 대한 연민 때문에 흘린 눈물이었다. 모순을 그대로 넘겨주는 통로로서 학교에 대한 분노의 눈물이었다. 눈물은 눈물을 부르고 감정은 더욱 격앙되어 민망하게도 엉엉 우는 수준이 되었다. 이것이 첫 번째 부모 앞 눈물이다.

어린이락밴드공연(2016.01)


두 번 째는 2년 전 내가 데리고 있는 10명 아이들의 수료식이자 학습발표회 자리에서 보인 눈물이다. 
학습발표회는 공연 형식이었는데, 약속한 시작 시간이 돼서 사회자로서 마이크를 잡았다. 아이들이 무대에 오르는데 준비하느라 시간이 걸려서 그 시간을 때우느라 아무 얘기나 끄집어냈다. 10 가정 중 아직 도착하지 않은 가족이 있는지 체크하고, 하필 가장 추운 날(서울 아침 기온 영하 18도)이라 날씨로 덕담을 던졌다. 추운 날씨 언급이 내 어릴 때 동네마다 있었던 스케이트장 얘기로 넘어갔다.
"예전에는 동네마다 스케이트장이 있었잖아요. 이제는 덜 추워서 모두 사라졌지요. 저도 겨울이면 우리 동네(금호동) 하천변 스케이트장에서 살았어요. 스케이트를 사달라고 졸랐는데 엄마가 돈이 없으니 청계천 만물상에 가서 2000원 주고 중고 스케이트를 사줬지요. 흔히 '롱'이라고 부르는 스피드 스케이트였는데 이놈의 스케이트 날이 닳아서 높이가 절반으로 줄 정도로 타고 또 탔습니다. 그러다 보니 동네에서 스케이트를 아주 잘 타는 녀석이 된 겁니다. 멋지게 질주하는 모습을 엄마가 봐줬으면 했어요. 당시 엄마는 보험판매원을 했는데 사무실로 출근하려면 종점에서 버스를 탔고, 그 버스 종점에서 스케이트장이 내려다 보였어요. 그래서 엄마에게 내가 타는 모습을 봐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여기서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오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매우 당황스럽고 황당한 사태였다. 나 자신에게 말했다. '인마, 갑자기 왜 이래. 진정하자, 제발'
"아, 글쎄 한 번도 안 봐주는 거예요. 얼마나 서운했던지....." 
말을 이었는데도 서러운 감정이 계속 올라와 말끝이 갈라졌다. 관객들 일부가 박수를 쳤다. 일종의 관용구 같은 상황이다. 무대에 올라간 사람이 서럽거나 감격해서 눈물을 보이면 '울지 마, 괜찮아'를 연호하며 박수를 보내는 것이 대중매체가 찍어내듯 만든 기성품 반응이지 않은가. 마치 상대가 '땡큐'하면 저절로 '유아웰컴'이 튀어나오는 것처럼. 근데 속으로 좀 웃겼다. 어쨌든 이 상황을 마무리하고 공연을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공연을 하는 겁니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땀 흘려 성실하게 수행했을 때 가장 먼저 부모가 봐주길 바랍니다. 학교라는 조직은 삶의 장소와 배움의 장소를 갈라놓았기 때문에 부모가 아이의 성장 과정을 볼 기회가 없어요. 일단 학교에 들어가면 단 1분도 집중해서 봐주는 기회 없이 아이가 성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은 1시간 여 동안 충분히 몰입해서 내 아이 니 아이 관찰하고 무대에서 내려오면 맘껏 이뻐해 주세요. 봐주기, 그리고 이뻐해 주기.... 교육을 위해 부모가 해야 할 일의 전부입니다. 자, 준비가 됐군요. 늦은 한 가족도 오셨구요.... 이제 여러분의 박수와 함께 공연 시작하겠습니다."
이렇게 마무리하고 한숨 돌렸다. 나중에 집에 와서 마누라가 핀잔을 한다. "다 늙어서 주책이지. 그게 뭐유.... 남들은 다 당신이 부모의 보살핌 없이 서럽게 자란 줄 알 거잖아." 이런다.
내가 울컥하고 눈물이 핑 돈 이유를 관객인 학부모들이 알 턱이 없겠다. 내 설움에 그런 것이 아니라 학부모에 대한 복합적인 관점 때문이다. 초임 교사 때 학부모들 앞에서 엉엉 울었던 것과 같은 이유다. 하나는 한국사회에서 부모 노릇에 대한 자기 시좌가 없는 사람에 대한 연민이고, 또 하나는 이기적인 부모의 언행으로 아이들이 상처받은 것에 대한 분노다.
내가 데리고 있는 아이들은 상처투성이다. 가장 큰 상처 제공자가 부모다. 우리 아이들에게만 국한해서 하는 얘기다. 전체적으로 보면 저소득층 가정의 아이들이 절대빈곤상황으로 상처받는다. 우리 아이들은 절대빈곤과는 거리가 멀다. 웬만큼 먹고사는 집이고 부모들은 나름 당당한 라이선스를 가지고 사회생활하는 이들이다. 내게 의지하는 아이들은 나이키 운동화를 못 사서 서러운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는다. 참 많은 아이들이 우리 아이들과 비슷한 처지에 있다. 
아이들은 세 가지 공포를 갖는다. 의외로 첫 번째가 부모의 이혼과 가정의 파탄이다.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집의 아이들도 엄마 아빠가 헤어지면 어떡하나 걱정한다. 이혼율 최고의 한국사회 모습이다. 둘째가 죽음에 대한 공포다. 교통사고나 백혈병, 각종 안전사고로 자신이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있다. 아이러니는 KBS <위기탈출 넘버원>이나 SBS <심장이 뛴다> 같은 프로그램이 아이들에게 안전사고 예방에 대한 경각심을 주지 못하고, 언제든 재난이 닥칠 수 있다는 메시지일 뿐이다. 안전사고율 최고의 한국사회 모습이다. 셋째가 학교 서열에 대한 공포다. 석차가 뒤로 밀리는 것은 아이들에게 심리적 죽음이다. 학교에 다니는 한 아이들은 서열 걱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이가 어리면 학습 외적인 관계의 서열이 문제고 6학년부터는 학습 석차가 B급 공포영화처럼 뒤통수에 붙어 다닌다. 학습노동시간 최고의 한국사회 모습이다. 
내게 의지하는 아이들의 부모는 첫째와 셋째 공포를 아이들에게 주입한다. 하지만 자기가 어떤 역할을 아이에게 하는지 거의 모른다. 그러니 안쓰럽기도 하고 화도 나는 것이다. 
계몽이 필요할 정도로 아직도 미몽이다. 흔히 우민화라고 하는 정치적 의도가 가장 큰 원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몽"에 대한 경계가 있다. 계몽소설의 원조인 <상록수>에도 계몽적 태도를 경계하는 대사가 있을 정도니까. 나도 교육의 계몽적 태도를 반대한다. 
하지만 너무 답답하니 일단 계몽 캠페인이라도 해야겠다. 이렇게 아무 지식과 마음가짐 없이 부모가 되면 안 된다. 1989년 2월에 쏟은 눈물과 2016년 1월에 보인 눈물이 똑같은 것은 비극이다. 비극에서 벗어나기-이게 내 일이라 여기는데, 이 주제가 내 주제가 된 것이 비극이지 않을까 싶기도....
뭐든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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