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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규 Jan 15. 2018

빅브라더와 공동체

'척'에 대한 조감

1977년 샌드페블즈의 <나 어떡해>가 대학가요제 대상을 받아 엄청난 인기를 누렸을 때 나 역시 "나 어떡해~"를 입에 달고 살았다. 중학 1학년 까까머리 꼬마였다. 다음 해 제2회 대학가요제에 <밀려오는 파도 소리에>가 연일 라디오와 레코드 가게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기 직전 아버지는 복막염으로 수술을 받았다.

급성 맹장염을 오진한 탓으로 장을 다 드러내는 큰 수술이 됐고 아버지는 2주간 입원했다. 덕분에 나는 아버지 간병 명목으로 며칠 학교에 가지 않았고 결석 처리도 되지 않았다. 간병이야 어머니 몫. 나는 을지로 백병원의 지리적 조건으로 명동 일대를 어슬렁거리며 변두리 촌놈의 눈호강을 즐겼다. 명동성당도 처음 봤고 닭육수의 명동칼국수는 "신이 내린 맛"으로 느껴졌다. 아버지의 '좀 큰 배탈'은 아무 걱정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이미 일상으로 돌아간 그 해 가을 어느 월요일, 운동장 조회에서 나는 구령대에 올라 교장선생님에게 표창장을 받았다. 표창장 타이틀 대신 효행상이란 제목이 크게 쓰여 있었다. 아버지 병간호를 극진히 수행한 효심 깊은 학생으로 담임이 표창 내신을 한 것이다. 이 '사건'은 그 후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마음 속 치부로 자리 잡고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까지 때때로 치밀어 올라와 머리를 흔들어댔다.

교직에 나가서 근무하면서 표창내신이 형식적으로 이루어지며 어쩔 수 없이 표창을 위한 스토리가 창작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면서 괴로움은 사라졌다. 중학 2학년 어린 나이에 진실로 담임이 내 효행에 감동하여 표창장을 만들어 수여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것은 나로선 죄악의 형극을 뒤집어 쓴 것이고, 손오공의 금강권(삼장법사가 조종하는 손오공 머리띠)을 착용하고 살면서 스스로 진실게임 모드에 빠질 때면 조여드는 금강권의 위세에 편두통을 앓곤 했다.

"저는 효자가 아닙니다. 저는 특별한 효심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어머니가 나의 효행상 표창을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할 때면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학교 가기 싫어서 빠진 것뿐이라는 coming out을 해야 맘이 편해질 것 같았다. 진정 당시 나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우울한 시간이 많았다.

내가 명예욕이 크다는 것을 어릴 때도 알고 있었다. 다만 물질욕이 아닌 명예욕이니 도덕적으로 당당할 수 있다고 자기 방어를 했었다. 때문에 훌륭하다는 칭찬, 박수, 공식적인 표창 등을 얻으려고 했고, 내 자랑거리로 삼았다. 그러나 효행상 표창 이후 칭찬을 받으려는 욕망과 거짓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양심의 반격으로 칭찬의 양만큼 괴로움의 크기도 비례해서 커졌다.

결국 내가 선택한 카드는 더욱 두꺼운 보호막을 치는 것이었다. 치부라 여겨지는 거짓된 행동을 숨기기 위해 더욱 그럴 듯한 "척"을 하게 된다. 정말 효자인 척, 성실한 척, 착한 척, 배려하는 척, 척, 척 ,척의 연속들. 늘어가는 것은 연기력과 자신에 대한 저주였다. '갈 때까지 가 보면' 결국 파멸하는 흉측한 꿈도 자주 꿨다. 나는 예민하고 까칠하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고집스럽고 독선적이라는 평가가 늘 뒤따랐다. 악순환이다. 그런 부정적 평가가 계속해서 나를 조여 댄 것이다. 

그 때 나는 혼자였다. 혼자인 내가 흉몽을 꾸고 혼자인 내가 다른 혼자인 여자를 만나 혼자인 아들과 딸을 낳고 키웠다. 그리고 혼자서 책을 읽었다. 교사로서 교실에서 혼자 얘기하고 아이들은 혼자서 놀고 혼자서 속상해 울었다. 치부를 들키지 않으려고 덧칠하고, 덧칠이 드러나지 않으려고 또 다른 치부를 만드는 악마의 루틴에서 벗어나는 계기는 세상은 혼자들이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경험 때문이다. 

단재학교에서 나의 제자가 아닌 후배들을 만난다. 다는 아니지만 일부 아이들은 내가 그맘때 겪었던 과정을 지나가고 있다. 인위적 조작이 불가능하다. 악마의 루틴에서 벗어나는 것을 선생이 개입할 수 없다. 부모도 개입할 수 없는 문제다. 선생이나 부모가 개인의 아이덴티티로는 해결해 줄 수 없다. 혼자가 아닌 공동체로서 함께 할 때 선순환으로 전환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겠다.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공동체”가 말로서 난무하는 시대에 실존하는 “공동체”를 체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동시에 ‘나’의 여집합과 ‘나’는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성격과 취향과 몸집과 체질이 다르고, 결정적으로 욕망이 다르기 때문에 공동체로 묶이는 것은 관념적 목적을 위한 사회운동의 억지로만 여겨진다. 공동체를 말하지만 공동체를 잘 모른다. 이미 집 안에 더운 물 잘 나오는 욕실을 두고 여럿이 사용하는 공중샤워장을 가자고 채근하는 누군가가 불편을 넘어 미워지기도 한다.

김나영 시인이 쓴 가슴에 스미는 시 한 편을 꺼내본다.     

「브래지어를 풀고」
     
브래지어 착용이 유방암 발생률을 70%나 높인다는 
TV를 시청하다가 브래지어 후를 슬쩍 풀어 헤쳐본다
사랑할 때와 샤워할 때 외엔 풀지 않았던
내 피부 같은 브래지어를 

빗장 풀린 가슴으로 오소소― 전해오는 
시원함도 잠깐
문 열어놔도 날아가지 못하는 
새장 속에 새처럼
빗장 풀린 가슴이 움츠려든다
갑작스런 허전함 앞에 예민해지는 유두
분절된 내 몸의 지경이 당혹스럽다     

허전함을 다시 채우자
그때서야 가슴이 경계태세를 푼다
와이어와 후크로 결박해야 비로소 안정을 되찾는
     
나는 문명이 디자인한 딸이다
내 가슴둘레엔 그 흔적이 문신처럼 박혀있다
세상 수많은 딸들의 브래지어 봉제선 뒤편 
늙지 않는 빅브라더가 있다

― 시집『수작』중에서     

그랬구나! 내가 문명이 디자인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더 이상 혼자가 아님을 알지 않았을까? 내가 알았다는 것조차 나중에 겹쳐진 실천의 산물이다. 시 읽기가 그 중 하나의 실천이었겠다.

혼자서는 생활 속에서 브래지어를 벗을 수 없다. 처음엔 유방암 걱정과 예방을 위한 혼자의 필요성 때문에 모인 사람들도, 모였기에 혼자에서 벗어난다. 함께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으니 마음의 부담이 덜어진다. 분절된 내 몸의 지경이 당혹스럽지 않고 건강한 삶을 누리는 것이 지속되기 위해서 저절로 등 뒤의 빅브라더를 알게 된다. 역으로 빅브라더를 알고 있더라도 함께 모이지 않으면 불안과 당혹은 이어질 수밖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어린이와 청소년이 성장하는 문제라면 더더욱 고립된 혼자이어선 안 된다. 자녀뿐만 아니라 부모도 마찬가지. 함께 모이지도 않고 교육철학, 교육과정, 경쟁과 협력 등을 언급하며 빅브라더의 존재를 인식하는 각자의 지적 활동은 뒤로 미루도록 하자. 우리는 모여야 한다. 내 걱정이 혼자만의 걱정이 아니었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위안을 준다. ‘당혹스럽지 않고 건강하게’ 함께 하는 것이 먼저이다. 

내 몸의 일부인 줄 알았던 억압의 껍데기를 떼어내 버려도 불안하지 않다면 함께 한 도반들의 실천으로 앎은 뒤로 따라오는 법. 공동체란 혼자서는 극복하기 어려운 불안함을 함께 모여 덜어내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삶을 공유하는 닫힌 집단이라는 오해는 풀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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