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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규 Apr 28. 2018

남과 북, 북과 남

문재인, 김정은의 판문점선언을 접하며

초등학생 때 반공웅변대회에 나간 적이 있다. 아마도 4학년 때이지 싶다. 맞다면 1974년이다. 이 해에 여러가지 일이 있었다. 8월15일에 문세광의(짓으로 알려진) 저격으로 영부인 육영수 씨가 비명횡사했고, 같은 날 서울지하철 1호선이 청량리에서 노량진까지 개통됐다. 또한 72년 유신헙법 공포에 이어 74년 벽두에 긴급조치 1호 발령으로 사실상 계엄령 분위기였다. 원고는 엄마가 써줬다. 난 일기조차 써 본 적도 없었고, 천둥벌거숭이에 불과한 어린 아이였다. 74년 11월엔 가출을 시도하기도 했던(그래서 밖에서 하루 자고 들어온) 황당한 캐릭터였다.
웅변대회가 1학기이었겠다. 아마도 6.25를 앞두고 반공을 코드로 글짓기, 웅변, 포스터, 표어대회 등을 했을 것이다. 그때 또렷이 기억 나는 문구가 있다. 나는 '이 한 목숨을 바쳐서라도 김일성의 목을 따가지고 오겠다'고 말했다. 그것도 배에서부터 짜내서 최대한 볼륨을 올려서 말이다. 소리쳐 주장하면서도 뻘쭘했다. 엄마의 원고가 좀 과했다고 생각했다. 아이러니는 엄마가 골수좌파 소리를 들으며 평생 고초를 겪은 박래원의 맏딸이라는 것. 박래원은 1901년 생으로 6.10만세운동의 주역으로서 5년 복역을 했고, 엄마는 6.10만세운동이 있던 10월에 태어났다. 1961년 출범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상임의장이었다가 5.16 쿠데타 이후 이렇다 할 사회활동을 하지 못했고, 연좌제로 인해 자식들도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았다. (외할아버지는 초등학생인 내게 영어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만 했다. 영어 모르면 제국주의 세력에게 당한다고 하면서;내가 기억하는 유일한 외할아버지의 잔소리, 난 그게 뭔 말인지 전혀 몰랐다) 그래서 엄마가 오바했나 싶다.
어쨌든 난 아주 모범적인 반공 소년이었다. 북한 권력자를 진짜 늑대로 생각하진 않았지만 늑대의 이미지를 품고 있었다. 북한 인민들은 늑대의 폭정과 비리와 거짓에 신음하는 토끼였다. 이런 내가 망치로 얻어 맞은 것과 같은 충격을 받은 일이 고1 때 있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기 한 달 전 쯤이다. 4월 어느 날 5박6일의 간부수련회에 참가했다. 서울 시내 고1 반장들을 모아놓고 수련회 명분으로 정신교육을 시키는 행사가 있었다. 내용은 박정희 때의 세뇌교육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강찬구 교수(기억에 따른 이름; 많이 희미하다)가 1시간 가량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우리에게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결국은 반공 이데올로기 주입이었지만 충격적인 내용을 말했다. 그동안 북한이 남한보다 GNP (1인당 소득은 더욱 더 남한이 낮음)가 높았다는 것이다. 박정희 덕분에 1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하면서 남북한 GNP가 비로소 균형을 잡았다고 말했다. 나는 정신이 혼미했다. 국토가 초토화돼서 초근목피로만 겨우 연명해야 할 북한 동포들이 집집마다 TV는 물론 냉장고가 있고, 교육비와 의료비가 무료라니.... 정말 그때의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배신감도 이런 배신감이 또 있을까. 그동안 거쳐간 담임 선생님들이 떠오르면서, "그들은 다 거짓말장이였단 말인가" 한숨과 함께 내뱉었고, 교과서에 기재된 내용 중 적어도 남북관계와 북한 실정은 몽땅 거짓말이라는 게.... "이게 실화냐" 지금도 타이핑 치다가 그때의 충격이 되살아나서 가슴이 두근두근하다.
강 교수의 강의는 '그러니까 젊고 다음 세대의 주인공인 너희들이 공부 열심히 해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 북한을 확실히 제압해야 한다'로 마무리했지만, 그 시간 이후 나는 학교교육의 배신감으로 큰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교대도 갔고(거짓말 안하는 선생님 되겠다고) 자연스럽게 전두환과 미국을 배격하고,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이 한 목숨 바치겠노라 자기암시를 강화하는 운동권 학생이 되었다. 남한의 민주화가 진정한 반공이며, 전쟁종식과 항구적 평화를 마련하며 통일을 앞당기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고1 때 겪은 충격을 학우들은 대학 입학 후 겪었고, 오히려 나는 담담하게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받아들였다.
남북한 GNP가 같아진 후 40년 가까이 흘렀다. 그리고 어제 파격적인 남북한 최고 권력자의 합의문이 "판문점 선언"으로 나왔다. 옥수수 박사 별명의 김순권 교수의 증언에 따르면(직접 들었다) 북한은 심각한 굶주림의 시기를 보낸 것이 분명하다. 바로 김일성 사망 후 10년의 세월이다. 고난의 행군을 벗어나 다시 10년의 세월이 흘렀고, 북한 경제가 되살아나고 있나보더라. 얼마나 다행인가.
북한 경제의 회복이 김정은 위원장의 여유로 나타난 것이리라. 나는 그렇게 본다. 고난의 행군 시절이었다면 어제 같은 판문점 선언은 언감생심이다. 
그래서, 나눠먹어야 한다. 먹을 게 평화다. 밥만 먹을 순 없다. 문화의 풍요로움도 평화다. 남북은 서로 왔다갔다 해야 한다. 사람도, 돈도, 문화도 왔다갔다 해야 한다. 빠른 시기에 북한에 관광으로 다녀와야겠다. 

솔직히 남쪽이 비정상국가였다. 이제야 비로소 정상국가로 나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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