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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규 Aug 23. 2018

도로아미타불

교육과정 재구성해서 도로 교육과정

공교육 교사였던 경력과 대안학교 선생이랍시고 명함 판 사람이라 자연히 교사 페이스북 친구가 많다. 다소 오해가 있을 수도 있지만 조금은 선배 축에 들었으니 같이 생각해보자고 쓴다.


내가 19년 일 하다가 교직 사표를 쓴 여러 이유 중 하나가(그래도 비중이 큰 이유) 스키마독서지도를 한겨레문화센터에서 강의하신 유영호 선생님의 말씀에 있다.


"교실에서 선생님이 열심히 하면 아이들은 노력하지 않습니다."
충격적이었다. 열심히 노력하고 실천하는 교사가 아이들의 불성실을 불러온다고? 정말 그럴까. 그렇다면 내가 노력과 실천에 다함이 있는 건 아니지만 지향점이 노력하고 실천하는 것에 있으니 나도 아이들의 불성실을 조장한 셈인가.
유영호 선생님의 짧은 아포리즘은 한 차시 수업이나 학교의 하루 일과를 모델링해서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40분 한 차시 수업만으로도 고개가 끄덕이는 점이 있다.
페북 공간에는 내가 '좋아요'를 당연히 누르게 하는 감동적인 선생님들이 많다. 그분들의 공통적 관심사가 교육과정의 재개념화나 재구성이라 보인다. 이분들 타임라인을 보면 초인적인 노력이 보인다. 동물적 사회적 욕망을 누르고 자신을 희생하며 공부하고 연구하고 표현하고 실천한다. 진정 이들이 벌써 침몰했을 한국호의 복원력 그 자체이다. 나도 똑같은 지향점이 있었고, 지금은 특히 더 그렇다.
그런데 말이다. 재개념화든 재구성이든 교육과정은 필수인가. 구성주의 관점에서 말하든 비고츠키 철학을 기반으로 하든 또는 삐아제를 따르든 교육과정은 목표지향적이다. 그러니까 열심히 노력하고 실천해서 결국 "내"가 지향하는 인간상으로 견인하려는 의도의 뭉치가 교육과정이다. 
견인했을 때 반드시 끌려오는(스스로 걸어오는 놈을 포함해서) 녀석이 있고 반드시 낙오하는 녀석이 있다. 노력하고 실천하는 교사에게 보람을 주는 녀석은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변화하는 놈들이다. 나랑 주파수 동조가 이루어지지 않는 녀석을 미워하지는 않아도, 이 녀석들이 내 노력과 실천의 가시적 표상일 수는 없다.
아내의 격렬한 비난을 무릅쓰고(이럴 거면 왜 결혼했냐는....) 아주 과감한 시도를 하면서 나름 살아있다는 웃기는 카타르시스를 섹스보다 더 좋아했는데, 나의 실천은 반드시 낙오자를 동반한다는 (어느날 문득) 깨달음이 수년 간 참으로 나를 괴롭혔다. 그 괴로움에서 해방되려고 산골분교장 교사로 7년간 살기도 했지만 서울 복귀 후 유영호 선생님의 결정타를 맞은 것이다^^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한데, 전국의 열정적인 선생님들이 그 열기를 좀 식히면 어떨까 싶다. 생각해보라. 내 진정성이 있는 그대로 세상에 표현될 수 있는가. 자본과 권력은 나의 열정을 언제나 왜곡한다. 나의 치달음이 한국호의 복원력이기도 하지만 누구를 위한 복원인가. 이제 침몰의 과정을 거쳐 다시 재구성 되는 걸 꿈꾸기도 한다.
재구성의 결론이 도로 "교육과정"이 아니면 좋겠다.


ps)아주 가끔 더 더 더 열심히 뛰면 낙오자 없는 교실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 나도 그런 적이 있다. 그런데 그건 완전한 착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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