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준규 Apr 29. 2018

사랑이 뭐야

메시지와 메타 메시지의 어긋남이 비극의 씨앗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드라마 보니 손예진이 아빠에게 사랑이 뭐냐고 묻는 신이 있더라.
손예진이 아빠와 맥주잔을 앞에 두고 대화하는 장면에서 내가 아빠 입장에 서 있는 걸 확인한다. 이때는 손예진이 전혀 이쁘지 않고 내 딸처럼 보였다. 내 딸아이가 내게 따지듯이 묻고 자기주장 펼치는 상상에 빠진다. 사랑이 뭐냐고, 가르쳐주라고 따지는 딸에게 아무 말도 못 하는 아빠로 빙의해보니, 그리 힘든 일은 아니더라. 오히려 한편으론 아픈 마음으로 따지고 드는 딸이 있다는 것이 흐뭇하더라. 그래도 사랑이 뭘까 잠깐 생각했다. 물론 사랑을 가르쳐 달라고 매달리는 딸에게 "음... 사랑이란 말이지..."하며 강의하는 아빠는 설마 없겠지. 나도 그런 최악의 아빠는 아니다.
.
학술적인 언술은 아니고, 사랑은 '살다'에서 파생한 말이 아닐까. 사람도 마찬가지. 살아있으니 사람이다. 라틴어 anima(목숨)가 있는 존재는 animal이 됐지만 우리는 사람에게 목숨의 의미를 더욱 집중한 것이다. 뭐 Love와 Live도 한 끝 차이잖아.
그니까 사랑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살도록 마음 쓰고 몸도 쓰는 일이다. 살 수 있도록 환경을 제공하는 일이다. 죽지 않도록 애쓰는 일이다. 따라서 혹시라도 상처받는 일이 없도록 살피는 일이다.
그래서 레테의 강을 건넌 상대방을 사랑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애써도 죽은 이가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피드백이 꼭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대상을 사랑할 수 있다.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 사랑은 아니다. 떨어져서 만나지 못하는 존재를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건 자기만족, 자기최면이라 말해야 맞다. 왜냐하면 사랑은 서로 하는 것이다. 즉 서로 살리는 일이다. 짝사랑으로만 끝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마음의 통증일 뿐이다.
마음을 쓰는 일이라서 말씀(마음 씀씀이)이다. 그러니까 사랑은 말씀으로 살도록 살피는 일이다. 살아 있는 존재끼리 서로 살피는 일이라서 말씀을 나누는 일, 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대화는 두 주체가 대화가 가능한 상태라는 걸 확인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마치 전화를 하면 "여보세요"를 먼저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럼 상대방도 "여보세요" 응답함으로써 지금부터 우리의 대화가 가능하다는 상호 확인(승인)이 이루어진다.
상대방의 발신을 내가 수신했다는 확인으로 상대방 말을 반복한다. 내가 뱉은 말을 상대가 똑같이 따라 하면 둘 사이에 잘 닦인 라인이 연결됐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조건에 놓였다는 것은 적대적 관계가 아니라는 신호다. 친근함을 확인하는 것이다. '당신과 대화를 환영한다'는 메시지이다.
따라서 발신자의 말(마알=마음 알갱이)을 수신자가 똑같이 되풀이하지 않는다면 대화는 불가능하다. 되풀이하지 않고 다른 말을 한다는 것은 대화하지 않겠다는 메시지이다. 인사(greeting)가 그런 것이다. 전 세계 어떤 언어라도 상대방의 말을 되풀이함으로써 상대방을 축원하는 인사가 된다.
.
안녕하세요-안녕하세요
How are you-How are you
Good morning-Good morning
곤이치와-곤이치와
.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야 할 사안이 있다. 앞서 말한 메타 메시지가 그것이다. 사람은 말을 할 때 메시지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메시지를 해석하는 방법을 품고 있는 메시지의 상위 메시지, 즉 메타 메시지를 반드시 함께 발신한다. 
그런데 발신자는 "안녕하세요"라고 말했는데, 수신자가 되풀이할 때 어금니를 꽉 물고 인상을 쓰면서 "안녕하세요"라고 했다면 어떨까. 어금니를 꽉 물거나 인상을 쓰는 것이 메타 메시지이다. 즉 자신이 말하는 '안녕하세요'를 해석하는 방법으로서 어금니를 꽉 물고 인상을 쓴 것이다. 그건 내가 말하는 '안녕하세요'는 너에게 보내는 축복의 말이 아니라는 메시지이다. 메시지와 메타 메시지가 어긋난 것이다. 
아래 그림처럼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right' 푯말은 반드시 하나는 참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이다. 푯말을 해석하는 입장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든 반드시 잘못된 선택도 할 수밖에 없다. 
양자택일에서 어느 선택도 선택하지 않은 쪽으로부터 비난과 질책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이것이 메시지와 메타 메시지의 어긋남으로 생기는 '이중구속(Double Bind)'이다.
이중구속의 창시자 그레고리 베이트슨은-내 입장에서는 마음 아프게도-엄마의 메시지와 메타 메시지의 어긋남으로 예시를 든다. 엄마의 말과 태도가 어긋났을 때 아이는 엄마의 메시지를 따를지, 메타 메시지를 따를지 선택의 어려움을 겪으며, 결국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질책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경우 아이의 발달은 억압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정신적 문제를 낳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베이트슨의 이중구속 이론은 1950년 대에 나온 것이라 현재 적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중구속을 비판하는 연구도 있다. 그러나 일상을 힘들어하는 아이를 10년 이상 만나온 나는 지금 한국의 어린이 청소년은 베이트슨이 말한 이중구속에 묶여있다고 확신한다. 확실히 부모(주로 엄마;이점이 매우 안타깝다. 아빠교육이 꼭 필요한 이유)의 메시지와 메타 메시지는 어긋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도로아미타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