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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규 Apr 28. 2018

같은 낱말, 정반대 뜻

이중구속(Double Bind)과의 만남

"자기야~"
우리 부부는 여보, 당신이라고 부를 때도 있지만 '자기'라고 부를 때도 많다. 부부나 연인 사이 뿐 아니라 가까운 사이에는 '자기' 호칭을 쓰는 게 자연스럽다. 다만 남성 끼리는 쓰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자기' 호칭을 들었던 어린 시절부터 궁금한 것이 있었다. 몇 살인지 기억나지 않는 옛날, 내 낱말꾸러미에 '자기'는 '自己', 즉 스스로를 지칭하는 것으로만 입력돼 있었다. 그런 '자기'가 상대방을 지칭할 수 있다는 걸 어리둥절하게 생각했다. 영어에서 I(아이)가 You(유)를 대신해 사용된다는 것이니 참으로 어이없는 언어유희로 느껴졌다.
하지만 결혼 이후 사용하는 '자기' 호칭이 헷갈린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아내도 불편해한다거나 누구를 지칭하는 건지 헛다리 짚는 일 따위는 전혀 없었다. 이게 뭘까 하고 오래 전 질문을 던졌지만 잊고 있었다. 
조만간 번역 출간될 우치다 타츠루의 <죽음과 신체>에서 우치다 선생님은 '적당'을 예로 들었다. '적당'은 '適當'으로 쓰는 한자말인데, 일본에서 한국으로 들어온 말로 보인다. 따라서 '적당'의 이중성도 일본과 한국이 똑같다. 적당한 물건이라고 말하면 '적당'은 '딱 알맞은'의 뜻이 있다. 실제로 흔히 쓴다. 동시에 '적당'은 '적당히 해라'처럼 사용하면 '엇비슷하게 대충'이란 뜻이 된다. 같은 말이 정반대의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들어보니 정말 그렇다. 또 그런 예가 있나? (있다면 댓글로 알려주세요. 동음이의어가 아닌 동어이의어를 찾습니다. 한자말의 경우 한자도 같아야 하지요)
생각해보니 '팔다''도 있다. '팔다'는 내 물건을 대가를 받고 남에게 주는 것이지만 쌀을 '판다'고 할 때는 거꾸로 의미다. 다른 의미가 아니라 정반대로 '산다'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뭘까? 뭔가 있다!(또 뭐가 있을까. 잘 떠오르지 않는다)
스페인어를 배우다 보니, 'mañana'가 내일이란 뜻과 동시에 아침이란 뜻도 있다는 걸 알았다. 현지인이 '마냐나'를 사용함에 있어 어려움이 전혀 없다고 한다. 
어찌어찌 검색을 통해 조사하다가 르완다어 ejo(에조)가 어제와 내일의 뜻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르완다 사람이 ejo를 말할 때, 어제를 뜻하는지 내일을 뜻하는지 헷갈리는 일은 없다.
그러고 보니 여러 예를 찾을 수 있다. 고대 이집트어에 'ken'은 '강하다'와 '약하다'의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한다. 라틴어 altus는 '높다'와 '낮다'의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고, 영어의 with도 '함께'와 '없이'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는데 오늘날 '함께'의 의미만 남았다는 것이다.
왜 인간은 이렇게 불편한 짓을 할까. 다른 뜻이라면, 더구나 정반대의 뜻이라면 서로 다른 낱말을 만들어 얼마든지 말할 수 있건만, 같은 낱말을 사용하도록 한 이유가 무엇일까. 낱말을 구별해서 사용하는 것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닌데 말이다. 
이처럼 아이러니한 언어의 구조에 언어의 본질적 역할이 숨어있다고 주장한 사람이 그레고리 베이트슨이다. 흥미를 넘어 교실에서 학생을 만나는 교사 또는 어린이의 양육자가 모르는 비밀이 베이트슨의 이중구속(double bind) 이론에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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