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글쓰기는 힘이 들까
아주 오랫동안 말과 글의 차이에 대해 고민했다. 내 고민은 학술적 뒷받침 없이 생활공간(주로 대안학교 교실)에서, 그것도 머리속에서만 이루어졌다. 천만다행이다. 논문이나 권위를 갖춘 교수들의 글이나 가르침에서 떨어져 있었기에 고민이 오염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런 순수한 내 고민의 배설물을 잘 보완해서 피드백 해준 분이 있다. 바로 박동섭 선생님. 스승이자 인생의 은인이다.
박동섭 선생님과 만남은 2011년 시작됐다. 오자와 마키코의 <심리학은 아이들 편인가>를 읽고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2007년부터 상담소를 운영하면서 만난 학교부적응 청소년들을 통해 심리상담에 대한 회의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도대체 상담을 받는다고 무엇이 달라지나. 상담을 받을 수록 아이들은 더 죄의식이 커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런 의문을 해결할 수 없어서 언제나 마음이 무거웠다. 막연히 글과 말의 차이에 주목하며 디지털문명의 전환에 대해 집중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에게 오는 아이들은 말로 표현하는데 어려움이 없지만 글로 쓰는 것은 힘들어했다. 힘든 것을 넘어 마치 귀신을 대하듯 무서워 했다. 읽기도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쓰기가 더욱 어렵다)
당시에 내가 주로 하는 해명은 이랬다.
"미디어 전환으로서 한글 습득을 하는데-이후 커뮤니케이션이 글 위주로 이루어지고 학교에 들어가면서 지식습득은 99% 페이퍼를 통한 텍스트 위주 리터러시로 기울기 때문에- 습득 과정이 학습노동으로 인식되거나 서열의 문제로 아동에게 각인된다면 학습부진의 원인이 됩니다. 어떤 환경에서 한글을 받아들였는지 살펴야 합니다. 말은 익히는 과정이 축복입니다. '어엄마~' 라고 말만 해도 가족 모두 기뻐하고 아기에게 축복의 말을 합니다. 이후 모든 말 익히는 단계가 얼마나 기쁨의 연속이었습니까. 그러나 글 익히는 과정은 정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잘한다' 보다는 '잘 못한다'는 말을 듣기 일쑤고, 유아교육 단계부터 서열에 의해 소외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새로운 미디어로서 글을 멀리하는 겁니다. 학생인 한 일상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결국 텍스트를 아이에게서 한시적으로 멀리하고, 음성언어의 자유로운 사용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솔루션이었다. 그래도 목마름은 계속됐다. 우연한 기회에 마에스트로 구자범과 술자리를 같이 했는데, 구자범의 대학동기(연세대 철학과)이자 유수한 대학의 철학과 강사로부터 빌렘 플루서를 소개 받았다. 내가 하는 주장이 바로 빌렘 플루서가 한 말이라는 것이다. <디지털시대의 글쓰기> <피상성예찬> <사진의 철학에 대하여> <코무니콜로기>등을 섭렵했다. 큰 도움을 받았다. 특히 "탈역사성"을 배운 건 행운이었다. 빌렘 풀루서는 아직 왕성하게 활동할 나이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한다(1920~1991) 점점 변두리로 밀려나는 텍스트의 소멸이 탈역사의 수순이라는 걸 새로운 고민의 고갱이로 받아들였다.
그러던 중 오자와 마키코의 <심리학은 아이들 편인가>는 퍼즐의 잃어버린 마지막 조각을 찾은 듯 했다. 100년 전 신학문으로서 심리학이 탄생한 후 심리학이 어떻게 대중조작을 이어왔는지 40년 상담심리학자로서 산 오자와 선생님은 폭로하고 있다. 감성적인 글이 아닌 과학적 서술이다. 각각 개인으로서 심리학 종사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그건 일상에서 프라스틱 제품과 비닐 포장제를 사용하는 개인에게 환경파괴의 주범이라고 몰아붙이면 동의하지 않는 것과 같다. 개인적 액션이 아니라 학문으로서 심리학을 매개로 심리학 종사자들이 어떤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어떤 소셜 액션을 수행하는지, 정권으로서 자본과 어떻게 결합하는지 해명한 것은 명확한 서술이다.
I got it!
이런 기분이었다.
저자를 만나고 싶었다. 먼저 번역자를 만나야 했다. 이미 학생 수만큼 <심리학은 아이들 편인가>를 구매해서 각 가정에 배포했다. 같이 공감하는 학부모, 교사, 대학생 아들, 학생의 일부와 함께 부산에 가서 박동섭 선생님을 만났다. 박동섭 선생님도 우리에게 최선을 다했다. 오자와 마키코 선생님은 건강과 고령을 이유로 방한이 곤란하다고 했다. 이미 일 년 전 한국에 와서 춘천교대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었다. 아쉬운 만큼 박동섭 선생님에게 더욱 집중했다.
그렇게 이어진 인연이 2012년 고베의 우치다 타츠루 선생님 집 방문으로 이어지고, 이후 한국에서 우치다 열풍이 불게 된 단초를 마련했다.
박동섭 선생님은 최근 내게 <심리학은.....>보다 더욱 강렬한 깨달음을 주었다. 그것은 메시지는 언제나 메타메시지와 동행한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베이트슨의 "이중구속(Double Bind)"의 배경개념이다.
왜 열악한 환경(한부모 가정이나 찢어지게 가난한 집, 고아원 같은 특수한 분위기 등)에서 자란 아이가 훌륭한 청년이 되고, 겉으로 유복하게 보이는 가정에서 사랑 받으며 자란 아이가 망가진 모습을 보이는지 비로소 해명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