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보는 입장을 내려놓지 않는 한 아이는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봉화에서50일
#6월20일
#존재론적전회 #ontology_turn
1. 공교육 학교에서 어린 학생이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선생님 지시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며 대항한다고 했을 때 학교 밖으로 쫓아내는 방법 말고 또 다른 길을 상상하기 어렵다. 선의로 아이와 일대일 상담을 하거나, 대화를 통해 아이의 어려움과 속마음을 파악하고 불편함을 제거하는 선생님의 적극성을 상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런 상상은 영화 속 이야기일 뿐이다. 현장에서는 통하지 않는 솔루션이다. 교사와 아이는 전혀 얘기가 통하지 않는다. 교사가 자신의 입장을 내려놓고 아이의 입장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자세로 만나도 마찬가지다.
이에 대해 영감을 주는 책 구절이 내게 왔다. 바로 인류학의 전환점을 가져온 Kohn의 "How Forests Think"을 차은정 박사가 번역해서 얼마 전 출간된 <숲은 생각한다> 서문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이다.
"모든 생명은 기호적이며 모든 기호작용은 살아있다. 따라서 중요한 측면에서 생명과 사고는 완전히 동일하다. 즉 생명은 사고하며 사고는 살아있다. 이것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이해하는 것에 대하여 함의를 가진다. '살아있는 사고들'이 있는 곳에는 '자기self''도 있다. '자기'란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기호작용의 산물이다."
위 문장을 바탕으로, 나는 두 가지 측면에서 대화 불가능한 아이를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하나는 아이가 살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심호흡은 하지만 사고하지 않기 때문에 기호작용이 멈춘 것이며 이는 아이 입장에서 세상에 대해 표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콘의 표현을 따르면 아이는 자기를 잃어버린 것이다.
또 하나는 아이와 교사의 기호작용이 다른 루트(route)에 있는 것이다. 서로 상대의 기호를 해독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리 성의를 가지고 친절하게 말해도 아이는 선생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특히 교사는 자신의 기호체계에 아이의 말과 행동을 포획해서 해석하기 때문에 해독불가능에 빠진다. 교사의 기호체계는 대개의 경우 우리 사회의 주류 도덕적 덕목에 대응한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냐?"는 한탄은 아이에게 가닿지 않는다. "사람이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냐?"하고 아이는 반문할 수 있다. 그런 반문 조차 부도덕성의 산물로 보는 게 현실이다(도덕성결핍이 정신과 진단으로 나오는 걸 보라)
두 가지는 겹칠 수가 있고 전자와 후자가 독립적으로 성립하는 아이도 있다. 내가 경험한 바로 후자로 거론된 요소만 가진 아이들이 많았다.
이 문제를 해결(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이다)하려면 존재론적 전회에 상응하는 사고의 전회가 필요하다. 공론장이 마련되기를 바란다.
(*그림은 이상우 선생님의 글을 김차명 선생님이 정리하여 이미지 작업한 것을 가져왔다)
2. 함께 지내는 아이 둘은 초6과 중1 소년이다. 3년 이상 흔히 말하는 학습에서 벗어나 있었다. 검정고시 공부를 하는데 힘들어 한다. 그런데 이들이 내가 붙어있으면 유효한 학습을 진행한다. 하지만 과제나 단기 미션을 부여하고 잠시 자리를 비우면(부엌 일을 한다든가)전혀 학습활동을 하지 않는다. 이게 선생을 가장 힘들게(지치게) 하는 일이다.4개월을 지켜봤는데, 일부러 그러는 거다. 옆에서 도와주면 학습을 하지만 도움이 없으면 못한다는 게 아니다. 학습활동을 중단함으로써 선생을 자기 곁에 붙들어 놓으려고 한다. 선생은 내가 아닌 누구라도 상관 없다. '나'에게 있어 '너'를 keeping하려고 든다. 위에서 말한 기호작용의 어긋남 때문에 오래동안 몰랐다. 내 기호작용을 버리니 비로소 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