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목숨은 훌륭하다

메리토크라시에서 벗어나기

by 박달나무

#봉화에서50일
#6월26일
#우리아이들의진로

1. "어쩌다 보니 이 일을 하고 있다"가 아니다. 나는 이 일을 일부러 찾아서 하고 있다. 내가 하는 일은 제도 학교에서 버틸 수 없는 아이들을 케어하는 것이다. 결코 가르치거나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돌봄을 하는 것이 내 일이다.


2. 아이들과 한시적으로 만나는 것이기에 이후 진로에 대해 고민한다. 부모의 최대 관심사도 나와 만남 이후에 있다. 어디로 갈 수 있지? 무엇을 할 수 있지? 어디가 안전하지? 뭐 이런 생각들이다.


3. 두 아이는 내 속을 뒤집어 놓을 때가 있다. 하지만 언제나 뒤집힌 속을 제자리 잡아 놓고 반성한다.
씻으라고 잔소리 했지만 그러하지 않을 때, 조심하지 않고 오줌을 갈기 듯 누어 변기를 오염시킬 때, 살림살이를 함부로 다뤄서 부서뜨리고 망가뜨려 놓을 때, 무조건 울면서 황당한 요구를 할 때 속이 뒤집어진다고 느끼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리 속상할 일도 아니더라.
생활의 관성이 남아 그런 것이 대부분이고, 항상 서열을 요구하는 세상에 대해 두려운 마음에 몽니가 사나운 것인데 어린 인격파탄자로 몰아세운 건 아닌지 후회하곤 한다.


4. 도쿄대 야스토미 교수는 <누가 어린왕자를 죽였는가>(민들레, 박솔바로 역, 2018)에서 장미꽃과 여우의 정서적 학대(Moral Harassment)를 밝히면서 사라진 어린왕자가 자살한 것이라 해석한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리고, 왠지 여리고 순결한 리틀 프린스의 기존 이미지를 뒤집는 것이라 책의 논지에 저항하는 마음이 들게 마련이다. 하지만 야스토미 교수의 주장은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야스토미 교수의 얘기를 들어보면 떽쥐베리가 그의 사후 자본주의 시장에서 어떻게 소비되었는지 알 수 있다.
토인비 교수가 20세기 초중반에 역사의 연구를 통해 유럽으로 건너 간 예수가 어떻게 로마 황제의 권력 강화에 이바지했는지 밝혔을 때도 교회 종사자들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예수를 죽인 로마가 권력 강화에 그리스도교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국교로 삼지 않지 않았을 것이란 것은 상식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의 영토 확장처럼 유럽 전역을 로마제국 영토로 삼은 배경에는 기독교 개종이 있다.
어린왕자를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으려는 캔디와 동급으로 생각하는 한, 예수를 교회당 예배 시간에서만 만나는 한 인식의 도약은 일어나지 않는다. 지평의 확장도 융합도 시좌를 높이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5. 낙태죄가 사문화 된 법 조항인데도 마치 생명윤리차원에서 차마 없애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해와 인식의 대중 조작이다. 태중 아기도 인간이고 생명이라 죽일 수 없다는 주장에 맞서기 쉽지 않다. 상대는 이쪽을 아주 쉽게 몰아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기적이고 잔인한 사이코패스인 것처럼 공격할 것이다. 하지만 정희진의 지적대로 태중 아기를 걱정하기 이전에 우리가 이미 여자의 몸을 생명으로 생각하지 않고 단지 그릇으로 취급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6. 어린 목숨이 어른의 가이드를 굳이 어기고 지저분한 짓, 위험한 짓, 어른 입장에서 귀찮고 불편한 짓을 한다는 인식도 마찬가지다. 지저분하고, 위험하고, 귀찮고, 불편하다는 것은 철저히 권력을 가진 어른의 입장일 뿐이다. 아직 사람의 세상은 어리다는 것이 억압에 대해 정당성을 제공한다. 그게 정당한 것인가.


7. 사람은 어리든 늙었든 자체가 생명이다. 귀한 생명이 있고 천한 생명도 있나. 모두가 그렇지 않다고 말을 하면서 생명의 귀천을 기여도로 나누지 않았던가. 우린 백 년 동안 메리토크라시(능력주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어린왕자를 이승환으로 치환하는 저열한 수준에서 세상을 봐왔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내 앞의 어린 목숨은 목숨이기에 귀하디 귀하다.


8.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과 부닥치는 게 힘들다. 당분간은 인정하는 사람끼리 만이라도 어울려 행복하게 살고 싶다.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더라.


9. 현재 함께 지내는 아이들의 다음 스텝을 외국에서 찾으려고 하는데, 비용이 걸림돌이라 씁쓸하다. 내 머리로는 국내의 기관이나 조직 어디에도 아이를 보내고 싶지 않다. 하지만 반드시 어울릴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독립이 아닌 고립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덧. 요즘은 <숲은 생각한다>(에두아르도 콘, 차은정 역, 사월의책)를 계기로 존재론적 전환(Ontology turn)을 깊이 생각한다. 그동안 우린 휴머니즘을 의심하지 않고 인식의 기둥으로 삼았다. 과연 지구가 인간을 중심으로 움직이나. 사람만이 주체적으로 세상을 표상하는가. 비인간은 인간에 봉사하는 것이 정의인가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