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약은 새로운 병을 만드는 일
1. 10년 전부터 소아청소년과를 이용하는 것이 별로 부끄럽지 않은 분위기로 바뀌었다. 의사가 투약을 권하면(실제로 강권이나 명령) 따르게 된다. 어린이청소년이 복용하는 정신과 약의 대부분은 ADHD 관련이고 그 다음으로 틱 장애 관련 약이다. 그리고 항우울제를 복용하는 어린이청소년도 있다. 지금까지 경험에 의지해서 말하자면 정신과 약을 복용하는 어린이청소년의 가장 큰 부작용은 비만이다. 그 다음은 우울감이다.
틱은 ADHD와 겹치는 경우가 많고, 빈번하게 비만과 우울감도 함께 나타난다. 논리적으로 보면 틱과 ADHD가 충분조건이 되고, 투약을 거쳐 비만과 우울이 결과(필요조건)로 나타난다.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역이 성립하면서 서로가 필요충분조건이 되는 경우를 자주 목격한다.
지난 스페인 까미노 한 달 걷기를 통해 몸무게를 줄이면서 아이들은 틱 현상도 없어지고 감정조절능력도 현저히 향상된 결과가 있다. 불과 한 달 전에 있던 일이다. 이런 현상이 무엇을 말하는가. 정신과적 증상이 있고 투약을 거쳐 부작용이 나타났지만 부작용을 잡으니 애초 증상이 사라졌다는 것은 투약 과정의 실효성과 정당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즉 투약 자체가 새로운 병(disorder)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내가 투약을 반대하는 이유다.
2. 애초에 정신과 진단을 받으러 내원할 증상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유쾌한 일이 아니다. 걱정스럽고 한탄이 나오는 일이다. 하지만 현상은 해석을 거쳐 의미를 갖는다.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는 말이다. 해석의 과정은 민속지(ethnography)적이다. 현재의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문화적 배경을 고려해야 한다.
한국사회는 의사에 대해 관대할 뿐만 아니라 대부분 선망 직업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투약이 병 치료를 위한 선량하고 긍정적인 개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소아정신과적 의사 소견이 건강을 지키거나 회복시키려고 하는 의도라는 프레임에 바탕을 두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프레임도 살펴야 한다. 정신과 진단에서 권력관계가 작용한다.
즉 환자(또는 환아)의 행위가 부정적 의미를 가져야 하고 진단 주체의 권위가 무조건 보장되는 전제가 있어야지만 정신과적 진단은 실효성을 획득한다. 해석의 유일성이 보장돼야 의사의 사회적 지위가 보장되고 돈벌이에도 차질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새로운 프레임에서 해석을 시도해야 한다. 의학적 해석을 배제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의학적 해석이 유일한 것은 정치적이다. 자연스럽지 않다.
디지털 시대에 태어나고 자란 세대의 표현 방법, 즉 이들이 표상하는 프로세스가 부모 세대와 다를 수밖에 없다. 디지털의 특성상 인간관계도 하이퍼링크에 유비되고,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탈역사성에 기반을 둔 인식틀에 기초한다. 디지털 세대는 학습의 동기와 방법, 결과물 처리가 앞 세대와 다르며, 서열짓기가 자신을 계급으로 묶으려는 시도라 보고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문자에 기반한 학습에 저항하고, 차별적인 낮은 서열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허파를 가진 포유류로 태어났는데 물속에서 살라고 한다고 순순히 숨을 참고 수중생활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삶이 불가능한 것이다.
3. 저녁을 먹이고(점심 때 아이가 남긴 음식이 아까워 과식을 했더니 속이 불편하여 나는 저녁을 건너뛰었다) 의자에 앉았을 때 전화가 왔다. 4년 전 내게 와서 일 년을 지내고 집에 복귀한 학생의 엄마가 답답한 마음에 전화를 했다. 그 아이에게 아쉬움과 미안함이 있었지만 처음 만났을 때와 많이 발전한 모습으로 나와 헤어졌고, 학교에 복귀하여 현재 중학생이 되었다.
얘가 학교생활이 매끄럽지 못하고 친구들과 갈등도 있고 선생님에게 지적당하는 일이 자주 생기면서 4년 만에 다시 정신과 진단을 받았고, 병원에서 받은 약을 나흘 먹었단다. 그리곤 전에 보지 못했던 행동을 보인다는 것이다. 내 의견을 간단히 말하고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하자고 했다.
아이가 중학생이 되어 학교에서 보인 대표적인 지적사항이 선생님과 대면해서 묵비권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입을 꾹 다물고 대답을 하지 않는단다. 왜 대답을 안 하느냐고 다그쳐도 묵묵부답은 마찬가지라고. 그래서 선생님이 부모에게 연락하기도 한단다. 아이의 학교생활에 대해 안내하는 연락이기도 하지만 아이의 태도에 대해 교사가 부모에게 통보 또는 경고의 메시지이다. 문제를 해결하는데 부모로서 협조하라는 명령의 의미가 강하다.
아이의 묵언은 교사에 대한 저항일 것이다. 하지만 먼저 아이의 묵묵부답이 왜 문제가 되는지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다. 만약 어른의 세계라면 어떨까. 누군가 말이 없이 대답하기를 거부했을 때 기어이 말을 하도록 명령하거나, 나아가 답답하다며 꾸중으로 훈육하거나 후견인에게 일부러 전화를 걸어 통보하겠는가. 학생의 언행을 문제로 삼는 교사의 무조건 권위가 먼저 문제가 된다.
아이는 의사로부터 충동조절장애를 의심한다는 말과 함께 아스퍼거증후군에 대한 약간의 우려도 있다는 진단을 받았고 심층진단은 다음 기회로 예약을 했다고 한다. 일 년을 같이 살았던 내가 볼 때 의사 진단은 넌센스다. 의사가 엉터리라는 얘기가 아니고 처음 만난 중학생을 단 몇 십분만 만나고 아이 삶에서 병명을 길어 올리는 진단 과정이 넌센스라는 것이다.
지구를 병들게 하는 주체가 인간이다. 병의 원인을 제공하는 인간이 지구에게 청진기를 대고 진단하는 것과 같다.
“네가 없어지면 난 건강해진다구”
아이의 특정 행동이 문제가 된다는 진단 이전에, 그 행동이 왜 문제가 되어야 하는지, 누구 입장에서 문제화되는 것인지 따져야 한다. 아이 자신은 본능적으로 따진다. 그리고 거부하고 저항한다. 아이는 발신했는데 어른이 수신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이제는 해야 한다. 어른이 수신할 수 있는 안테나를 마련하거나 수신해서 암호해독을 할 수 있는 난수표를 마련해야 한다. 그러면 보호자 어른(교사를 포함해서)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당연히 안테나 설치와 해독 프로그램 마련이 필수다.
4. 지금 함께 생활하는 아이들도 다음 스텝이 걱정이다. 검정고시는 통과할 수 있는데, 학교 복귀 경우 내년에나 가능해서 올 하반기에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할 것인지 전망이 불투명하다. 나와는 헤어질 수밖에 없는 사정이라서 그렇다. 손 번쩍 들면서 내가 맡아서 돌보겠다는 개인이나 기관이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