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포자" 단어에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는 함의가 있다
1. 집 밖으로 나가는 일 없다 보니 시간 운용에 여유가 있다. 책을 잡을 시간도 있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불만인 게 책 읽기가 힘들다. 책을 잡으면 진도가 안 나간다. 원래 문자랑 친하지 않은데 필요에 따라 억지로 읽다보니 스트레스만 받는다. 독서가 젤 힘들다. 독서를 힘들어하는 아이를 잘 이해하는 조건을 가졌다는 위로로 합리화하고 넘어간다.
종종 TV를 보는데, jtbc의 다정회(‘다섯시정치부회의’를 줄여서 이렇게 부른다)하는 시간이 아이들도 저녁 먹기 전 휴식을 하는 시간이라 시청하기 편하다. 뉴스가 거의 예능프로그램이다. 키득거릴 일이 많다. 저녁밥 달라는 아우성 때문에 끝까지 시청하지 못하고 부엌으로 들어간다.
2. 8시 좀 넘어서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CJ엔터테이먼트가 만든 <나의 수학사춘기> 재방송을 봤다. 끝날 무렵 5분 정도 본 것인데, 4주 만에 수학 9등급을 4등급으로 끌어올려준다는 망언을 하는 것이다. 흔히 하는 말대로 “수포자 탈출을 도와 드립니다” 식이다.
“도대체 수학으로 어떻게 예능을 만든 거야”
궁금한 마음에 검색~ 매주 화요일에 방송하고 아마도 4편만 방영할 생각인 파일럿 성격의 프로그램인가 보더라. 엊그제 1편을 방송했다고 하더라. 혹시나 하는 생각에(우리 아이들에게 도움 될 만한 게 있나 싶어서) 다시보기로 시청했다.
일단 미끼는 두 자리 수×두 자리 수 계산을 인도식 계산법을 응용한 새로운 방법으로 빠르게 답을 내는 방법을 가르친다. 그리고 끝. 워낙 앞 3분의 2 시간은 예능인 출연진 소개로 써버려서 첫 방송에서는 곱셈법 외에 다룬 게 없다.
논쟁거리도 아니다. 간편한 계산법이나 공식을 외워서(11제곱부터 19제곱까지 외우도록 당부한다. 17제곱은 계산 없이 외워서 289 답을 내라는 것) 수학문제를 풀 수 있다는 주장은 전혀 수학적인 주장이 아니니까 말이다. 오로지 내 관심은 구구단만 겨우 외운 상태의 아이가 수학에 흥미를 가지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가 뿐이다. 간편 계산법이라도 우리 아이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언제나 OK, Thanks 다.
그런데 출연진의 수학 나이를 테스트하겠다며 초3 문제로 아래 문제를 제시한다.
반지름 8cm 원 4개로 가득채운 정사각형 둘레의 길이는 얼마인지 묻는 문제다. 이게 초등3학년 수학 문제 맞나? 20년 가까이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는데, 내가 학교를 떠난 지 무척 오래됐다고 확인시켜주는 문제다. 초3 문제로는 많이 어렵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지금 곁에 있는 14살 소년도 오답을 냈다.
3. 중졸 검정고시 기출문제 중에 아래 문제가 있다.
이 문제는 상당히 어렵다. 아이들은 펜을 이용해 시험지 위에서 5cm나 4cm의 길이를 잰 다음 x의 상대적 길이를 재서 보기 중 가장 그럴 듯한 길이를 정답으로 선택한다. 그래서 6cm를 정답으로 채택한다. 정답 맞다. 하지만 x가 어떻게 6cm인지 이해한다는 건 쉽지 않다.
수포자가 도형문제를 가장 어려워 한다는 건 무엇을 말하는가. 도형문제의 이해는 충분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하나하나 따지고 들어야 한다. 충분한 시간을 갖고 따지고 드는 일은 많은 에너지를 사용한다. 난이도가 있는 대수 문제도 마찬가지다.
수학은 원래 힘든 과목이다. 시간 투자를 할 생각도 없이, 에너지를 사용할 생각도 없이 수학을 잘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문제는 끈기 있게 문제 해결을 하도록 동기유발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이건 수학 외적인 고려 사항이다. 인류 문명의 초석인 수학은 죄가 없으며, 모두 수학을 잘 할 필요도 없다.
학교 수학으로 국한해서 말한다면 수학의 고통을 줄이는 유일한 해법은 난이도를 낮추고 분량을 줄이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의 학교 수학교육은 너무 많은 양의 내용을 다루면서 어려운 문제를 풀게 강제한다.
4. 수학문제를 끈기 있게 풀도록 하는 원동력은 수학에 없다. 문제를 해결한다는 두뇌활동이 소셜 액팅이라는 걸 교사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수학문제를 푸는 과정이 개인적 활동이 아니다. 수학문제를 해결하려는 학생이 가족이든 교실이든 지역사회든 주체가 소속된 커뮤니티 안에서 서로가 얽혀서 함께 이루어내는 활동일 때 수학문제 해결의 에너지를 공급받는다.
나 없는 너가 없고, 너 없는 나가 없다는 개념은 수학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고립된 아이는 수학을 좋아할 수가 없다. 어울리고 기대고 신세지고 타자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애쓰는 과정에 있는 아이는 어울리고 기대면서, 신세지면서, 타자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수학문제를 즐거이 해결한다.
수포자 탈출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 무엇이 선행돼야 하는지 분명해진다. 수학 안에 수학 솔루션 없다. 수학은 사랑하는 대상이지 극복할 대상이 아니다. 누구나 극복할 수 있다면 수학도 아니다.
5. 말하다보니 너무 추상적으로만 서술했다. 문화센터에서 ‘학부모를 위한 수학해법’을 강의했던 경험으로, 대안학교에서 수학교육과정을 개발했던 경험으로, <수학하는 신체>의 저자 모리타 마사오를 초청했던 경험으로 초중고 수학공부에 대해 구체적 활동을 구상하고 있다. 오래 전에 책을 내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글과 그림으로 이루어진 책이 아이들에게 솔루션이 될 수 없다. 이건 커뮤니티 안에서 직접 부딪치고 뒹굴러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