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은 생각한다> 북콘서트에 다녀와서
#봉화에서50일
#6월29일
#존재론적전회
#Ontology_Turn
#북콘서트
#숲은생각한다
#How_Forests_Think
1.
아이들을 송 선생님에게 맡기고 급히 서울로 향했다. <숲은 생각한다> 북콘서트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오로지 북콘에서 오고 가는 말을 듣기 위해 먼 길을 왕복하기로 했다. 그만큼 나는 갈급했다. 책을 읽고 있지만, 에두아르도 콘이 <숲은 생각한다;원제 How Forests Think>를 탄생시킨 맥락을 좇을 수 없다. 어렵다. 다행히 책이 말하는 분위기를 부분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역시 북콘에 다녀오길 잘했다. 2시간 참석으로 엄청난 걸 얻었다. 일단 책의 맥락에 올라탈 수 있었다. 대단한 효율이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영감과 힌트를 얻었다. 돈 주고 살 수 없는 효과다.
2.
갈무리 차원에서 들은 얘기를 기록한다.(메모하거나 빠른 후기 작성이 필수지만 그러지 못해서 유감천만이다. 기억에만 의존해서 적는다)
▲ontology turn(존재론적 전회)은 linguistic turn(언어적 전회)을 패러디한 표현이다. turn을 전환이 아닌 전회(轉回)라고 번역한 것은, 전환이 바뀌어서 다른 존재가 되는 걸 말하는 대신 전회는 바뀌지만 본질의 변화가 아니라 방향을 바꾸어 같은 문제를 대면하는 것을 일컫기 때문이다. (내가 속으로 이해하기로는) 플라톤이 말한 철학의 정의가 “대상을 지적으로 가장 탁월하게 취급하는 능력”이라고 한다면, 20세기 들어 비트겐슈타인 이후 대상을 취급하는 창(窓)으로 사람의 언어를 중심에 두었다는 말이다. 즉 언어를 통해 세계의 본질을 밝히겠다는 발상의 전환이 “언어적 전회”다. 언어적 전회는 그 여진이 지금도 계속될 정도로 지식인 세계에 거대한 지진이었으니, 그 충격에 비견할만한 인식틀의 혁명으로서 존재론적 전회라 명명한 것으로 이해했다. 숙제는 하나 있다. 존재론적 전회가 존재의 전회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존재가 턴을 한다면 죽음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삶과 죽음이 서로 회전문 돌아가듯 회전한다는 말인가. <숲은 생각한다>에서는 우리가 윤회라고 말하는 삶과 죽음의 상호 turn도 언급하고 있다.
▲지은이 콘은 에콰도르 어머니와 이태리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인류학 학위를 받은 콘은 1996년부터 4년 동안 에콰도르 쪽 아마존 지역 아빌라 마을에 살았다. 아빌라를 떠난 후에도 20년 동안 자주 아빌라를 찾았다. 그렇다면 대개 <슬픈열대>의 레비스트로스를 떠올릴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아마존이 오리엔트는 아니지만)에 맞서는 담론을 펼쳤다.
서구의 남미에 대한 차별의 시각은 15세기부터 아메리카 대륙에 들어간 교회 수사들의 기록에서 시작한다. 그들이 기록에 토착민의 식인풍습에 대해 남겼고, 기록내용은 사람을 잡아먹는 풍습을 가진 미개인으로 서구에 아메리카 인디언을 소개한다. (대표적인 예) 500년 동안 아마존 토착민에 대한 오해를 레비스트로스는 르포 형식으로 기록한 <슬픈열대>를 통해 뒤집었다.
콘의 <숲은 생각한다;How Forests Think>는 한 걸음 더 나간 것이다. 아마존의 인간과 비인간(동물 및 식물, 무생물을 포함하여)에 대해 서구인이 현지에서 생활하는 것까지는 같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나 그의 후배들은 description 한 것이다. 이것이 핵심 포인트. description은 작성자의 가치관, 우주관, 세계관이 반영되는 것이다. 관(觀)이 작동하지 않으면 description은 불가능하다. description은 대상에 대해 진행된다. 대상의 존재는 필수다.
콘은 description하지 않는다. 대상화하지 않는다. 대상이 필요하지 않다. 즉 대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차은정 박사는 “세계를 표상한다”고 번역했다.
▲나를 표현하는 것, 나를 통해 세상을 표상하는 것, 나에게 대해 내가 말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데 나를 표현하기 위해, 나에 대해 말하기 위해 ‘너’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 또한 마틴 부버가 소환된다. 부버는 나와 너의 쌍(pair)으로 존재를 강조했지만 <숲은 생각한다>의 컨셉은 “내가 곧 너”라는 발상이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description 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느낀다. 하지만 아마존 사람에게는 언제나 그랬던 것이고, 관찰하고 묘사하는 학자가 아닌 아마존 사람으로 존재한 콘은 description하는 것이 아니라 고백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너가 되고, 너는 내가 되는 형식도 상상할 수 있다.(나로선 상상만 가능하다) 그런 맥락에서 카니발리제인션(cannibalization;식인풍습)을 다시 볼 수 있다. 단순히 바르도가 한국의 보신탕을 비난하는 것에 해명하는 것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보신탕 문제는 관습과 문화의 차이지만 아마존 사람들의 문제는 cosmology(우주론)에 입각한다.
내가 너가 되고 네가 내가 되는 turn은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이건 너를 고려한 사고 전개가 아니라 ‘너’가 돼서 ‘나’를 보는 것이다. 나를 표현한다는 것은 ‘너’의 서술이다. 많이 어렵다. 감이 올 듯 말 듯 하는데, 그런 오리무중이 강한 지적 흥분을 부른다.
▲책의 원제가 How Forests Think가 된 배경을 비로소 이해했다. 내가 숲을 관찰하고 묘사하는 게 아니라 숲이 생각하는 것을 숲이 돼서 말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종국엔 나를 말하는 것이다.
▲번역자 차은정 박사는 아주 흥미로운 얘기를 했다. 유럽의 사회인류학과 미국의 문화인류학이 양분하고 있던 인류학계는 10년 전에 대두한 존재론적 전회에 밀려 모두 고사 직전이라고 한다. 아마도 인류학의 지평은 뒤집어질 것이라고.... 그냥 떠올랐다. 신문이나 고상한 매체에 칼럼을 쓰는 수많은 문화인류학과 교수들이. 더 중요한 얘기는 이것이다.
한국에 아무도(여러 번 강조 했다) 인류학의 새로운 조류, 즉 존재론적 전회에 대해 공부한 사람이 없다는 것. 그리고 존재론적 전회는 인류학이라는 학문적 장르에 가두어진 개념이 아니라고. 당신들이 자기 분야에서 존재론적 전회를 마음껏 활용하라고. 누구의 눈치도 볼 것이 없다는 것. 그깟 대학 교수들 거들먹거리는 것도 존재론적 전회에서 만큼은 없다고. 마음껏 자신의 이야기를 해보라고. 나도 이제 새로운 담론을 공부하려고 하는 입장이라고.
▲기호에 대한 얘기가 중요하다. 이건 내 역량을 넘어서는 문제라 더 공부하고 얘기하겠다.
3.
그러니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해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만나는 일을 10년 동안 했다. 그럼 나는 이 아이들을 이해했는가. 전혀 아니다. 내 입장에서 description 했고, 기술이 곧 처방(description is prescription)이란 아포리즘에 열광하며, 더욱 묘사하기에 열중했다. 그래도 한발자국도 앞으로 가지 못하고 있었다. 답답함이 극에 닿으면서 이제는 은퇴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이번 북콘이 나를 살렸다.
나는 내 얘기를 했어야 했다. 아이들을 만나서 내가 신에 가까운 존재인 양, 마치 힐러인 양 굴었다. 어떤 프로세스를 통하여 비포 애프터가 극명하게 다른 아이를 만들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겉으로는 그런 담론을 격하게 비판했지만) 아이들이 곧 나이고, 내가 곧 아이들이란 생각을 한 적이 없다. 나는 올바르고 저 아이들이 잘못된 것이라 생각했지......
“아이들로 들어가서 나를 표현했어야 했어.”
“상징적인 카니발리제이션이 필요했어. 내가 아이를 먹고 아이가 나를 먹을 수 있게 형식을 마련했어야 했어.”
이런 목소리가 들렸다. 북콘에 가서 미쳐서 득도한 기분이랄까.
적어도 내가 아이를 묘사하려는 시도가 왜 잘못된 것인지 잘 알겠다. 이제는 아이가 곧 내가 되고, 아이를 통해 나를 표상하는 시도가 교육과정의 중심이 되는 길을 닦아야겠다.
교육학적 전회가 아니다. 교육의 전회가 맞다. 큰 숙제를 짊어졌다. 부담스럽기보다는 기대가 크고 흥분된다. 가보자. 이 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