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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달나무 Jul 25. 2017

학교부적응 어린이청소년의 두 가지 유형

오해와 이데올로기 조작의 피해자들

  내가 운영하는 온라인 카페에 입학 문의를 하시는 부모님 뿐만 아니라 살펴보기만 하시는 분들 가운데 아이들 걱정에 시름이 깊은 어른들이 많을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 아이(저 아이)는 왜 그럴까?"

  매 든 손을 내려놓고 아이 입장에서 생각하고 최대한 배려 양육을 이어가지만 답답한 마음은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2500년 전의 공자님에게 제자 자로가 아뢰길 '요즘 젊은이들의 버릇없음'을 개탄했다고 하지만, 2000년 이후로 급증하는 학교(생활) 부적응 어린이 청소년들은 전대미문의 존재들입니다. 단순히 '버릇없음'이나 '껌 좀 씹고 침 좀 뱉는' 아이들로 묘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인도 괴롭고 부모 및 주변도 고통스럽게 하는 아이들을 세밀하게 분류하면 여러 유형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불쾌함을 화폐처럼 가치교환수단으로 사용하는 아이들이고, 또 하나는 정서적 성장이 멈춘 아이들입니다.

  불쾌함을 지불수단으로 사용하는 아이들이란 개념은 前 고베여자대학 불문학과 교수인 우치다 타츠루 선생님의 <하류지향-공부와 노동으로부터 달아나는 아이들>에 나오는 말입니다. 우치다 선생님도 이 개념을 한 고등학교 교사의 저서에서 인용했습니다. 

불쾌함을 화폐처럼 사용한다

  조금 낯선 표현인 "불쾌함을 화폐처럼 사용한다"는 것은 아이들이 불쾌함을 드러내는 것을 마치 등가(等價) 교환을 위해 적절한 돈을 지불한 것과 같다고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만 원을 지불했다면 만 원어치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는 것처럼 소위 '짜증 나(짜증 나)!'를 외치면 상대방이 나에게 짜증 나는 상황을 해소하도록 물적 감정적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표현입니다. 이때 상대방은 가족과 교사를 망라한 내 주위의 모든 사람입니다. 

  이런 어이없는 설명이 적절하게 된 것은 소유욕이 구매욕으로 치환된 현대 사회의 특징에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기업사회로 공고히 자리 잡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권력과 부를 모두 아우르는 기업 입장에서 인간의 소유욕만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피플(people)은 다양한 색깔이 모인 문화공동체가 아니라 소비자로서 단일화돼야 합니다. 갖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사야만 기쁨을 느끼는 존재로 대동 단결해야 하는 것이 기업에게는 필요합니다. 내 것이 되는 만족감은 사라졌습니다. 화폐와 물건이 교환되는 장소에서 구매행위 자체가 희열을 주도록 재구조화된 사회입니다. 

  성장 드라이브를 극대화한 9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서 출생한 아이들이 소유욕을 넘어 구매욕에 헐떡거리는 우리 사회에서 보고 배운 것은 무엇이든 지불하고 등가의 서비스를 제공받겠다는 의지입니다. 그런데 첫 경험의 가족공동체에서 짜증과 불쾌감을 여과 없이 드러내면 가족 구성원은 의무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형태가 많습니다. 부부 사이, 부모 자식 자이, 형제 사이가 상당히 그렇습니다.

  농경사회에서 자식은 생산수단이었고 마을공동체가 양육을 책임지는 형태였지만 현대사회에서 부모의 경제활동과 자식의 성장이 아무런 관련을 갖지 않으면서 아이들은 어른의 장식품이 되었고, 양육의 책임은 부모에 한정해서 짊어지도록 사회적 합의를 이루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필연적 부작용입니다.  에둘러 복잡하게 말할 것 없이 미성년자 자식이 울고 불고 떼쓰면 부모는 전전긍긍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말입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장식품인 자식이 초라해서는 체면이 구겨지는 일이니 앞장서서 과잉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짜증을 내거나 화를 뿜습니다. 부모든 선생이든 친구든 '내'가 화를 냈으니 내 요구를 들어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헐~하는 반응을 보이고 내 맘대로 하면 그만입니다. 누군가 나를 짜증 나게 했다면 그는 '내' 폭력적 요구를 수용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버르장머리 없음은 '얘' 때문일 뿐 내 책임을 끄집어낼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훈계는 훈제요리 닭일 뿐^^ 어른의 계도는 안중에 없는 아이가 됩니다.

  따라서 불쾌함을 화폐처럼 지불하는 아이들이란 표현이 나온 것입니다. 저는 크게 동의합니다. 수십 년 아이들을 만나면서 시기별 아이들의 특징을 살핀 현장 전문가의 입장에서 같은 생각입니다. 우리가 오해하는 것이 아이들의 이런 행동에 들어있습니다. 바로 적절한 가치를 지불했다면 반드시 등가의 무엇인가를 받아내야 공정하다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공정(公正)'이나 '정의(正義)'를 등가교환의 다른 표현으로 인식하는 것이 오해의 핵심입니다. 사회가 건강하려면 대가 없이 주는 증여가 교환의 기본이 돼야 합니다. 나에게 주는 사람과 내가 주는 사람이 달라야 등가교환이 아닌 증여가 됩니다. 아주 오래된 교환의 기본원리가 짧은 시간에 내동댕이 쳐지면서 그 고통을 어린아이들이 받고 있습니다. 어이없는 괴물들이 출현한 배경입니다. 행복지수가 높은 북유럽 국가 부모들이 자식에게 매우 냉정한 양육태도를 보인다는 뉴스를 헤아려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불쾌함을 지불수단으로 이용하는 아이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이거 왜 배워요/이거 왜 해요?'입니다. '이거 왜 배워요/해요'는 교실붕괴의 핵심문장입니다. 교육 불가능의 출발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정서적 성장의 멈춤입니다

  많은 아이들이 가족 이상의 사회를 인지할 나이에 멈춰버립니다. 현실적으로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들어갈 나이에서 정서적 성장을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또는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잘 자라다가 4~5살로 갑작스레 퇴행을 하기도 합니다. 짐작하신 대로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무의식적인 방어기제입니다. 성장한다는 것은 자기 책임을 감당한다는 것인데, 책임이 고통스럽게 느껴진다면 성장하지 않으려 합니다. 영유아 아이는 생존을 위한 본능을 여과 없이 드러내도 양육자의 보호를 받으며, 본인이 공동체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아도 용납됩니다. 

  정서적 성장의 멈춤은 자아의 성장과 사회적 요구가 엇박자를 내기 때문입니다. 서서히 자기 책임을 늘려가면서 크면 성장의 멈춤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 3세 이후로 공교육 시스템에 편입하면서 갑자기 감당하기 어려운 책임을 지게 됩니다. 성장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따라 비언어적으로 개념화되는데(얼마큼 성장했는지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다만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말로 할 수 없는 느낌만이 성장 정도를 나타낼 것입니다) 교육기관의 성적은 숫자와 순위로 표현되는 차별의 다른 말입니다. 성장의 본질에 말살이가 있고 성적의 본질에 글살이가 있습니다. 말살이가 앞장서지 않는데 글살이 위주의 교육환경에서 아이들은 좌절하고 고통당하며 성장하지 않습니다. 바로 아기 짓을 하는 것입니다. 

  정서적 성장이 멈춘 아이들은 연기력이 뛰어납니다. 억양을 아기스럽게 하고 행동도 부주의하게 합니다. 거짓으로! 심지어는 오줌을 싸고 혐오스러운 행동을 천연덕스럽게 합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아이 같습니다. 거짓으로!! 자신의 행동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기기만을 합니다. 자신의 거짓 행동이 거짓이 아닌 진실이라고 스스로에게 거듭 다짐해서 세뇌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이는 진짜 아기가 됩니다.


  간혹 위 두 가지 요소가 복합적인 아이들이 있습니다. 느낌상 점점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왜냐하면 두 요소의 뿌리가 같기 때문입니다. 어린이 청소년은 내일의 주인공이지 오늘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내일의 주인공은 내일을 위해 훈련하고 준비하는 존재입니다. 어린이 청소년은 내일의 주인공으로서 대단히 귀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지금 여기 주인공으로서 귀한 존재인 것처럼 자리매김됐습니다. 내일의 주인공은 내일을 기다려야 합니다. 내일의 주인공이 오늘 주인공을 한다면 정작 내일 주인공은 부재 중일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사람을 소비자 단일 요소로 보기 때문입니다. 노인은 젊음을 바쳐 사회에 헌신한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실버소비자일 뿐입니다. 돈 없는 늙은이는 아무 짝에 소용없습니다. 주부는 노동력 재생의 일등 공신이 아니라 속물적 소비자일 뿐입니다. 돈 없는 주부는 아줌마가 되는 동시에 경멸의 대상입니다. 청년은 예비 사회 역군이 아니라 가장 열렬한 패션 소비자입니다. 돈 없는 청년은 머리도 빈 잉여일 뿐입니다. 어린이 청소년은 내일의 주인공이 아니라 오늘 당장 아동용 소비재의 소비자 주인공입니다. 돈 없는 부모 밑에서 자라는 어린이 청소년은 싹수없는 불량품입니다.


  제가 주로 만나는 아이들은 이런 오해와 이데올로기 조작의 피해자들입니다. 눈물 나도록 안타까운 아이들입니다. 유감스러운 말이지만 부모는 오해의 생산자이자 유통자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 앞에 있는 아이는 어떤 유형입니까. (2014.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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