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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달나무 Jul 23. 2017

영화 <말아톤>을 보다가 '엄마'를 생각하다

엄마들은 힘겹다

  <포레스트 검프>가 2시간 20분 정도의 긴 러닝타임이지만 지지 아이들은 상당히 몰입하여 재밌게 감상했습니다. 마인드맵으로 영화 내용을 정리하고자 하는 의도와 장애인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공유하고자 <포레스트 검프>를 감상하도록 했는데, 아이들이 열심히 보는 바람에 몇 가지 장애인 주제 영화를 보려고 했습니다. 우선 떠오른 것은 <말아톤>. 2005년 개봉 영화라서 대강의 줄거리만 생각나고 자세한 건 기억에서 생략됐는데 아이들과 다시 보다가 아래 장면에서 강렬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가라앉았던 새로운 기억이 올라온 것입니다. 

  그건 2011년 봄부터 초여름까지 6명의 중고등학생과 여수 돌산 교회 수련원에서 2달 반을 지낸 기억입니다. 아래가 당시 쓴 일기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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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우리 아이들의 부모는 그런 생존경쟁에서 승리자이다. 그런 경험이 자식에게 당연히 하나의 길만 기대한다. winner의 길이다. 삶은 winner와 loser로 나눠지는 것이 아닌데, 세상의 모든 것이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로 보인다. 마트에서 올리브유는 카놀라유(보통 식용유) 보다 같은 용량일 때 4배 비싸다. 올리브유는 winner유, 카놀라유는 loser유. 50평 아파트는 winner트, 40평 대 이하는 loser트. 루이뷔통은 winner똥, 짝퉁은 loser 퉁. 벤츠/아우디/베엠베/렉서스는 winner차, 소나타는 소나 타는 loser차로 확실한 각인이다.

  코딱지는 면역물질 덩어리이고 기생충도 인간의 면역체계에 도움을 주는 것이지만 그런 건 loser의 상징이다. 아토피로 고생해도 수백만 원짜리 아토피 전문 화장품을 소비하는 것이 winner 스럽다. 자동차 문명이 앗아가는 억울한 생명에 대해 마음 아파하는 것은 loser의 몫이다. winner는 12개의 에어백이 동시에 터지며 완벽하게 생명을 지켜준다는 포르셰를 사기 위해 목숨을 건다.

  E대 나온 엄마는 위에서 말한 위너냐 루저냐만을 따지는 세계관을 저질스럽다며 경멸하며 자식에게는 명문대 입학을 종용한다. 그것이 자식을 위한 확실한 진로지도라고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자식이 어떤 대학에 가느냐가 엄마 자신의 상황을 결정한다. 위너인가, 루저인가를. 특히 돈벌이하지 않고 자녀교육에 매진하는 엄마들에게는 치명적이다. 더구나 제도 학교에서 밀려나고 대학 입학이 어려운 처지에 내 아이가 놓여있다면? 전업주부 엄마 입장에서는 인생 헛산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천민자본주의 노예가 된 부모가 지금의 아이들을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다. 생존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어른들이 아이들 문제 원인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아이들의 문제는 부모가 아닌 외부 영향과 선천적 성향이 원인이다.

  문제는 엄마 사자가 새끼 사자를 절벽에서 떨어뜨리는 것이 새끼에 대한 사랑이라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엄마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현실도피다. 실제로 사자는 새끼를 절벽에서 밀지 않는다. 강한 놈만 살아남으라고 생존미로에 밀어 넣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과연 우리 아이들 엄마는 정말로 자식을 사랑할까. 그리고 이번 장기 캠프에서 잘 적응하고 쑥 자라서 돌아오기를 진정 바랄까. 너무나 당연히 그럴 것이다. 적응 잘 하고 성숙해서 돌아오기를 바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모르게 정반대 마음도 작동한다고 보았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였으나 아이가 문제 극복을 하지 못한다면, 적어도 엄마의 육아 태도에 원인이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1박 2일의 “나만 아니면 돼” 심리가 60년 대 출생 엄마들에게서 보인다. 잘못된 길을 너무 많이 와버렸다. 돌아가기에 늦었다고 생각될 정도로.(후략) 201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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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엄마일 수도 없지만 장애를 가진 아들을 가진 엄마는 더더욱 간접체험의 영역입니다. <말아톤>의 주인공 초원이는 실제 인물을 모델로 만들어졌습니다. 초원이 엄마의 희생과 역경, 갈등은 조금도 꾸며진 것이 아닌 순수한 진심이지만 마라톤 코치의 대사를 통해서 장애를 가진 아이의 엄마에 대해 재조명을 합니다. 과연 무한 희생의 가족관계를 떠받치는 에너지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적어도 시대에 따른 모성성의 원천은 변해가고 있음이 분명하다는 판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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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코치 : 초원이와 친해지는 게 배 아픈가요?

초원이엄마 : 뭐라고요?

마라톤 코치 : 솔직히 말해봐요. 코치 자리 빼앗길까봐 걱정되냐고요.

초원이엄마 : 제가요?

(중략)

마라톤 코치 : 애가 하루 먼저 죽는 게 소원이시라고요? 당연하지. 왠 줄 알아요? 당신은 초원이 없이 하루도 못 살 여자니까. 초원이가 당신 없이 못 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초원이 없인 하루도 못 살 테니까.

초원이엄마 : 코치 따윈 필요 없어. 내 아들이야. 내 아들은 내가 알아서 가르쳐!

마라톤 코치 : 그러니까 애가 엄마 허락 없인 오줌도 못 누지. 자기가 낳았다고 애들이 뭐 다 자기 건가. 

초원이엄마 : (무척 분해하며) 길러보지도 않았으면서....

https://youtu.be/uerSThsfcXA


  좀 다른 각도에서 하는 말인데, 어떤 엄마든 엄마 역할은 매우 매우 버거운 것이 분명합니다. 엄마들이 차분하게 삶을 복기하며 돌아볼 수 있는 정신적 물질적 여유를 가져야 할 텐데 현실은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2014.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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