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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달나무 Jul 21. 2017

객관적 기준은 없다

평가자는 언제나 주관적이다

  어쨌든 사실입니다.

  지난주 올림픽공원으로 산책을 갔다 오는 길이었습니다. A가 앞에 가던 송선생님과 아이들 앞으로 갑자기 나가더니 돌아서서 바바리맨 놀이를 하는 것입니다. 실제 바바리는 입지 않았으니 바지와 속옷을 내리고 손으로 '거시기'를 잡고 보란 듯이 내민 것입니다. 우리 일행을 뒤따르던 중학교 남학생도 한 명 목격했습니다. 송선생님이 깜짝 놀라 바지를 올렸고, 장면을 목격한 아이들은 호떡집 불난 듯이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변태라고 소리 높여 놀려댄 B는 학교에서 샤워한 후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복도를 휘젓는 놈이고요, 이해할 수 없다고 혀를 차는 C는 실내 워터파크 갔을 때 선생님께 수건을 달라고 알몸으로 탈의실 밖으로 나온 놈입니다. 거기에 급기야 길에서 '거시기'를 밖에 내놓는 A가 나온 것입니다.

  A는 선생님과 주변의 경악에 적응하지 못하는 표정입니다. 그저 일행을 웃기려고 한 행동인데 웃기는 커녕 비난 화살만 잔뜩 날아오니 말입니다. 분위기 업을 위한 살신성인(?)에 경악과 비난이 웬 말인가! A는 눈을 몇 번 꿈뻑이더니 이내 눈가가 촉촉이 젖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을 목격하고 아래의 블로그 글이 생각났습니다. 허락을 받고 옮겨옵니다.(출처 : http://strangerca.tistory.com/1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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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사가 학생을 만나는 접점에서 수평적으로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라는 주장의 <Education 3.0> 주장도 있지만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Education 1.0>입니다. 수평이 아닌 수직이며, 상호가 아닌 일방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만나는 접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른과 어린이 청소년이 만나는 행위가 평가자와 심판자는 어른이고 평가와 심판받는 자가 어린이 청소년입니다.

  이런 어른과 어린이 청소년의 만남을 근대적인 표현으로 교육이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요. 다시 말해 어른은 어린 친구들에게 교육적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평가결과를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평가가 과정의 마지막에 이루어진다고 믿는 것은 착각이거나 의도적 세뇌의 작용입니다. 교육행위가 이루어지는 현장에서 평가가 시발입니다. 평가의 기준은 어른이 가지고 있고, 어린이 청소년에게 기준을 공개하지 않고 평가합니다. 결국 아이들은 기준을 모른 채 평가당하고, 결과 통보를 받고 나서야 기준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됩니다. 그 아이는 자라서 다음 세대에게 마찬가지로 평가기준을 사후 통보합니다. 어른의 노련함과 미성년자의 미숙함은 나이에서 오는 경험의 차이가 아니라 모두가 모른 채 눈감고 합의한 기준의 사후통보 때문이고, 그로 인해 어린이 청소년에 대한 탄압이 교묘하게 정당성을 갖는 것이 아닐까 상상해 봅니다. 

  "평가해 보니까 너는 미성숙하고 모르는 것이 많아서 내가 알려주마. 모르는 너는 내가 하는 말에 복종하고 알 때까지 나대지 말고 무조건 받아들여라"

  이것이 세대 간 암묵적 합의라 할 수 있습니다. 

  가르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가르치지 않아도 때가 되면 저절로 아는 것도 있겠지만 그것은 새가 날갯짓을 하거나 지푸라기를 물어다 둥지를 짓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사람이 사람답기 위해 배워야 하고 선생은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그냥 가르쳐주면 안 되는 것일까요. 선생은 이미 가지고 있는 자신의 기준을 들이대고 가르쳐주고도 양호인지 불량인지 구분하려고 듭니다. 마치 위 블로그 글에서 노숙자에게 몇 푼 주는 것이 그저 한심하다고 비난하는 내 생각에 면죄부를 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가르치면서 될 놈인지 안될 놈인지 가리고 안될 놈을 한심하다고 비난하는 선생과 부모가 대부분인 현실입니다.

  어린이 청소년은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어른이 도움을 줘야 합니다. 어린이 청소년은 도움을 받는 것이 당연한 존재입니다. 어떤 조건에 따라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도움에서 소외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지지학교에서 제가 만나는 아이들은 어른의 일방적 평가에서 나쁜 결과를 받았다고 도움이 거두어진 경우입니다.   결과의 양호와 불량에 대한 판단도 철저하게 어른들이 결정하면서 말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도움의 그물망 바깥으로 내몰렸습니다. 바지를 내린 행동에 대해 마땅히 경악해야 한다는 행동지침을 가지고 있는 것은 어른일 뿐이고 A에게는 통보되지 않은 기준입니다. 긴장하면 생각의 회로가 멈추기 때문에 시험지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해서, 화가 나니까 어른 흉내를 내면서 욕을 한 것인데, 설교식 수업이 따분해서 교실 반대편에 앉은 절친과 얘기를 하려고 일어나 움직였다고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자기 위주의 기준으로 평가합니다. 평가결과를 가지고 먼저 도려내서 배제합니다. 

  세상에 어른이 도움을 주기에 꺼려지는 어린이 청소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괘씸하고 한심한 아이들은 어른의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판단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아이들을 단죄할 객관적 기준이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A에게 길에서 바지를 내리는 행동이 상대방에게 어떤 마음의 충격을 주는지 알려줬습니다. 그것은 농담을 던지는 일과 구분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A는 이해했고 앞으로 그런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A가 다시 같은 행동을 한다면 그건 또 다른 차원에서 고민할 것인데, 25년 아이들을 만나면서 단 한 아이도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2014.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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