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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달나무 Jul 25. 2017

각종 치료가 소용없는 이유

주류 심리학의 허점

  2007년 이후로 학교 교사가 아닌 교육 상담소나 대안학교 운영자로서 수많은 학교 부적응 아이들을 만나왔습니다. 나를 만나기 전에 대부분 아이들은 병원의 진단을 받아 약물을 먹고, 주 1회 심리상담소 선생님과 60분 미팅을 하고 놀이치료나 사회성 치료를 별도로 받는 경우였습니다. 5년 이상 같은 치료 패턴을 유지한 아이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차이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언젠가 좋아지겠지 하는 바람과 약물 및 심리치료에 불만이 있어도 그 이상 대처할 새로운 대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기약 없이 패턴을 유지합니다. 그러다가 아이가 심각한 부작용을 보이면 어쩔 수 없이 치료를 중단합니다. 그리고 저를 찾아옵니다.


  병원 및 심리상담소가 진행하는 치료 프로그램은 주류 심리학을 배경으로 합니다. 주류 심리학은 심리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대부분 공유하는 학문적 방향성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육체와 정신이 한 몸에 있지만 육체와 정신으로 분리해서 고찰할 수 있고, 따라서 홍길동의 고유한 육체가 있는 것처럼 홍길동의 고유한 정신이 따로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홍길동의 고유한 정신은 타인의 정신과 구분되는 홍길동만의 소유이며 홍길동 두개골 안에 있는 뇌의 활동에 따라 생기는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탄생 이후 육체가 점점 커지는 것처럼 정신도 나이에 따라 일정한 범위 안에서 성장하고 개인에 따른 정신적 기능이 발달한다고 주장합니다. 발달 정도에 따라 개인마다 개별적 지능을 획득한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나이에 현격한 지능의 차이를 보인다면 천재이거나 발달장애를 겪는다고 봅니다.


  ADHD를 가진 아이는 뇌 속의 알 수 없는 내분비선의 교란에 따라 개인이 자기 자신의 행동을 제어하지 못하는 병에 걸렸다고 보는 것이 의료계와 주류 심리학의 견해입니다. 주류 심리학의 주장이 모두 터무니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주류 심리학의 관점은 ADHD를 포함한 학교 부적응 어린이 청소년의 개인적 변화에 초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행동특성을 보이는 개인이 원인을 안고 있으며 따라서 행동의 책임을 개인 당사자가 져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어느 누구도 치료 효과를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치료하는 사람은 치료를 받는 사람이 정신적 오류를 갖고 있다고 보지만 정작 문제행동을 보이는 아이는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사람의 마음을 통제, 생성, 변형하는 약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한 심리치료는 치료받는 사람이 치료하는 사람의 얘기를 받아들여야지만 성립할 수 있습니다. 문제행동을 보이는 아이가 자기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억울한 입장이라면 상담치료사와 미팅은 아이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자리 이상이 아닙니다. 상담사는 이야기를 성의껏 들어주니 아이의 마음이 편안할 가능성은 있습니다. 상담사의 역할은 계속해서 '너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거야'를 반복하여 아이의 행동이 잘못된 것임을 주지 시키는 작업에 머뭅니다. 아이는 끊임없이 억울하다는 것을 주장하는 평행선을 달리게 됩니다.


  주류 심리학은 심리학을 실험과학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조건 통제를 하여 실험자가 같은 조건에 처하면 같은 행동을 보인다는 믿음 위에 성립합니다. 특히 어린이 청소년은 상과 벌을 적절히 사용하여 일정한 방향으로 행동을 유도할 수 있어서, 경우에 따라 우등생과 열등생을 실험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다릅니다. 주류 심리학의 주장은 수많은 허점이 있습니다. 허점의 증인은 제가 만나는 아이들입니다. 


  하나의 예시를 들어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며칠 전 경험한 것입니다

  유치원 아이들이 활동하기 위해 동네 야산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한 줄로 앞사람 뒤통수를 바라보며 가깝게 서 있고 맨 뒤에 선생님이 섰습니다. 선생님 바로 앞 어린이가 몸을 건들거리며 앞사람과 부딪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선생님은 곧바로 건들거리는 아이 행동을 제지했습니다. 제지당한 아이는 짜증을 내며 변명을 했습니다. 

  "얘가(앞 아이가) 나랑 너무 가깝게 섰다구요."

  처음 보는 아이지만 선생님과 부모님을 힘들게 하겠구나 싶었습니다. 변명이 궁색하고 즉흥적이며(억지로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임기응변에 강하고) 변명 늘어놓기가 몸에 배어 있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변명을 한 아이의 주장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어떤 맥락도 없이 "① 줄을 섰다. ② 내가 몸을 흔들었다 ③ 앞사람과 부딪쳤다." 세 가지 상황만 배치하면 몸을 흔든 것보다 앞사람과 간격 조절 실패가 몸이 부딪친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는 그렇게 믿어버리며 선생님의 지적이 강하면 강할수록 믿음의 강도도 단단해집니다. 그리고 선생님(부모님)과 갈등이 심할수록 아이는 권력을 획득한 기분을 느낍니다. 어른(부모/교사)이 자신에게 지적과 훈계를 할 수 있는 권위를 부정함으로써 평등 관계를 이룬다고 생각합니다. 평등 관계는 불쾌함을 지불하여 어른에게서 등가(等價)의 서비스를 제공받는 토대를 마련합니다. 거꾸로 어른의 권위에 머리 숙인다는 것은 아이 자신이 불쾌한 감정을 내뿜어도 아무런 대가를 받지 못하는 상황을 말합니다. 그러니 앞의 예시에서 말한 타인에게 원인이 있다는 믿음이 점점 강해지는 것이며 결국 자신은 언제나 옳다는 신념을 확립합니다.

  이런 아이들을 일주일 60분 정도 대화한다거나 약물을 먹인다고 전혀 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른에 대한 권위 부정은 아이들 입장에서 생존의 최소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나 교사, 상담사의 말에 귀 기울이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일입니다. 그 누구도 명분을 내세우며 죽음의 길로 걸어 들어가지 않습니다. 매우 극단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이 아닌 보통의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렇습니다. (2014.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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