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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규 Apr 11. 2019

배움여행 3호 마중물

학습에서 능력은 과연 무엇인가


“하고 싶은 것이 있다.”

“어떻게 하면 할 수 있을까?”

“이렇게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자, 그럼 그것을 먼저 시작해 볼까?”     


대화 같기도 하고 독백 같기도 한 위 네 개 문장을 되뇌며 흐뭇해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흐뭇함은 성장하여 설렘과 희망이 되었습니다. 시작은 2011년 12월입니다. 박동섭 선생은 민들레출판사에서 비고츠키심리학을 소개하는 강의를 개설하고 익년 1월 말까지 6강을 진행했습니다. 이 강의는 3달 후 다시 업그레이드 강의로 이어지고 에듀니티 행복한연수원에서 촬영 후 편집을 거쳐 “비고츠키 인간철학과 또 하나의 심리학” 직무연수 온라인 강좌로 재탄생합니다. (현재도 수강신청을 받고 있으니 전설로 내려오는 박동섭 선생의 온라인강의를 수강하시라 권합니다)

위 네 개의 문장은 박동섭 선생이 자신의 논문 <마리는 과연 요리를 만들었는가>를 소개하면서 알게 된 것입니다. 네 문장만으로 교육과정계획서가 가능하고 수업 지도안을 충분히 대체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현상은 현재진행형입니다. 그것은 당시 공교육교사였다가 대안학교 교사로 일하는 제가 늘 고민하던 문제, ‘어떻게 학생들에게 능력을 심어줄 것인가?’에 대한 혁명적 전복(顚覆)입니다. 전복은 언어적 전회로, 비고츠키 심리학으로, 오자와 마키코로, 우치다 타츠루로, 해럴드 가핑클로, 모리타 마사오로 진화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 배움여행으로 수렴된 것입니다. 따라서 박동섭 선생이 허브 역할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로는 메리토크라시 사회라고 선전하는 한국에서 메리트에 해당하는 능력(요즘은 역량이라고 제시하면서 적나라하게 양적인 개념을 결합시켰습니다만)에 대한 해명 없이 교육문제가 개선될 가망성은 없지 않은가 오래 고민했습니다. 그런 고민의 시발점인 <마리는 과연 요리를 만들었는가> 논문을 에세이로 각색한 원고를 실었습니다.

지난 2호에 100년 전 3.1운동 당시 서울 4대문 안 풍경을 잘 보여주는 당시 보성학교 18세 학생(박래원)의 글을 발굴하여 실었습니다. 이번호에는 1960년 4월의 서울 4대문 안 상황을 보여주는 경기고등학교 18세 학생(박명도)의 일기를 발굴해서 소개합니다. 광화문 및 인근에서 일어난 사건으로서 100년 전 항쟁과 60년 전 항거, 지금의 촛불혁명으로 불리는 군중집회를 연결하면 놀랍게도 아주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박명도는 박래원의 막내 아들입니다. 아비의 3.1운동과 아들의 4.19학생혁명의 연결점은 유전적 관계를 넘어 역사에 투영됩니다. 그래서 매우 엄중하게 느껴집니다. 지난 100년을 돌아보고 앞으로 100년을 내다보는 자료로 활용되기 희망합니다.

윤진 선생님의 노고로 작년 11월 우치다 타츠루의 아산 강연을 지상중계합니다. 또한 지난 1월 교토에서 모리타 마사오 선생이 자신을 찾아온 한국인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수학연주회 실황도 보여드립니다. 정하얀 선생님이 가독성 높게 재편집했습니다. 좋은 기운을 이어서 배움여행에서 5월11일(토)~12일(일) 제주에서 모리타 마사오의 수학연주회를 마련했습니다. 제주에 계신 분들은 기회를 놓치지 마시라 당부합니다. 특히 5월11일 애월읍 유수암리 누리터(옛 금덕분교 자리)에서 열리는 수학연주회는 초등학생부터 성인까지 다양한 연령의 청중을 모시고 진행합니다. 흥미진진을 넘어 신선함과 감동을 선물할 것입니다.

아고라 투고해주신 선생님 두 분이 모두 수학 선생님이지만 이동흔 선생님은 어린왕자와 연결한 창의적 발상이 돋보이고 푸른숲발도로프학교의 김진형 선생님은 역사와 연결된 수학의 얼굴을 소개해주어 수학의 지평을 넓혀주었습니다. 

변은경 선생님의 마녀일기는 계속됩니다. 주욱∼

앞서 능력에 대한 사회과학적 고찰이 중요하지 않을까 말을 꺼냈는데, 2012년 6월에 박동섭 선생과 저의 방문을 반갑게 맞아준 우치다 타츠루 선생이 당시 블로그에 올린 글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능력을 양적으로 표현하려고 할 때 일어나는 일을 잘 보여주는 글입니다. 우치다 선생이 글을 올리자마자 박동섭 선생이 제게 보여준 글을 보관하고 있다가 여기에 꺼내놓습니다.

4월은 세월호 학생들의 희생으로 가슴 아픈 달입니다. 벌써 5년이 흘렀습니다. 배움여행은 언제나 잊지 않겠습니다. 진상규명을 강력히 촉구합니다.


한국에서 손님들이 왔다. 신라대학의 박동섭 교수와 단재학교의 박준규 선생님, 그리고 그의 아들로 히토츠바시 대학에서 유학 중인 솔바로 군과 그의 일본인 친구 한 명.

박동섭 교수는 ‘스승은 있다’의 번역자이다. 박준규 선생님은 ‘하류지향’을 읽고 무릎을 치고 또 치고(정말로 친 것 같다) 너무 쳐서 무릎이 아픈 나머지 그 후에 한국어판 우치다 책을 차례차례 읽기 모임에서 선정해서 동료들과 읽었다고 한다. 박동섭 교수는 앞으로 ‘저잣거리의 교육론’ '저잣거리의 미디어론‘을 연이어 번역 출판하고 싶다고 한다.

이웃나라에서 자신의 책이 읽히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긴 한데 그것은 뒤집어 말하자면 일본과 똑같은 문제를 한국사회도 안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의 일본과 비슷한 수험경쟁, 학력사회이다.

고학력을 손에 넣는 것에 마치 목숨을 거는 것처럼 달리는 사회이며 졸업증명서의 종류에 따라 장래의 수입과 지위가 결정되는 사회이다. 그 덕분에 아이들은 일시적으로는 매우 활발하게 공부를 하게 된다. 하지만 어느 단계에서 아마도 일본에서 일어난 것처럼 아이들은 ‘딱’ 학습하려는 노력을 멈추고 만다. 이번에 오신 한국 손님들이 위기감을 갖고 계신 것은 이미 그러한 징조를 한국 내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교육의 목적을 경제적인 우위성을 확보하는 것에 한정시켜 버리면 반드시 교육 과정 그 자체 안에도 효율화와 경제합리성과 비용 대 효과와 원가율과 같은 개념이 여지없이 침투한다. 반드시. 그때 아이들은 ‘최저의 학습노력으로 최대의 학력을 손에 넣는 방법’을 다투게 된다. 비즈니스맨들이 가장 싼 코스트로 가장 이익 폭이 큰 상품을 팔려고 하는 것과 똑같다.

아이들은 학점이든, 성적이든 졸업증명서이든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한 ‘미니멈의 학습능력’을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곧바로 미니멈이 고정치(固定値)가 아니라 동학령 집단의 학력의 함수라는 것을 자각한다. 즉 모두가 매일 집에서 공부를 5시간 한다고 하면 미니멈은 5시간이지만 모두가 1시간이면 미니멈도 그것과 연동하게 된다. 모두가 5시간 공부할 때에 상대적 우위에 서기 위해서는 6시간, 7시간의 학습이 필요한 셈인데 모두가 1시간 공부를 한다면 2시간으로도 우위에 설 수 있다. 그래서 영리한 아이들은 곧바로 주위 아이들의 학습의욕을 떨어뜨리게 하는 것이 경쟁적 환경에서는 자기노력보다도 압도적으로 비용 대 효과가 좋다는 것을 자각한다.

주위 아이들의 학습의욕을 떨어뜨리는 방법은 몇 가지 있는데 가장 유효한 것은 ‘교육과정은 실은 그대로 경제활동이다’라는 설명을 강조하여 아이들이 학교교육에 대해서 냉소적인 태도를 갖는 것을 기본으로 삼게 한다. 학습이 경제활동이면 최소의 학습노력으로 최대의 이익을 올린 아이가 ‘가장 영리한 아이’로서 칭송을 받게 된다.

3분의 2 출석과 60점이 필요한 교과에서는 그 미니멈을 핀포인트로 꿰뚫은 학생은 해당 교과에서 만점을 받은 학생보다도 ‘우수’한 것이다. 이것은 비즈니스맨이 갖고 있는 ‘최저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목표로 하는 멘탈리티와 동일하다. 이것은 대학이 ‘조성금의 감액분을 최소화하고 나아가 수업료를 최대화하는 입학자수’를 목표로 입시의 합격과 불합격 판정을 할 때의 논리와 동일하다.

그러다 보니 부모도 교수도 미니멈을 노리는 학생을 상대로 이것을 제지할 논리를 갖고 있지 못하다. 땀을 흘리면서 꾸준히 일하는 사람보다 키보드를 탁탁 두드리고 수 분 만에 수십억 원을 버는 사람이 ‘영리하다’는 규칙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을 때에 아이들이 ‘왜 자신들한테만은 다른 룰이 적용되는거야?’라고 항의를 해 오면 그들에게 학습하는 것의 ‘본질적인 중요함’을 설득시킬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학생들은 미니멈을 노리고 있긴 하지만 물론 그 노림은 종종 빗나간다. 그것은 ‘60점이 합격 최저점수일때 65점을 받는’ 형태로 빗나가는 것은 예외이고 ‘60점이 최저점수일때 55점을 받는’ 형태로 빗나가는 것이 ‘보통’이다.

한 학급의 반 이상이 최저점수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 교사에게는 그러한 학생의 낙제가 허용되지 않는다. 교장으로부터 해당 교사는 “도대체 당신은 어떤 수업을 하고 있는 건가요”라고 교수 스킬이 부족하다고 질책받고 ‘재이수 학급을 위한 교실의 여유도 없고 교사를 이 이상 늘리는 것도 예산이 부족하다’와 같은 이유로 “55점이라도 패스시켜 주세요. 그만하면 됐지 않습니까 5점 정도” 라는 식으로 설득당하게 된다.(말투가 미묘하게 리얼한데 이것은 내가 교무처장이었던 것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그만하면 됐지 않습니까 55점이라면” 은 금세 다음 학기에는 “그만하면 됐지 않습니까 50점이라면”이 되고 순식간에 “그만하면 됐지 않습니까 30점이라면” 같은 식으로 하향 수정의 길을 걷게 된다. “미니멈이 하향 수정되었다”라는 것에 관해서 학생들의 정보수집력은 아주 높다. 그리고 단기간 내에 대학의 정기시험의 난이도는 중학생 수준까지 떨어져 버린다.

경제적 합리성에 의해서 아이들을 학습시키려고 하면 어느 단계부터 아이들은 급경사길에서 굴러떨어지듯이 학습의욕을 상실하고 ‘누가 가장 무지하고 무교양이면서 최고 수준의 학력을 손에 넣었는가’를 겨루게 된다. ‘누가 가장 바보인지’를 겨루게 된다는 말이다.

기묘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학교 교육에 시장원리를 가져온 것의 악마적인 당연한 귀결이다. 그것이 세계에서 가장 빨리 가장 병적으로 일어난 곳이 일본이다. 과거에 세계에서 가장 근면하였던 일본의 아이들은 교육의 시장화와 더불어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공부하지 않는 아이들이 되었다.

‘교육의 시장화’가 진행되는 나라에서는 머지않아 언젠가는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현재 한국에서는 아마 그러한 사태가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언젠가 중국에서도 싱가포르에서도 말레이시아에서도 베트남에서도 똑같은 학력붕괴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일본에서 학력붕괴추세가 어디서 ‘밑바닥’을 치고 V자 회복하게 될는지 나는 예측조차 할 수 없다. 내가 아는 것은 문부과학성과 중앙교육심의위원회와 국가전략화의 같은 ‘교육의 시장화’를 추진하는 세력의 영향을 완전히 차단한 형태로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장이 지금 일본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나고 있을 것이고 생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뿐이다.

2019.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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