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스로 스키핑

2018.5.10

by 박달나무

#마드리드에서_부르고스_버스로이동
#부르고스대성당잠깐구경
#에어비앤비로_아파트통째로얻음
#마트에서먹을거리쇼핑
#우연히디즈니음악회참석 #행복한시간
#오늘은편안하고내일부터고행시작

마드리드에서 부르고스를 고속버스로 이동....2시간 반 걸린다. 하늘은 높고 파랗다. 벌판은 끝이 없고 한낮에 18도 안팎 기온이다.
낯선 풍광이라 지루하지 않다. 마드리드가 위도 40도였고 부르고스는 42.3도....백두산 천지의 위도보다 약간 북쪽이다. (현재 밤 9시40분인데 이제 어스름하다)
버스 밖 풍경이 드넓은 벌판에 약간의 구릉지대라서 돈키호테의 긴 창이 떠올랐다. 서양의 전투는 벌판에서 집단으로 부딪치는 형태라 투구를 쓰고 긴 창을 든 기사의 모습이 탄생했다. 반면 산악지대인 동북아 지역에서 거추장스런 투구를 쓰고 긴 창을 든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 조상들은 재빠른 행동전환이 필요한 전투복과 검(劒)으로 진화했다. 땅의 모양과 성질에 따라 사람들 삶의 무늬(人紋)가 다르고 그에 따른 人文의 태도도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쓴 것은 1605년. 세익스피어가 동시대 인물이다. 조선은 임진왜란 직후 광해군이 즉위할 때다. 네덜란드는 세계 최초로 주식회사 형태로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영국의 동인도회사와 경쟁을 벌이는 시기였다.
돈키호테의 무대인 라만차는 마드리드의 남쪽 벌 판이지만 겉보기에 내가 지나가는 아란다데 두에고(Aranda de Duego)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임진왜란의 후폭풍으로 왕은 조롱의 대상이 되고 백성들 삶이 파탄날 때, 유럽은 구텐베르크 금속활자 이후 장삼이사들이 소설을 읽으며 거리에서 걸어다닐 정도의 환경이었다. 민간 인쇄소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저자거리의 서점이 인기를 끌었다면 조선은 앞선 금속활자의 발명을 중앙권력이 독점하면서 정보와 지식을 민간에 전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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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차이가 뼈아프다. 인쇄술의 발달로 중세가 붕괴됐는지, 한반도에서 중세 봉건의 생명을 연장했는지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그래서 어쩌라구~) 권력은 인민이 지식을 공유하는 걸 원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것이 지금도 유지되는 전통이라면 곤란한 일이다.(싸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더구나 교사라면 더욱 더)
중세 말기의 유럽은 금속활자 발명 이후 라틴어에서 벗어나고 민간의 텍스트문화가 꽃 피면서 지식의 양도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동시에 지식의 평준화도 이루어진 경우다. 그거야 그냥 그런 거다.
문제는 우리의 경우 근대 이전에 귀족의 지식 독점과 그를 위해 국가권력이 동원된 것은 과거 역사로서 인정하지만 지금도 달라진 바가 없다는 사실이다.
내가 근현대사가 제거된 교과서로 국사를 배운 것과 <근현대사> 제목의 고등학교 교과서가 존재하는 교육과정에서 공부한 20대의 학습 내용이 다르지 않다. 매우 심각한 일이다. 예를 들어 올해 제주 4.3 70주년 기념공식 행사에 제주의 고등학생들이 큰 역할을 했다. 제주문화예술회관 앞뒤 마당에 고등학생들이 수많은 천막을 치고 다양한 활동을 진행했다. 하지만 역사의 분노가 당연한 기념식 날, 마당의 분위기는 지역국지의 봄맞이 꽃축제와 다르지 않았다. 퀴즈대회, 페이스 페인팅, 청소년 오케스트라 연주회, 청소년 다큐영화 동아리의 작품상영, 즉석에서 만들어 놀 수 있는 장난감 소품 조립 등으로 각 부스를 꾸몄다. 미완의 4.3, 진실규명이 부족하거나 왜곡된 4.3을 70년이나 땅 속 깊이 매장했다가 이제야 비로소 꺼내면서 "분노"의 정서를 폐기하는 것이 조건이라면 역사적 지식은 여전히 죽어 있다. 죽어서 썩은 사체를 제공하면서 먹고 배를 채우라는 말과 같다. 먹을래야 먹을 수 없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적어도 패기의 남여 고등학생들이 일주일은 휴학을 하고 깃발을 들고 제주 전역을 하나하나 발로 밟으며 서북청년단과 일제에서 유임된 경찰을 규탄하고, 남쪽만의 총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토론회를 각지에서 주선하고, 살육의 현장을 재현하며 눈물을 흘려야 하지 않는가.
4.3은 하나의 예일 뿐이다.
급하게 결론으로 건너뛰자면, 여전히 우리의 권력(대대로 세습하는 삼성을 대표로 한 자본권력)은 학습하고 지식을 공유한 인민대중을 반가워하지 않는 게 확실하다. 반갑지 않는 데서 끝나지 않고 지식의 평등을 적극적으로 가로 막고 있다. 삼성이 관제데모를 위해 어버이연합 같은 또라이 집단에게 일년에 수억 원을 지원하는 것이 증거다. 삼성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NCS같은 지표를 설정하고 국가단위 교육과정에도 콘트롤타워 역할을 하고 있다.
학교 교사가 그런 자본의 의도와 기획에 마름 역할을 하고 있다. 개개인 교사는 억울하거나 최소한 그 정도의 적극성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교사에 대한 공격도 폄훼도 아니다. 교사의 의식화는 필수적이고, 교사의 공부는 일반적인 대학원 수업과 완전 다른 결이어야 함에도 일단 교사들이 잠자고 있다. 과거의 10대, 현재의 10대, 미래의 10대 모두 탈정치의 이름표를 달고 바보가 되었/되거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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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해력 저하와 미디어의 변신과 4차산업혁명을 운운하는 것부터 탈정치의 우민화이다. 원인이 뭐냐도 살펴야겠지만 과거, 현재, 미래의 10대들이 지식을 가슴에 안아야하는 사명에 대해 교사들은 동의하고 절치부심, 와신상담해야 하지 않을까.
사실 한국의 학교와 교육은 지금이 가장 정치적이다. 촛불 이후가 '탈정치' 이름표를 달고 가장 정치적으로 편향된 수업을 하고 있다. 눈물과 공감과 분노를 제거했기 때문이다.
아직 눈물 흘리며 공감하고, 그 바탕으로 분노할 일이 차고도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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