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5.11
출발이 늦었다. 9시반부터 걷기 시작~
6시간이 걸려서 20.3 km을 걸어 오르니요스 델 카미노의 알베르게에 들어왔다.
사립 알베르게는 이미 만석.... 시립 알베르게의 남은 다섯 자리가 아니었다면 아주 곤란한 경우를 겪을 뻔 했다. 역시 난 운이 좋은 사람이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스맛폰은 바깥 기온이 5도에 불과하다고 알려준다. 낮최고 기온은 18도다. 하늘은 높고 햇살은 부드럽다. 걷기에 최상의 날씨다. 하지만 역시 아이들은 힘들어 한다. 과체중에 한번도 경험하지못한 20km 걷기는 무리가 있다. 천천히 걸었다. 오라는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해진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천천히 걷고 많이 쉬자."
이렇게 마음 먹었지만 알베르게 숙소를 구하지 않으면 낭패를 보기에 적절한 거리를 적당한 속도로 걸어서 예측가능한 스케줄을 짜야할 필요가 있다.
힘든 아이를 응원하는 차원에서 농담을 던졌다.
"너희들 '눈썹을 휘날리며'라는 말 들어봤어?"
"그게 뭔 말인가요?"
"무척 빠르다는 표현이야"
"그런데요"
"'눈썹을 휘날리며'보다 더 빠른 표현이 뭔지 아니?"
"제가 알리가 있나요"(만사 냉소적인 척 하는 녀석)
"응... 그건 '좆털을 휘날리며'인 거지"
여기서 일단 빵 터짐이 있어야 했다. 이 녀석들은 중1 나이 소년이다. 맥락 없이 '좆털' 소리에도 깔깔대야 맞다는 게 내 '기억'이다. 하지만 두 녀석은 묵묵부답. '좆털'의 이미지 형성이 안되고 있다. 할 수없이 격 떨어지는 '고추털'로 바꿔말했지만 여전히 관심 밖이다. 아직 2차성징 조짐이 없는 아이들이라 자신 안에 스키마가 없다.
분위기 다운을 극복하고 정보전달로 급변경~
풀밭에 앉거나 눕지 말아라/진드기가 옷이나 배낭에 붙어와서 물면 심한 가려움이나 세균감염도 일어난다/한국의 경우 휴전선 근처에서 들쥐가 유행성출혈열 바이러스를 옮기는데, 풀밭에 누웠던 군인들이 종종 유행성출혈열에 걸린다/죽을 수도 있는 무서운 병인 유행성출혈열은 초기에 심하게 좆털이 가려운 증세가 있다/가려움을 참지 못한 환자가 속옷에 손을 넣고 심하게 긁으면서 미친 듯이 뛰어다니기 때문에 '좆털을 휘날리며'란 말이 생겼다. 끝.
내 말을 열심히 듣던 한 녀석이 왈,
"그래서 우리 아빠가 자주 손을 넣고 긁을까요?"
흐이구.... 농담도 쿵짝이 맞아야 한다^^
좆털 휘날린다는 얘기는 꼭 40년 전 내가 중2 때 <승공통일의 길>교과를 담당한 박성기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한 말이다. 박성기 선생님이 일주일에 한번 들어오는 수업을 학생들은 손꼽아 기다렸다. 까까머리의 소년들이 까만 교복을 입고 60명이 앉아있는 교실을 박성기 선생님은 쥐락펴락했고, 언제나 학생들은 배꼽을 잡고 데굴데굴 굴렀다. 야한 개그가 아닌데 임성훈(현재 전문 MC)이 tv에서 "다시합창합시다"를 적은 가로 배너를 가지고 나와 "거꾸로 읽어봐도 다시합창합시다!"라며 너스레를 떠는 것이 Gag라고 하던 시대에 박성기 선생님의 입담은 외계인 수준이었다.
승공통일의 길이 교과목이던 시대에 박성기 선생님은 서울대 사대 윤리교육과를 나와서 처음 교사 생활을 내가 다닌 중학교로 온 것이다. 교과서의 어떤 내용도 수업으로 옮길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초근목피에 의존하는 북한 동포라고 교과서가 말하지만 팩트는 당시 북한 GNP가 남한 보다 높았다. 내가 선생이라도 정말 하기 싫은 수업이다.
박성기 선생님은 내게는 최고의 은인이다. 선생은 언제나 말초신경 아슬아슬한 얘기로 40분을 채웠고, 5분을 남기고 나를 불렀다.
"야, 박준규 이제 니가 마무리해라"
나는 벌떡 일어나 당일 진도에 해당하는 교과서 텍스트를 읽고 한 두 줄 정도로 요약해서 말하고 앉았다. 내가 교과서를 미리 읽는 일은 없었다. 언제나 즉석에서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해야 했다. 그렇게 50번의 읽고 요약하기를 하니까 상당한 내공이 쌓였다.
그리고 40년이 지나도 생생한 기억 속에 살아 있다. 나는 교사로 수업을 진행하면서 늘 박성기 선생님을 떠올린다. 특히 수업이란 무엇인지 진지하게 얘기하는 자리나 관련 책을 보면 참고자료로 박성기 선생님을 소환한다.
다음 학교로 옮기면서 교직을 떠났다는 박성기 선생님이 70 가까이 되셨다.
만나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