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온 알베르게의 비빔밥

2018.5.12

by 박달나무

#오늘도20km

#아이들이빠르게적응

#아동발달이론은모두폐기하고재탐구해야

통증은 신경 작용이고, 고통은 대뇌의 작용이라더니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 600km(쌩장부터 풀코스는 800km)는 통증은 없고 고통이 있다. 약간의 통증도 있겠다. 통증은 매우 미미하고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고통의 진폭이 크다.

내 경우는 동행자의 관계에서 오는 고통이다. 동행자를 온전히 보살펴야 하는 경우고, 동행자의 실수나 몽니를 감내해야 하는 조건이 고통을 준다. 반면 동행자가 주는 행복감(만족감)도 매우 크다. 행복감이 고통을 커버하지 않는다면 순례길 걷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고통은 심리의 영역이라 생각하면 어린 동행자와 관계에서 오는 고통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내 부덕의 소치로 느껴지니 말이다.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걸음 더 나가면 심리적 고통과 물리적 통증을 구분하는 게 가능한가, 그런 구분이 나와 타자에 대한 알아차림에 어떤 효용성을 가질까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아이들과 가깝게 지내보니 고통과 통증은 다중캐릭터를 가진 동일한 주체라는 생각이다. 좀 다른 얼굴로 현화될 뿐 같은 사람으로 보인다. 문제는 하나의 주체로 두 얼굴을 갖다보니 고통이 통증으로, 통증이 고통으로 서로 자리바꿈을 한다는 것.

아이들 경우 심리적 고통이 신체의 물리적 변화를 쉽게 불러온다. 흔한 예가 학교 가기 싫으면 실제로 배가 아파오는 것이다. 좀 심한 예도 있다. 신체 경련이 일어나거나 원형탈모가 실제로 일어난다. 더욱 심한 경우는 천식을 일으키거나 소화기 계통에 궤양이 일어나기도.... 더 극단적인 것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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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실랑이를 하다보니, 심리적인 부담감이 몸을 아프게 만들기도 하고, 약간의 신체적 통증(생전 1km 걷기도 해보지 않은 아이들이 배낭을 매고 20km를 걷는 건 다리가 아프다. 당연히)을 심리적 고통의 정당성으로 이용하려는 걸 확인한다.

오늘은 덜 걸으려고 했다. 어제 첫닐인데도 20km 넘게 걸으면서 아이들이 힘들어했기 때문이다. 아침이 되니 웬걸.... 아이들은 다시 생생하게 살아났다. 정확하게 말하면 역전 현상이 일어났다. 어제 힘들다고 하던 놈은 걸을만하다고 의욕을 보이고, 어제 말 없이 잘 걷던 녀석은 시작부터 비틀댄다.

100미터를 가더니 배낭을 대신 들어달라고 한다. 가슴쪽에 아이 배낭을 받아 걸었다. 다른 녀석도 샘을 내고 배낭을 넘긴다. 25살 동행 청년이 아이 배낭을 짊어진다. 그렇게 5시간을 걷다 보니 19km 정도 걸어서 오리온 알베르게가 있는 까스뜨로헤리쓰에 당도했다. 오리온은 2016년 오픈한 아주 깔끔한 알베르게다. 한국인이 주인이라는 게 우리에겐 중요하다. 주인 여자도 순례길을 몇 차례 걷다가 삶의 뿌리를 이곳에 내린 경우라고.... 덕분에 저녁으로 비빔밥을 먹었다. 와인 무한제공에 수제아이스크림 후식까지 주니 만족스러운데 우리의 예산을 벗어나는 가격이라 부담이 됐다. 자는 값 11유로, 비빔밥 10유로(1인당) 이곳에서만 100유로를 넘겨 썼다. 다른 지역에서 아껴야 한다.

사실 오리온 알베르게에 온 사정이 있었다. 이곳 까스뜨로헤리쓰에서 3km 전에 산안똔이란 작은 마을이 있다. 주민의 삶은 거의 보이지 않고 수백 년은 된 듯한 성당 건물에 무료 알베르게가 있었다. 분위기는 엄숙하고 영화에서 본 듯한 침상의 나열이 인상적이라, 특히 무료라고 하니 머물고자 청했다. 그런데 순례길 스템프보드가 없다고 거절당했다. 스템프보드를 판다는 마을로 더 오다보니 까스뜨로헤리쓰까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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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새벽 기온은 0도로 떨어졌다. 이렇게 추울 줄 몰랐다. 무료 알베르게에서 잤다면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겠다. 어떤 외국인 순례꾼은 아침에 겨울 돕바를 입고 걷더라. 다행히 우리 아이들은 두터운 피하지방으로 추위에 매우 강하다.

점심은 온타나스(순례길 아니면 폐쇄됐을 만한 작은 마을)에서 먹었다. 두꺼운 빵 사이에 햄 여러 조각을 넣은 놈이다. 어제 점심도 같았고, 앞으로도 계속 먹을 메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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