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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달나무 Jul 31. 2017

<킹스맨>과 <위플래쉬>

영화가 보여주는 세상의 변화

  아내와 고3 딸과 함께 토요일 일요일 연이틀 조조영화를 봤습니다. 아이가 문화 트렌드를 놓치면 안 된다는 명분이 있었고요.
  아이가 고른 영화는 <킹스맨:시크릿 에이전트>와 <위플래시>
  킹스맨은 청불영화라서 불편함이 있었는데 정작 관람해보니 별 문제없었습니다. 극단적 이교도들인 웨스트보로 침례교회 살육 씬과 마지막 장면에서 노르웨이 공주의 전라 뒷모습이 나오기 때문에 청불이 된 것 같더군요. 한국 청소년들을 참으로 무시하는 처사라 아니할 수 없네요^^
  연이어 일요일 조조영화로 <위플래시>를 보러 갔습니다.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관람하곤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어지러움을 맛봤고요. <위플래시>는 추천 영화 목록에 오를만합니다.


#1 <킹스맨:시크릿 에이전트>

  상당한 흥행 성적을 보이고 있나 봅니다. 포스터만으로 007 영화 시리즈의 후속작이라는 걸 알겠습니다. 본 사람 모두 재밌다고 이구동성입니다. 저도 마찬가지....

  영화를 보면서도 과거의 여러 기억들이 중첩해서 올라왔습니다. 초등학교 때 본 007 시리즈 6탄 <여왕폐하 대작전>의 몇 장면이 떠올랐지요. 스토리는 기억나지 않는데 007이 알프스 스키장에서 탈출하면서 곤돌라 천장으로 올라가서 케이블을 맨 손으로 잡고 아슬아슬하게 도망가거나 스키를 신고 활강하다가 스키 플레이트 한 짝이 빠져나가니까 한 짝만으로도 기가 막히게 스키잉을 하는 장면이 또렷합니다. 한 짝 스키잉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한 때 제가 스키에 미쳐있을 때 한 발로만 활강하려는 연습을 무척 많이 했었지요.

  왜 그런 이미지가 떠오르는지 영화를 보면서 한편으로 추적하기 시작했습니다. 007 시리즈는 플레밍의 소설이 원작인데 킹스맨은 마블코믹스 만화가 원작입니다. 만화라고 해서 소설보다 서열이 아래라고 보지 않지만 만약 70년대에 만화를 원작으로 영화를 만들면 흥행에서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역시 마블코믹스의 만화인 스파이더맨이나 두 얼굴의 사나이(헐크)가 7~80년대에 TV시리즈로 제작됐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지만, 미국에서 TV시리즈로 제작한 70년 말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이나 80년 대 초의 <두 얼굴의 사나이>는 원작 만화의 콘셉트를 상당히 각색해서 소설화한 것이라 봐야 합니다. 같은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만화는 소설과 달리 맥락을 무시한 엉뚱한 상상이 특징이자 장점입니다. 도라에몽을 잠깐만 떠올려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스파이더맨이나 헐크는 2000년대에 들어와서 원작이 보여준 post-context의 황당함을 스크린에서 구현합니다. 거미줄 발사기를 손목에 차고 있던 70년대의 스파이더맨은 21세기에 들어와서 생체에서 직접 거미줄을 발사하게 됩니다. 빌딩을 기어오르는 70년 대 스파이더맨이 21세기에는 마치 비행을 하듯 건물과 건물 사이를 날아다니고요. 80년 대 초 두 얼굴의 사나이에 나오는 헐크는 2미터의 신장이지만 21세기 헐크는 분노 게이지가 상승하면 5미터로 커집니다. 어릴 적 헐크의 바지는 왜 찢어지지 않을까를 말하며 낄낄 거렸던 즐거움이 무색해집니다. 80년 대 헐크는 비록 상처가 빠르게 치유되고 수 분만에 상한 피부가 회복되지만 총을 맞으면 비틀거렸고 21세기 헐크는 핵무기 공격에도 멀쩡합니다. 모두 컴퓨터 영상기술의 개가이지요.

  3~40년 전에 요즘과 같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황당한 상상을 내용으로 실사영화를 만들었다면, 지금처럼 주인공과 악당이 도덕적 정당성으로 구분하기 애매모호한 내용으로 TV 시리즈를 만들었다면 제작자는 돌을 맞고 파산했을 것이란 얘기입니다. 007 여왕폐하 대작전이 떠오른 것은 007이 한 발에만 스키를 타고 기막히게 활강을 한 것이 훈련으로 실제 가능한 수준이라 킹스맨이 보여주는 현실 불가능한 화려한 액션과 대비됐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자 텍스트든 영상 텍스트든 단위 요소가 모여서 하나의 흐름을 만드는 콘텍스트를 이룹니다. 영상기술의 발전으로 어떤 상상도 스크린에서 표현할 수 있게 되면서 나타난 현상이 콘텍스트의 파괴입니다. 스타워즈 수준의 SF나 반지의 제왕 수준의 판타지는 콘텍스트를 고려한 스토리텔링이지만 약 10년 전부터 SF와 판타지가 구분되지 않으면서 콘텍스트를 고려하지 않는 스토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콘텍스트의 파괴는 텍스트와 텍스트의 연결이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아예 논리와 비논리에 대한 판단이 설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논리는 논리라는 전체집합의 부분집합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비논리도 극성만 다르지 하나의 논리인 것이죠. 콘텍스트의 파괴는 ‘저건 말도 안 되잖아’하는 푸념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 생각하지 않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간 것입니다. <트랜스포머> 시리즈가 대표적인 콘텍스트의 파괴를 보여줍니다. 중요한 점은 전자기술의 발달이 콘텍스트 파괴와 동반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로가 서로를 견인하며 공진화(coevolution)를 이룹니다.

  이런 생각을 교육현장으로 가져와보죠. 콘텍스트가 파괴된 공기를 마시는 아이들은 어떻게 변할까요. 이들은 오늘 열심히 공부해서(연습해서) 내일 성공을 이룬다는 생각에서 자유롭습니다. ‘벗어난다’가 아닌 ‘자유롭다’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원인-결과의 콘텍스트와 파괴된 콘텍스트를 들락날락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성공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명예든 돈이든 상관없습니다. ‘성공’만 하면 됩니다. 지켜보는 어른을 참으로 허탈하게 만듭니다. 무엇을 해서 ‘성공’하느냐와 무엇을 위해 ‘성공’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습니다. 어른을 허탈을 넘어 멘붕에 빠뜨리는 것은 지금 성공을 위한 트레이닝을 하지 않는 것이 목표 달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이면 네가 원하는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라고 얘기해도 못 알아듣습니다.

  영화에서 기술과 표현양식이 공진화한 것처럼 아이들의 생각은 디지털 시대의 탈역사 사회로 변신하는 과정을 목도하며 예민하게 연동됩니다.

  한편의 오락영화를 보는 동안 얘기가 너무 많이 가버렸네요. 또 한 가지 떠오르는 기억이 있습니다. 초등 4~5학년 시기에 내 즐거움은 잠자리에 들어 온갖 공상을 펼치는 것이었습니다. 주요 골격은 이런 것이죠.

지리산 내부에 로봇 생산기지를 만든다. 어마어마한 기계장비가 있고 기지에서 일하는 엔지니어가 수백 명이 넘는데도 나의 로봇 생산기지는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는다. 태권 V도 아닌 것이 마징가도 아닌 것이 머릿속에서 디자인된다. 내가 만든 빼어난 성능의 로봇은 기지의 비밀문이 열리면 발진해서 평양을 초토화시키고 김일성을 사로잡아 온다. 김일성은 항복문서에 사인을 하고 무조건 남북통일에 합의한다. 한반도는 통일됐고 그 여세를 몰아 중공군도 작살내고 소련군도 몰아내서 동아시아와 시베리아 지역을 통합한 대제국을 건설한다. 일본은 그 바람에 놀라서 자진하여 한반도의 부속도서로 편입한다. 난 사람과 똑같은 인조인간을 청와대에 보내서 대제국을 통치하도록 하고 스스로는 지리산 비밀기지에서 유유자적하다가 위기상황에서 의사결정만 한다. 결코 삶의 고통으로 눈물을 흘리는 국민이 단 한 사람도 나오지 않도록 덕치를 하지만 아무도 내 존재를 끝까지 알지 못한다.

  이런 기본골격에 그때그때 살을 붙여서 아기자기하게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공상의 세계는 정말 쫀득한 즐거움이었습니다. 심심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지루할 것 같으면 나만의 공상 세계로 쏙 들어가면 되는 일이었거든요.

  영화 <킹스맨:시크릿 에이전트>는 어제 구상한 내 공상을 영화로 구현한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킹스맨의 작은 시퀀스들은 이미 여기저기에서 다룬 것들입니다. 흥미로울 것 같다고 생각되면 고민 없이 시퀀스를 타임라인에 올려놓고 랜더링을 걸어 장편 영상을 만들어낸 것과 같습니다. 핵심은 이런 방법의 스토리텔링이 대세가 됐다는 것. 앞으로 콘텍스트의 파괴 위에 세워진 이야기 탑이 유행하고 각광받을 것이라는 판단입니다. 돈을 벌고 싶다면 콘텍스트의 부서진 파편 위에 서야 할 것입니다.



#2 위플래시

  앤드류는 대학 신입생입니다. 음악대학에 드럼을 공부하기 위해 들어왔습니다. 학교에서 플랫처 교수를 만났고요. 플랫처 교수는 앤드류에게 자신의 밴드에서 드럼을 치게 합니다. 앤드류는 플랫처 교수의 비인격적 대접과 가족에 대한 비아냥을 참아가며 미치도록 연습합니다. 이쯤 되면 영웅 만들기와 영웅 뒤에서 자기의 영혼과 몸을 내어준 스승이나 도반이 있었다는 뻔한 스토리가 아닐까 의심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영화를 잘못 선택한 것이 아닐까 살짝 짜증이 밀려왔지요.

  반전은 전율이었습니다.

  앤드류는 교통사고의 비운과 플랫처 교수의 광기로 인해 학교를 그만둡니다. 플랫처 교수 또한 교육방법이 문제 돼서 학교에서 쫓겨나고요. 두 사람은 서로가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됩니다. 서로 화해한 적도 없고 플랫처는 야비한 방법으로 앤드류에게 복수합니다.

  사람들은 영화 마지막에서 앤드류의 미친 드럼 솔로에 감동하고, 그 드럼 솔로 연주가 냉혈한 플랫처에 대한 앤드류의 성공한 되치기 반격이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전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집집마다 어린이가 있는 집이면 한 권씩 가지고 있는 존 버닝햄의 그림책 <지각대장 존>에 대한 해석과 마찬가지입니다. 존 패트릭 노먼 맥 헤너시는 학교에 다니는 어린이입니다. 매일 일찍 집에서 나오지만 등굣길에 판타지 상황에 빠지면서 지각을 합니다. 담임선생님은 존의 지각 사유를 듣고 거짓말이라고 벌을 줍니다. 그런 상황이 3번 일어납니다. 그리고 더 이상 존에게 등굣길 판타지 상황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존은 지각하지 않습니다. 시간 안에 교실에 도착한 존에게 담임선생님은 도와달라고 요청합니다. 담임선생님을 거대한 고릴라가 끌어안고 천장에 매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존이 말합니다. “이 동네 천장에 거대한 털북숭이 고릴라 따위는 살지 않아요, 선생님.”

  마지막 존의 대사에 초등학생 어린이들은 모두 감격하며 좋아합니다. 물개 박수를 치며 벌떡 일어나는 아이들도 꽤 있습니다. 고약한 선생님에게 멋지게 복수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작품을 핍박받던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 어린이의 교사에 대한 복수로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작품에 대한 해석은 주관적일 수 있다는 전제를 고려해도 심각한 오류가 있습니다. 존은 지속적인 담임선생님의 부정적 견해로 더 이상 상상의 세계에 대한 판타지가 소멸된 것입니다. 지각을 하지 않고 교실에 들어온 존에게 고릴라에게 붙잡혀 있는 선생님의 모습이 보일 리 없습니다. 삶의 반쪽을 아니 경우에 따라 전부를 잃은 존에게 인지 가능한 세상이란 좁디좁은 미천한 세계일 뿐인 것이지요.

  영화 <위플래시>도 그렇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각대장 존>과 반대의 경우입니다. 드러머의 스틱은 메트로놈처럼 정확해야 하고, 그것을 위해 피나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당위. 그리고 그런 당위를 넘어선 자만이 성공의 달콤함을 누릴 수 있다는 세상의 법칙에서 앤드류가 어떻게 해방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가 <위플래시>인 것입니다.

  앤드류의 뛰어난 드럼 연주가 끝나고 앤드류와 플랫처는 서로 쳐다보고 가볍게 웃습니다. 이것이 조금 전 원수가 아름다운 화해를 하는 장면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앤드류에게 유레카를 외친 아르키메데스의 희열이 보였고 플랫처 교수도 지금껏 자신이 몰랐던 연주자의 최고 경지에 어떤 경로를 통해 다다를 수 있는지 비로소 알았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둘은 함께 깨달았던 것입니다. 깨달음은 화해보다 더 높은 곳에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앤드류와 플랫처는 사제지간이 아닙니다. 가르친다는 것, 배운다는 것이 휘발된 세계에 둘은 평등하게 서있습니다. 역으로 가르치고 배운다는 행위가 가르치는 사람의 권위와 배우는 사람의 복종에 근거해서 작동한다면 비극만을 잉태한다는 메시지입니다. 이런 울림으로 말입니다.

로고스의 시대는 저물었다. 파토스에 답이 있다

(2015.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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