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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달나무 Aug 01. 2017

학원 가기 싫은 날

아이를 비난하는 손가락을 당장 거두시지요

  초등학교 3학년 어린이가 쓴 소위 잔혹 동시 보도가 여러 상념을 불러일으킵니다. 어린이 시인 이순영은 <학원 가기 싫은 날>에서 엄마를 “씹어 먹는다”는 표현을 써서 장안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살코기로 만들어 떠먹어”라고도 했으니 읽는 이는 엄마의 살을 칼로 떼어 씹어 먹는 상상을 하는 스스로에게 소스라치게 놀라게 됩니다. 심장은 마지막에 먹겠다고 하는 끝부분에는 입에 피를 묻히고 심장을 손으로 움켜쥔 삽화가 나를 노려보고 있으니 독자로서 전례 없는 당혹감이 몰아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학원 가기 싫은 날>이 들어 있는 시집 “솔로 강아지”를 전량 폐기한다는 뉴스에 대해 글줄 깨나 쓴다는 지식인들이 한 마디씩 거들고 있습니다. 법적 판단이 아닌 학부모 이익단체의 문제 제기로 출판물이 회수되고 폐기되는 사례가 처음이라고 하니 내 의견도 꺼내서 흔들어대고 싶습니다.

  이미 <학원 가기 싫은 날>에 대한 의견이 차고 넘칩니다. 저와 같은 생각도 그중에 있습니다. 그래서 전 좀 다른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많은 어린이 청소년들이 부모를 싫어합니다. 특히 엄마를 싫어합니다. 물론 엄마를 가장 좋아합니다.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마음도 동시에 있다는 것이 옛날과 다른 점입니다. 옛날이라면 언제를 말하는가. 20년 전부터 엄마에 대한 증오의 표현이 광범위하게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주장은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지만 30년 전부터 아이들을 보살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제 판단을 단순히 개인적 편향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현재 초등학생과 10대 청소년들 중 상당수는 엄마를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합니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부터 있었던 것이기에 특별히 거론할 일이 아닙니다.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사이가 되면 정말 많은 아이들이 엄마에 대한 증오의 칼날을 내보입니다.

  도대체 “많은” 아이들이라니, 얼마나 많다는 것인지 궁금할 겁니다. 2009년부터 대안학교 선생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1978년부터 초등생 과외 교사였고, 1983년부터 교육대학생이었으며 1988년부터 서울 시내 초등학교 교사였다) 대안학교에서 내가 맡은 대부분의 학생은 세상에서 엄마가 가장 밉다고 말했습니다. 2012년 석 달 동안 경험한 송파구의 한 초등학교 6학년 교실에서 절반 이상의 아이들이 엄마를 가장 미워한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엄마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좋지만 죽어 없어지길 바라기도 하는 상대가 ‘엄마’인 것입니다.

  당신은 이해할 수 있나요. 아이들끼리는 이런 엄마에 대한 정서를 인정하고 공유하는 듯 보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유의미한 사회적 현상입니다. 제겐 2009년 이후로 꾸준히 고민하는 문제입니다. 제 고민의 초점은 엄마에 대한 어린이 청소년의 증오 표현이 나쁘다 좋다의 가치 판단에 있지 않습니다. 좋은지 나쁜지에 대한 판단은 지극히 개인적 영역입니다. 어떤 요인으로 어린이 청소년이 엄마에 대해 증오 표현을 하게 되었는지 밝히고 싶을 뿐입니다. 요인의 드러남이 문제의 해결책도 가져올 것이란 믿음이 있습니다. “Definition is Prescription"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힌트는 림태주 시인이 줬습니다. 림태주 시인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남긴 편지 형식의 유서가 실마리를 제공한 것입니다.

  나는 옛날 사람이라서 주어진 대로 살았다. 마음대로라는 게 애당초 없는 줄 알고 살았다. 너희를 낳을 때는 힘들었지만, 낳고 보니 정답고 의지가 돼서 좋았고, 들에 나가 돌밭을 고를 때는 고단했지만, 밭이랑에서 당근이며 무며 감자알이 통통하게 몰려나올 때 내가 조물주인 것처럼 좋았다. 깨꽃은 얼마나 예쁘더냐. 양파 꽃은 얼마나 환하더냐. 나는 도라지 씨를 일부러 넘치게 뿌렸다. 그 자태 고운 도라지꽃들이 무리 지어 넘실거릴 때 내게는 그곳이 극락이었다. 나는 뿌리고 기르고 거두었으니 이것으로 족하다.
  나는 뜻이 없다. 그런 걸 내세울 지혜가 있을 리 없다. 나는 밥 지어 먹이는 것으로 내 소임을 다했다. 봄이 오면 여린 쑥을 뜯어다 된장국을 끓였고, 여름에는 강에 나가 재첩 한 소쿠리 얻어다 맑은 국을 끓였다. 가을에는 미꾸라지를 무쇠솥에 삶아 추어탕을 끓였고, 겨울에는 가을무를 썰어 칼칼한 동태탕을 끓여냈다. 이것이 내 삶의 전부다.

  편지글의 일부를 스크랩한 글입니다. 림태주 시인의 어머니 가치관을 잘 보여주는 글입니다. 림태주 시인은 50세 나이입니다. 시인의 어머니는 노자 장자를 모르겠지만 노장사상을 삶으로 보여주는 시골 아낙이고 국가라는 이름의 법과 제도가 필요 없는 낭만적 아나키스트입니다. 자본과 권력이 손사래를 치며 두려워하는 삶을 보여줬습니다.

  사람의 삶은 변했습니다. 88 서울 올림픽 이후로 자가용 승용차 소유가 빠르게 확대되고, 문민정부 들어서면서 사람들에게 노래방 점수가 중요해졌습니다.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해 저녁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문화생활을 위해 반문화적 가치관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림태주 시인의 어머니처럼 주어진 대로 살고, 뜻이 없고, 지혜가 없다면 무능력의 이름표를 달았습니다. 메리토크라시*가 추앙받는 사회에서 능력이 없다는 낙인은 배제와 공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엄마를 증오하기 시작했습니다. 메리트가 없는 엄마들이 자식들에게 공격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메리트를 갖추지 못해 낙망하는 가운데 열렬히 메리트를 획득하고 싶은 엄마들이 표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메리트는 결국 돈으로 수렴되었습니다.

  2015년에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를 외치던 어린것들이 엄마가 되었습니다. 아들도 자라서 아빠가 아닌 ‘엄마’가 되었습니다. 예전의 어린것들이 모두 ‘엄마’가 된 것입니다. 서울대 신입생에게 부모가 몇 살까지 살기를 바라는가 조사했더니 평균 67세로 나왔다는 보도가 놀랍지 않은 분위기가 됐습니다.

  만약 림태주 시인의 어머니가 쓴 편지글을 현재 어린이 청소년의 엄마가 쓴 것이라 가정한다면 다음과 같이 될 것입니다.

  나는 내 엄마와 달리 삶을 개척하려고 했다. 성실과 노력으로 꿈을 이루리라 기대했다. 너를 힘들게 낳고 보니 경쟁에서 살아남는 아이로 키우려는 걱정에 우울하기도 했다. 교육비를 위해 돈벌이에 나서보니 자존심에 상처만 받았고, 적절한 노동의 대가를 받을 수 없어 힘든 나날이었다. 집은 내게 또 다른 일터였다. 아무도 육아의 짐을 나눠질 수 없는 상황에서 가족의 존재 자체가 버겁고 짜증 났다. 이웃이나 학부모 모임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만남이라 점점 사람을 피하게 만들었다.
  나는 너를 잘 키우려 했다. 너를 잘 키우려고 내가 가진 모든 노동력을 내다 팔았다. 투잡, 쓰리잡을 가지며 밤낮으로 뛰어서 내 소임을 다 했노라 자부한다. 봄이 오면 고단한 몸을 이끌고 주말에 벚꽃축제에 다녀오고 여름이면 남들 다 가는 휴가철에 대부도 갯벌에 가서 바지락이라도 캐도록 했다. 가을에는 그럴듯한 단풍을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려 막히는 고속도로를 기어 다녔고, 겨울에는 내 새끼 스키 태우려 칼바람 맞으며 리프트 입구에 서있었다. 이렇게 내 삶은 너를 위해 소진됐다.
  그런데 너는 어쩜 이리도 엄마를 배신한단 말이냐....

  이제 누구나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상대방이 내게 건네는 가치의 크기를 고려합니다. 즉 상대가 내게 유의미한 가치를 전달하지 않을 것 같으면 관계 맺기를 거부합니다. 이런 정서가 80년 대 부터 시작되고 90년 대 들어 당연한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자식이 안겨줄 자랑스러운 결과를 염두에 두고 부모의 투자가 성립합니다. 자식의 나쁜 결과는 일종의 계약 위반입니다. 이렇게 되면 엄마는 마케팅팀의 팀장입니다. 아이는 팀원입니다. 회사 경영진이 제시한 영업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엄마는 당근과 채찍을 모두 사용하다가 비전이 없다고 판단하면 팀원을 해고합니다.

해고된 팀원이 팀장에게 갖는 감정은 분명합니다. 경외(敬畏;공경하면서 두려워함)는 차라리 희망적인 감정입니다. 두려워하면서 꼼짝 못 하는 것은 팀원으로 소속됐을 때 얘기입니다. 해고된 팀원은 팀장을 저주할 뿐입니다.

  <학원 가기 싫은 날>이 실제 엄마 육체에 대한 훼손을 그린 것이라 읽는 어른은 참으로 답답합니다. 당연히 엄마를 씹어 먹겠다는 표현은 은유적이고 시적입니다. 그런데 제가 하고 싶은 말, 제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엄마를 저주하고 공격하는 이 시대 어린이 청소년의 정서에 대해서입니다. <학원 가기 싫은 날> 동시와 전혀 관계없는 사고의 확장입니다.

  분명히 엄마 입장에 있는 30대~50대 여성들의 가치관은 2,30년 전과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모든 아버지는 ‘엄마’가 되었습니다. 아이 개개인의 엄마를 폄훼하고 비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엄마’의 이름표를 단 부모들의 삶이 메리토크라시 이데올로기에 푹 빠져버리면서 부모-자식 사이에 가치 전달이 없다면 관계도 없어진다고 믿는 사이비 종교가 우리를 덮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메리토크라시 종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부모-자식 간에도 등가교환이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환각에서 깨어나지 않는다면 ‘엄마’가 아이의 심장을 가장 고통스럽게 씹어먹는 일이라 주장합니다.

  림태주 시인의 어머니가 지닌 메리트를 계량화 하려는 자신을 발견했다면 내 아이의 살을 씹어 먹는 최면에 걸린 자신에게 “레드썬”을 외치길 바란다. (2015.5.26)


*메리토크라시 : 능력자 지배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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