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리온

스페인카미노데산티아고 열셋째날

by 박달나무

#스페인카미노데산티아고


#열셋째날(2019.1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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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리온은 비교적 큰 타운이다. 카미노에서 로그로뇨, 부르고스, 레온, 산티아고를 빼면 까리온이 제일 큰 타운이다. 알베르게도 여러 곳이다. 식당도 여럿이고 순례꾼을 위한 물품 가게도 있고 은행도, 버스터미널도 있다. 현지인의 삶도 활발하다. 작년 5월에 일인 5유로 가격의 공립 알베르게 ‘영혼의 집(Espíritu Santo)’에 머물렀다. 아주 마음에 드는.... 영혼의 집 이름이 무색하지 않은 훌륭한 알베르게다. 어제 같진 않아도 오늘도 걷는 도중에 소나기를 만났다. 4시간 만 걷고 까리온에 들어와 알베르게를 찾아 들어가기로 했다. 나는 당연히 영혼의 집으로 향했고, “무척 깔끔한 알베르게인데 좀 엄숙한 분위기지” 무심코 말했다. 그랬더니 시하가 강하게 반대한다. 엄숙한 분위기 싫단다. 마음대로 얘기할 수도 없는 알베르게 가고 싶지 않다고....


다른 알베르게에 들어갔다. 옛 수도원을 알베르게로 사용하는 산타클라라 수도원 알베르게다. 출입문부터 수도원이 주는 중압감이 장난이 아니다. 높고 육중한 문에 거대한 화강암 큐브를 쌓은 건물이 5층 높이 쯤 여겨진다(실제는 2층) 그래서 그런지 알베르게 사용자가 없다. 우리를 맞이하고 등록하는 분은 딱 “나 수사”라고 이마에 써진 분이다. 분위기가 그렇다. 표정이 굳고 도수 높은 안경에 작은 키와 두꺼운 가슴, 정수리에 숱이 없고, 높낮이가 없는 영어를 구사한다.


반전이 있다. 싱글 침대 3개만 놓인 별도의 방을 줬고, 세탁기와 건조기가 완벽하며, 부엌도 편리하다. 화장실과 샤워시설도 평균 이상이다. 우리 말고 프랑스 아저씨 한 분, 국적불명의 여성 한 분만 묵었다. 결론은 알베르게를 아주 잘 선택했다는 것. 우리 아이들 입장에서는 심심할 수 있겠지만, 대신 까리온 다운타운을 속속들이 돌아다니고 슈퍼마켓을 네 번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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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침에 숙소에서 나와 두 시간이 지났을 즈음 소나기를 만났다. 나는 아이들보다 300미터 쯤 앞에 있었고, 5분 거리 앞에 커다란 성당과 마을이 보여서 비를 맞으며 걸었다. 비야르사르데시르가(마을 이름이 좀 길다)마을 호텔 출입구 캐노피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데 빗줄기가 점점 굵어진다. 과연 아이들은 자기 판초를 쓰고 올 것인가, 그냥 비를 맞으며 올 것인가 스스로에게 내기를 걸었다. 바람이야 판초를 쓰고 오기를 기대하지만 혼자 판초를 쓰기에 불편함이 있어서 그냥 비를 맞고 올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각자 판초를 쓰고 나타난다. 오~ 서로 판초를 쓰도록 도왔겠구나 감동했는데, 시하 왈, “ 그냥 제가 판초를 꺼내 입었는데요. 하나도 어렵지 않았어요” 한다. 50미터 쯤 뒤에 태호가 나타났다. 판초를 꺼내 입느라 조금 늦은 것. 판초를 입었지만 얼굴은 그대로 노출된 상태다. 왜 모자를 쓰지 않았냐고 하니까 모자를 찾지 못했다고 대답한다. 판초 앞뒤를 거꾸로 입어서 굳이 모자를 쓰면 얼굴 전면을 가리게 된 것. 급한 마음에 뒤집어쓰긴 했는데 시하는 먼저 출발하고, 모자를 쓸 수 없지만 정돈할 새 없이 머리는 비를 맞고 걸어온 것이다. 이 지점에서 잔소리를 할까 하다가 참고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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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하에게는 태호 판초 입는 걸 도와주지 그랬냐고 말하려고 했고, 태호에게는 도와달라고 요청하지 않은 건 아쉬운 일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쉽다고 했는데, 옆 사람 도와주는 행동의 변화보다 도와달라는 요청 하는 게 더욱 어렵고 아쉬운 점이다. 잘난 척 하기 위함이나 스스로 위안을 삼기 위한 친절의 시혜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도와달라는 요청은 쉽지 않다. 도움 요청이 약자 또는 결핍의 상징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흔히 자존심과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시하나 태호 둘 다 도와달라는 말을 못하고 그야말로 똥 마려운 강아지 마냥 나를 쳐다보는 일이 대부분이다. 내 표정을 니가 살펴서 적절하게 아쉬운 부분을 메워 달라는 무언극을 하기 마련이다. 참으로 아쉬운 지점이다. 아이들끼리 도와달라고 요청하면 관용구처럼 뒤따르는 말이 있다. “그럼 넌 내게 뭘 해줄 건데?” 그러니 ‘아니꼽고 더러워서....’ 정서를 아이들에게 전달했다. 누가? 어른들이 그랬다. 대가 없는 친절은 촌스럽거나 바보짓이란 정서가 이미 우리들 사이에 고정됐다. 이건 복잡한 문제라 잔소리로 극복할 수 없어서 그냥 넘어가기로 한 거다. 판초를 입은 것만 칭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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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보다 약간 앞서 판초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이미 있다. 1시간 전에 비를 만났고, 더 이상 그냥 걸을 수 없어서 아이들 판초를 차례로 입혔다. 아이들은 종종 걸음으로 앞서 갔고 내 판초를 꺼내서 입는데, 등 뒤 배낭을 판초가 덮도록 나혼자 처리할 수가 없었다. 급히 아이들 뒤를 쫓아 눈치 빠른 시하에게 내 판초가 배낭 위로 넘어가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시하는 재빠르게 처리했다. 고맙다는 말 다음으로 나는 무심코 한마디했다. “아유.... 소나기는 귀찮아. 불편하기 짝이 없구만....”


그 말에 시하가 역시 무심코 받았다. “그러길래 왜 이런 고생을 만드셨어요!” 그런데 아무런 말도 아닌 시하 대답에 뭔가 울컥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거다. 시하는 늘 하던 말이고, 격의 없이 선생과 농담 따먹기 수준에서 한 말이란 걸 잘 알지만, 당장 판초를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왜 이런 고생을~” 그 한마디가 내 안에서 자가발전하면서 순간적으로 인생 전체를 뒤흔드는 강렬한 느낌이다.


초등 5학년 때 성인이 된 형을 따라 태릉실내수영장에 갔다가 1.6미터 수심에 순간적인 죽음을 느낀 적이 있었다. 일반인에게 개방하는 시간은 출발선 쪽에 발판을 마련해서 작은 키 어린이도 풀에 들어갈 수 있게 했다. 나는 실수로 발판을 벗어났고 얼굴이 물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발버둥을 쳐도 물속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지난 모든 날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바로 이번에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기억하는 내 인생 50년이 1초 만에 스캔되는 느낌.... 왜 이런 고생을 하게 된 건지 인과와 맥락을 헤아리는데 순식간만 필요했다.


“야! 너! 또 그 소리!” 크게 화내는 톤으로 외마디를 질렀지만 구질구질하게 이어지는 말이 없어서 내 복잡한 마음은 시하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그러게 말이다. 내가 왜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게냐~ 그런데 웃긴 결말은 지난 짧지 않은 생이 지금 두 아이의 가디언이 되기 위함이었다는 게 잠시 후에 증명된다.


그러다 비가 그쳤고, 아이들이 스스로 거추장스러운 판초를 벗길래 툴툴 털어 케이스에 넣어 각자 배낭 망사주머니에 넣어줬다. 혼자 감정에 나는 빠르게 걸었고 다시 소나기가 내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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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비야르사르데시르가 바르(bar)에 들어갔다. 폰을 꺼내 아이들을 찍으려니까 렌즈에 습기가 차서 사진이 뿌옇다. 비가 오면서 기온이 많이 내려갔다. 옷도 부분적으로 젖어서 바르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천천히 움직이기로 했다. 까리온까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바르의 TV에서 오락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고, 아이들은 재밌다고 시청한다. 나는 커피를 한 잔 더 시켜 마시고 있는데, 시하가 묻는다. “저거 뭔 프로그램인가요?”


보니까 딱 ‘1대100’이다. “응 1대100 퀴즈 프로를 스페인도 하는구나. 원래 네덜란드 오리지널 프로그램인데 판권을 KBS가 사서 우리도 제작하고 있어”


퀴즈라면 태호도 관심이 많다. “저거 퀴즈예요? 근데 왜 1대100이에요?” 태호가 물었고, 시하는 한번도 본 적 없는데 한국에서도 하냐고 말을 이었다.


하.... 엊그제 삼쉬르(페르시아 전통 전투용 칼)에 대한 설명도 예전에 어떤 계기로 칼에 대해 조사 발표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정확하게 말하면 일산 그랜드백화점 학부모 상대 강연 준비 때문) 잘 알고 있던 분야였다. 하필 삼쉬르에 대한 질문을 하니까 설명할 수 있었다. 더 들어가면 한도끝도 없지만 핵심만 간추려서 말할 수 있었던 건 우연한 내 경험 때문이다.


1대100 퀴즈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12년 전에 내가 ‘1인’으로 출연하고 방송된 일이 있었다. 당시 대안학교 씨앗돈을 만들려고 출연했던 것. 100인의 패널과 대결해서 모두 이기면 1인에게 5천 만원의 상금을 준다고 해서.... 나는 8단계에서 틀렸고, 100인 중 살아남은 5명 중에 4명이 틀린 답을 눌러서 유일한 생존자 26살 여성이 상금 1400만원을 탔다. 5명과 마주했을 때 내가 5천 만원을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찬스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마지막이 된 문제는 내 전문 영역(분필에 대한 문제)이라서 찬스를 쓸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탈락했다. 나에게 돌아온 건 30만원의 출연료였지만 속상한 마음에 불우이웃성금으로 전액 기탁한다고 했다. (선량한 동기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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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나보다 1대100퀴즈 프로를 더 잘 설명할 사람은 없다. 네덜란드 판권문제는 복면가왕의 전 세계 판권수출과 이어지고, 콘텐츠가 어떻게 돈벌이가 되는지로, 12년 전 출연 당시 사진 검색으로, 43회 1대100 문제풀기로 마구 전개됐다. 아이들은 기출문제 풀기에 환호했다. 내가 8단계에서 떨어졌지만 아이들은 1단계부터 8단계까지 모두 정답을 맞췄고, 나는 매우 놀라워하면서 너희들은 상금 5천 만원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이미 각자 주머니에 2500만 씩 들어와서 마음이 아주 부자가 됐다.


1대100은 보기 세 가지 중에 정답을 고르는 것이기에 내가 무언의 힌트를 줘서 점점 어려워지는 8문제를 모두 맞추도록 할 수 있다. 아이들이 환호작약하고 의기양양해 하면서 다음 문제를 내달라고 하길래 다른 기출문제 1단계를 제시했다. 그리고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고 아무런 사운드도 내지 않았다. “다음 중 아마추어무선사를 부르는 용어는?” (1) 밥(bob) (2) 콩(kong) (3) 햄(ham) 아이들은 각각 1번과 2번을 선택했다. 그런 거다. 눈썹의 미세한 움직임만으로 아이들이 정답을 맞출 수 있게 할 수 있다. 아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교사의 마음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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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산티아고 까미노를 걸으면서 열심히 일기를 쓰는 건 독자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에 대한 서비스라고 생각한다.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고 50년이 지나도 읽으면 힘이 되도록 쓴다.


내가 1대100에 출연했을 때 제시된 문제 세 개를 나열할테니 재미로 풀어보시라.


3단계(96명 생존) 쥐와 코끼리의 크기가 다른 이유는?


① 세포 수의 차이 ② 세포 크기의 차이 ③ 세포 밀집도의 차이


4단계(51명 생존)주재료가 돌이 아닌 것은?


① 이스터섬의 모아이상 ②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 ③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


6단계(14명 생존)파운드케이크란 이름의 유래는?


① 가격이 1파운드이다 ② 만든 사람 이름이다 ③ 재료가 1파운드씩 들어간다


정답 : 3단계(①) 4단계(③) 6단계(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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