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은 도노반파크에서(2019.4.14)
1.
일요일이다. 어제 초저녁에 잠이 들었다. 오래 운전하고 산에서 시간을 보낸 게 피곤했기 때문이다. 내가 잘 때 아이들은 호텔 리셉션장에서 놀고 있었다. 그곳이 와이파이가 터지는 곳이다. 깜짝 놀라 일어나 보니 11시다. 아이들이 저녁에 샤워하는 건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미 이 닦고 샤워도 했으니 바로 침대로 들어가게 했다. 그러니 아이들이 일찍 못 일어날 줄 알았.....으나 7시에 둘 다 일어났다. 처음 있는 일이다.
10시에 도노반파크(호스테라피 목장)에 갈 예정인데, 9시 반에 갔다. Jo 선생이 일찍 와도 상관 없지만 자기는 10시까지 할 일이 있다고 강조한다. Jo가 아끼는 젊은 말을 훈련시키는 일이다. 네 다리에 각반을 채우고 등에는 비닐봉지를 바람을 넣어 양쪽에 묶고 걷는 게 훈련이다. 균형을 잡고 걷지 못할 경우 다리에 상처가 날 수 있어서 각반 보호대를 찬다는 것이고, 말들이 비닐봉지가 바람에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놀라는 경우가 많은데, 미리 인식시키느라고 등에 올려놓는다고 한다.
2.
정확히 10시가 되니까 Jo 선생이 아이들을 부른다. 친절하게 닭장으로 안내한다. 도노반파크엔 다양한 닭들이 있다. 5~6 종류로 보인다. 한국의 토종닭 모양부터 피코크까지 있다. 처음 보는 종류의 닭도 있다. 그냥 모두 ‘치킨’이라고 부르더라.(피코크는 예외) 닭들에게 모이를 손으로 뿌리며 주라고 시키고, 오늘 아침 낳은 달걀을 이곳저곳에서 찾아서 한 통에 담아 태수에게 선물이라고 줬다.(서로 다른 색깔과 크기의 달걀이 9개) 태수 입이 귀에 걸린다. 그러면서 하는 말, “난 이제 영어가 많이 늘었어.”한다. Jo 선생 말을 알아들었다는 자랑이다. 어제만 해도 좋아하는 음료를 스스로 지불하고 사먹으라고 돈을 주었는데도 사양한 태수다. “난 영어를 못해서 사먹을 수 없어요.”
3.
닭들과 놀다가 말과 염소가 노니는 운동장으로 이동했다. 한국에서 딸딸이라고 부르는 세 바퀴 카트를 가지고 들어갔다. 이 카트가 말똥 치울 때 쓰는 것이다. 지난 주에 아이들과 말똥 치우는 일을 하겠다고 말했더니 Jo 선생이 기억하고 있었나 보더라. 우리 아이들이 갑자기 말똥 치우는 노동을 할 리가 있는가. 아이들은 말, 염소, 강아지와 놀고 난 부지런하게 말똥을 치우는 일을 했다. 나중에라도 아이들이 이 작업을 하려면 내가 똥 치우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겠기에 아주 열심히 일했다. Jo 선생도 같이 말똥을 치웠다. 오늘이 Jo 와 가장 많은 대화를 한 날이다. 그중에 재밌는 얘기를 하나 소개하자면,
“개는 사람의 표정을 보면 주인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요.” 그러면서 빠삐를 부른다. 목장에 두 마리 개가 있는데, 바깥에서 키우는 놈들이다. 하나는 보더콜리 종류고, 하나는 도베르만 종류다. 도베르만 종이 빠삐다. 우리 아이들이 지어준 이름은 핫도그.
빠삐는 냉큼 달려왔다. Jo가 일부러 다양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데, 빠삐는 확실히 주인의 얼굴을 살핀다. 그러니까 개는 주인 얼굴의 근육 움직임으로 주인이 하는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 하지만 말은 아주 영리한 동물이지만 사람 표정을 읽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바디랭귀지를 써서 의사소통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얘기를 번역기 없이 듣고 말했는데, 이미 김철 선생님에게 들은 바가 있기 때문에 몇 가지 단어를 가지고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라면 무슨 얘긴지 알아듣기 힘들었을 것이다. Jo 선생은 평생 말과 함께 한 승마 선수 출신이라 말에 대한 얘기라면 신나서 얘기하느라 말이 점점 빨라지기 때문이다.
4.
말똥을 치우다가 멀리 있는 시하를 봤다. 커다란 짐볼 위에 앉아서 몸을 앞뒤로 조금씩 흔들며 30분을 가만히 있는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30분을 별다른 액션 없이 가만히 있는다는 건 요즘 아이들에게 필요한 일이다. 멍 때리기가 때론 필요하다지만 표정으로 봐서는 멍 때리는 게 아니라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다. 햇볕은 부드럽고 하늘은 파랗다. (선글라스를 쓰면 진한 코발트, 벗으면 하늘색이 섞인 파란색) 2천 평 정도 풀밭에서 몇 마리 말이 장승처럼 서있고 장난꾸러기 염소 두 마리는 태수와 씨름을 한다. 나는 여기저기 싸놓은 말똥을 치우고 시하는 짐볼에 앉아서 시간을 보낸다. 잠시 후 Jo 선생이 시하만 불러서 함께 산책을 했다. 5분도 안 된 시간이지만 시하 표정이 밝다. 어떤 얘기를 나눴는지 묻지 않았다.
5.
론세스턴에 산다는 70대 초반의 Jo의 엄마를 만났다. Jo 얼굴에 사인펜으로 주름을 그려 넣으면 Jo의 엄마와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눈을 감고 목소리만으로는 정말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DNA의 강력함을 실감했다. 12에이커에 달하는 목장을 혼자 관리하는 Jo를 도우러 가끔 온다고 말한다.
점심을 먹은 후 Jo가 소개한 짚라인 어드벤처(짚라인을 타고 론세스터 근처의 자연환경을 한 눈에 보는 매력적인 액티비티라고 했다)에 전화했더니 오늘은 곧 영업이 끝나기 때문에 예약을 받을 수 없다고 한다. 행선지를 바꿔 호바트 유스호스텔 직원에게 소개받는 몰크릭 카르스트 국립공원에 갔다. 몰크릭은 동네 이름이고 내가 있는 델로라인에서 가깝다. 카르스트 공원답게 두 개의 석회암 동굴이 있는데, 우리가 간 곳은 좀더 가까운 Marakoopa 동굴이다.
안내를 맡은 중년의 백인 남성은 매우 열정적이다. 단지 직업으로 먹고 살려고 동굴 안내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진정 태즈매니아와 이곳 자연을 보존하려는 마음이 절절하다. 그런 마음으로 설명을 하니 절반은 알아듣겠더라. 아마도 한국의 카르스트 지형에 대해 공부한 바가 있어서 (아이들과 여행을 많이 하다보니 정선의 발구덕 마을을 설명하느라 공부한 적이 있다) 더 알아듣기 쉬웠을 것이다.
다시 상기하지만 외국어 공부가 단어의 암기에 있지 않다. 그까짓 인사 주고 받으려고 영어 공부하는 것이 아니기에 누구나 더 많이 더 깊게 개념을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선결 과제다. 당연히 모국어로 공부 많이 하는 게 효과적인 외국어 공부 과정이라고 “주장”한다.(내가 영어공부한 것은 고등학생까지. 그후로 영어가 필요한 일이 전혀 없었다)
동굴에서 꼬박 1시간을 머문다. 그동안 계속 안내인의 설명을 들으며 이동한다. 뉴질랜드 북섬 와이토모나 남섬 테아나우에만 있다는 글로우웜 벌레(반딧불이처럼 빛을 내고 동굴 천장에 붙어 산다)도 이곳 Marakoopa 동굴에 살고 있었다. 뉴질랜드와 태즈매니아에만 사는 희귀종이라고 한다. 모든 불을 껐을 때 천장에서 은하수가 흐르는 것처럼 촘촘한 별빛이 보였다. 아이들은 무덤덤했는데, 태수의 경우 1시간을 잘 버틴 것만으로도 신기한 일이다.
6.
시하와 태수 둘 다 상당한 지식이 있었다. 석주를 석순이라고 알고 종유석을 석주로 아는 용어의 뒤죽박죽이 있지만 석회암이 탄산가스에 녹는다든가, 석회암이 열변성을 일으키면 대리석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마도 why 시리즈나 과학만화의 도움이 아니겠는가 싶다. 그런데 이런 지식은 지식의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순전히 퀴즈용 단편 지식 부스러기라 할 수 있는데 실제 지식 스키마 구성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점을 보통 잘 모르기 때문에 답답하다. 사실 아주 간단한 원리로서 누구나 스스로 경험한 것이었음에도 학교의 대중조작이 그만큼 완고한 것이다. 단언컨대 지금 초중고 학습은 공부가 아니다. 교사도 알고 국가도 알고 학생들도 알고 있지만, 더 이상 어쩔 수 없기에 까놓고 말하지 못할 뿐이다.
어린이와 10대에는 알고자 하는 마음, 아직 모르기 때문에 답답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공부의 전부라고 하겠다. 호기심과 비슷한 말이지만 호기심이 단편적이고 일시적인 뉘앙스가 강해서 같다고 말 못하겠다.
알고자 하는 마음은 관계의 단절 상태에서는 생겨나지 않는다. 고립된 자는 아는 것에 흥미를 가질 수가 없다. 타자와 나의 관계가 의미를 가져야 알고자 하는 의지가 생기는데, 자의든 타의든 고립된 어린 친구들은 공부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집에서조차 바깥 소음을 차단한다는 명목으로 1인용 스터디 캐비닛을 사용한다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7.
그런 점에서 호주에 온 배경과 목적은 서로 다르지만 시하와 태수의 조합은 서로에게 천만다행이고 양쪽 모두 행운이다. 둘이 끊임없이 대화하고(내용이 무엇인지는 현 단계에서 중요하지 않다) 서로 넘어서는 안 되는 금도를 잘 지키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보인다. 나로선 고마운 일이다.
8.
상현달이지만 모양이 한국과 반대인 달을 찍었다. 원리는 알고 있지만 신기하다. 신기함을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다. 우리 아이들은 전혀 신기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미 알고 있었고 신기할 일이 아니란다. 똑부러지게 말하는 시하가 한 말이다. 뒤이어 자기도 똑같은 생각이었노라고 태수가 말한다. 이미 예전에 많이 겪었던 시추에이션이다.(하나가 말하면 다른 녀석이 똑같은 생각이라고 뒤따라 말하는 걸 말함)
그런데 시하는 엄청 시니컬하다. 세상에 신기한 것이 하나도 없는 초4학년이라니..... 죽는 것도 하나도 두렵지 않단다. 어차피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 아니 생명체는 하나도 없지 않느냐고 한다.
“두 가지 뜻이 있는데, 하나는 긍정적 의미로 흔히 쓰고 또 다른 하나는 부정적으로 사용하거든요” 뭐 이런 식이다. 초4학년이 구사하는 구어체 문장 맞나? 이게 가능? 물론 아이가 말하는 콘테츠를 언급하는 게 아니다. 그런 말을 하는 태도를 얘기하고 싶은 것이고, 내용은 자기 생각과 다르게 표현하는 게 상당히 많다. 싫다고 말하는 건 좋다는 뜻이고, 좋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싫은 것일 수 있다. 그걸 구분하는데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난 이 아이가 어떻게 성장할지 매우 궁금해졌다. 긍정적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