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여섯번 째 날

2019.4.18

by 박달나무


#자율계생명체


#EAGALA수업


#스위스빌리지


#미니골프


집 구하는 문제에 대해 걱정이 많으니 여러 도움의 손길이 들어온다. 먼저 지난달 말일 거창에 일본 전 총리 하토야마 유키오 강연에 동행한 인연으로 통성명한 홍선희 선생(전 사단법인 동북아평화연대 대표)이 연락했다. “멜번에서 교수로 일하는 친구를 소개할 테니 도움을 받아라” 페북 메시지가 왔다. Ellie Jon 교수(한국인)에게 유용한 정보를 얻었다. 태즈매니아는 인프라가 부족하고 집 얻기 쉽지 않을 것이니 호주 본토로 오는 게 유리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제는 전 세계 어디라도 집을 구할 수 있으면 이동할 생각이다. 동시에 태즈매니아의 뛰어난 자연 환경과 시골스런 분위기에 미련이 남기도 하다. 뛰어난 자연환경은 아프리카도 있을 것이고, 라틴 아메리카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태즈매니아는 영어권이기에 그나마 능숙하고(길거리 간판이라도 읽을 수 있으니) 문화 패턴이 낯설지 않다. 감탄을 자아내는 크레이들 마운틴과 도브 호수도 사진으로는 익히 보아왔던 것이니까.....


서둘러 도노반파크로 향했다. 목요일 아침은 EAGALA 프로그램 수업을 하는 날이다. 전날 묵은 장소가 크레이들 마운틴 국립공원 쪽이라 도노반파크까지 45분을 운전해야 했다. 차에 머무는 동안 태수가 도발을 시작했다. 다분히 의도적이다.


아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써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어른의 경우 권위도 있고, 돈도 있고, 운전도 할 줄 알고, 스케줄을 변경할 수도 있다. 권위는 일도 없고, 돈 한 푼 없고, 이동수단도 없고, 낯선 곳에서 지리도 모르고, 능동적으로 스케줄 관리도 불가능한 상태라면 어떤 방법이 있는가?


딱 감옥에 들어간 죄수의 상태와 다를 바가 없다. 갇힌 죄수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불만을 늘어놓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다. 소리지르고, 울고, 식사 거부하고, 글줄깨나 읽었다면 일장연설도 한 방법일 것이다. 흔히 학교는 군대와 교도소에 비교되고 있으니, 그 비교가 일리가 있다면 아이들의 행동도 죄수의 불만과 다를 바 없다. 생각할수록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태수의 행동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당연하거나 일반적이다. 반면 교도관이라면 죄수가 자신의 죄를 자각하고 받아들이며 반성의 차원에서 명상을 하거나 책을 읽고 반성문 쓰는 시간으로 하루를 보내길 바랄 것이다. 교도관의 바람은 개념적으로 존재할지 모르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굳이 있다면 로봇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살아 있는 생명체가 신체의 구속으로 자유가 없는 상태라면 악을 쓰고, 울면서 불만을 쏟는 게 당연하다.


자율계 생명체의 너무나 명백하고 단순한 이치를 정리해서 각인할 수 있었던 것은 모리타 마사오의 <수학연주회> 형식의 강연 덕이다. 모리타 선생은 잠시 인간의 자율성을 묶어두고 기계처럼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경험과 의지가 수학을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수학의 세계에서 다시 자율계 생명체의 욕구로 돌아오는 것도 수학이 할 일이라고 설명한다. “+” “-”의 기호가 일상의 의미로 자리잡지 않으면 새로운 수학으로 도약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건 마트에서 물건값을 계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지만 여기서 계속 풀 수 없는 노릇이라 잠시 접기로 하고.....


맞는 말이다. 잠시 인간의 자율성을 유보하는 국면도 필요하다. 하지만 자율성을 제거하고 기계로만 영원히 존재하라고 하는 것이 학교식 교육의 핵심이고, 메뉴얼의 존재 이유가 기계적 대응을 위하여 같은 입력값에 언제나 같은 출력값을 내놓으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태수에게 그동안 가해졌던 압박들은 같은 메시지를 끝없이 던졌다. 교실에서는, 화장실에서는, 식당에서는, 교회에서는, 거실에서는 한 가지 행동유형만 강제적으로 지정한 것이다. 그런 지정도 물론 필요하다고 앞서 말했다. 그러나 언제나, 영원히 같은 유형만 허락되는 건 인권침해에 해당한다. 인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기계 취급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해진 매뉴얼대로 행동했다가도 다시 자신의 욕구를 들여다 보고, 그에 따라 자유롭게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넉넉히 허용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니까 죄수를 다루는 교도소 소리를 듣는 것이다. 아이는 영어의 몸이 할 수 있는 원초적 저항을 하는 것이고, 일상에서 맥락이 파괴된 행동만을 하게 된다.


도노반파크에서 다시 만난 Jo와 maddie는 내게 태수가 평소에 저런 모습을 얼마나 자주 보이냐고 묻고, 저런 상태가 얼마나 오래 갈 것으로 보느냐고 내 의견을 구했다. 가끔 보이는 모습이고(한국에서는 자주 보이던 모습이고) 오래 가지 않는다고 하자, Jo 선생이 힘으로 태수를 끌고 이갈라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운동장으로 들어왔다. Jo 선생님은 태수에게 수업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지만 운동장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엄한 얼굴로 말한다. 분위기만으로도 말을 알아 들은 태수는 실제로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태수는 이갈라 수업을 하지 않겠노라 선언했다.


일단 시하만 수업을 진행했고 태수는 울타리에 붙어있었다. 그런데 말 세 마리가 우연인지 의도적인 행동인지 모르겠지만 태수가 나가려는 출입문을 몸으로 막아섰다. Jo 선생님은 말이 태수를 도와주는 것이라 말한다. “Really?”


태수가 수업에 참여하도록 말 들이 유도할 테니 기다려보라고 했다. 그러려면 교사들은 태수를 외면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30분이 지나니 정말로 태수가 은근슬쩍 시하 쪽으로 와서 미션을 같이 수행한다. 처음에 언제 그랬냐는 듯 마지막엔 시하, 태수 둘 다 미션 수행을 잘 했다고 박수를 받고 마쳤다. 이런 결과가 있을 것이라 믿고, 또 바라고 있었지만 태수의 수업 합류에 말이 어떤 공헌을 했는지 아직 모르겠다. Jo 선생님은 말 들이(운동장에 다섯 마리가 있다) 수업 전체를 인식한다고 말한다. 신기한 일이다. 김철 선생님께 들은 바는 있지만 내가 직접 경험하는 것은 처음이다. 어쨌든 태수의 마지막은 입이 귀에 걸렸다. 매우 만족스러워 하고 즐거운 표정이다.


Jo 선생님은 수업 시작하면서 시하에게 준비된 말머리 그림을 주고 다섯 마리 말을 살펴서 현재의 말 기분을 말하고, 말의 상태를 각각 그려달라는 요구를 했다. 말머리 그림은 테두리와 눈만 표현한 것이다. 시하는 충분히 집중하고 성실하게 다섯 마리를 관찰하고 그림을 그리고 상태를 간단한 영어 단어로 썼다. 시하는 Jo 선생님 지시를 통역 없이 거의 알아들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시하는 매우 눈치가 빠른 경우다. 비언어적인 요소를 포착해서 Jo 선생님 말씀을 재구성하고 있었다. 물론 아는 영어 단어도 상당히 많기도 하다.


두 번째 미션은 운동장에 있는 모든 물건을 동원해서 구조물을 만들고, 만든 구조물 위로 말이 지나가도록 하라는 것이다. 시하는 장애물로 쓰는 로그(통나무)를 끌어다가 마치 뗏목처럼 붙여 놓았다. 말을 끌고 와서 플랫폼처럼 직사각형을 이룬 로그 더미를 넘도록 유도했다. 그 과정에서 태수가 자연스럽게 합류해서 미션 성공하도록 한 것이다. 지난 주에 헤드홀터(굴레)를 씌우는데 실패했지만 이번엔 아이들이 성공했다. 방법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냥 연구해서 씌우고, 끈을 연결해서 말을 걷도록 하라는 미션에 쉽게 성공했다. 끈 잡고 워킹하기는 태수가 한국에서 여러 번 해 본 것이라 아주 자신 있게 수해했다. 이갈라 말들은 마치 어떤 미션인지 알기라도 한 듯이 행동했다. 아이들의 유도에 먼저 반응하고 따라주었다.


오후에는 Maddie 선생님이 추천한 론세스톤의 가볼 만한 장소 중 스위스 빌리지를 방문했다. 미니 골프가 쉽게 즐길 수 있는 활동이라고 판단했다. 골프의 룰도 알려주고, par의 개념이나 버디, 보기 등의 용어도 알려줄 겸..... 딱 예상대로 행동한다. 시하는 TV로 본 것은 있어서 퍼터만을 쓰는 경기에서 그린의 라인을 낮은 자세로 앉아서 살핀다.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볼이 연못이나 벙커에 빠지면 짜증을 내고 경기를 보이콧하려는 건 태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태수는 무조건 퍼터를 휘두르고 본다. 퍼터 사용법을 알려줘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동안 내게 왔던 모든 아이들이 똑같았다. 경험해보지 않은 것은 좋은 결과를 자신할 수 없기 때문에 처음부터 자기 멋대로 행동하고, 결과에 대해서 ‘장난이었어’라고 변명하는 메카니즘이다.


그렇지만 18홀 중 각자 파도 한번 씩 기록하고 버디도 2번 있었다. 태수는 엉뚱한대로 친 공이 바위에 맞고 튕겨서 이글이 나는 진기명기도 선보였다.


“선생님, 지금 영상 찍었죠. 그거 유투브에 올려주세요. 대박 영상으로 유명해질 거예요. 제 모습을 유투브에 올리는 것에 반대한다는 말을 취소합니다. 앞으로 제가 치는 건 다 찍어서 올려주세요.”


우연이라도 원하는 결과를 얻었을 때 좋아서 흥분하는 것도 자율계 생명체로서 인간의 일반적 모습이다. 아이는 그때그때 다르고, 어른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원래 그렇다. 어린 목숨들에게 한 가지 상황에 한 가지 대응유형만 강제하면 아이가 주변을 고려하는 배려를 완전 잃어버린다. 내가 늘 주장하는 바였고, 호주에 와서 또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추신) Ellie 교수가 캠퍼밴(흔히 캠핑카라고 부르는 것)을 마련해서 태즈매니아 전역을 돌아다니며 생활하는 건 어떠냐고 제안했다. 우연히 운전하고 가다가 깊은 시골 마을에 서 있는 "for sale"을 붙인 중고 캠퍼밴을 봤다. 저걸 사서.... 잠시 생각했지만 가격이 너무 크다. 헛츠 렌트카에 알아보니 한달에 보험료 포함 3천 달러를 달라고 한다. 2백5십 만원이다. 감당 불가 요금이다. 그래도 자유롭게 어디라도 돌아다니는 여행은 어떨까 상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