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4.17
#다시크레이들
#말목장일꾼숙소에서하룻밤
낮에 비가 오는 건 태즈매니아에 온 이후로 처음이다. 아침엔 구름만 많더니 크레이들 국립공원에 도착하니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한다. 버스로 도브 호수에 올랐다. 구름에 가려 크레이들 산은 물론 주변 봉우리들이 보이지 않는다. B급 판타지 영화에 나오는 클리세처럼 구름과 안개가 뒤섞여 어지럽게 움직인다. 곧 ‘펑’ 소리가 나고 산신령이 나타날 각이다.
아이들은 지난번 다녀간 좋은 기억 때문에 처음엔 거부감이 없었다. 호수 둘레를 걷는 길은 최대 2시간 걸린다. 20분 정도 걷더니 묻는다.
“선생님, 오늘 저희를 낚은 건가요?”
자기들을 기만해서 오래 걷도록 하는 계략이냐고 묻는 것이다.
“낚을 생각은 전혀 없고 여기 1시간만 걸으려고 하는 거지.”
“그럼 그만 걷겠어요. 돌아갈래요.”
태수가 그렇게 말하더니 몸을 획 돌린다.
시하가 잠시 고민하다가 나를 따라 원래대로 걸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태수가 대세를 따라 곧 뒤따라 올 것이라 생각했다. 10분을 더 걸었는데 태수가 따라오지 않는다. 치킨게임과 죄수의 딜레마 상황을 섞은 양상이 됐다. 누가 배짱이 더 클 것인가. 누가 상대방의 심리를 꿰뚫을 것인가.
‘그야, 네가 나를 이길 순 없지.’
그런 생각으로 계속 걷다가 문득 작년 이맘때가 떠올랐다. 제주 선흘리 곶자왈에서 아이가 길을 잃고 동네 사람들과 경찰, 소방관, 읍사무소 직원들이 모두 동원돼 곶자왈을 밤새도록 뒤진 사건이 생각난 것이다. 집으로 가는 외길에서 엉뚱하게도 숲으로 들어가서는 빨리 숲을 벗어나겠다는 생각에 더 깊이 숲으로 들어간 일이다. 왜 잘못된 길이란 걸 알아차린 후 되돌아서지 않았을까? 당시엔 답답하면서도 이해불가 사항이었지만 다음 날 아침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천지신명께 고맙다고 연신 마음속으로 절을 한 일이라 ‘왜’에 대해서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곧바로 되돌아가 태수를 찾아 나섰다. 태즈매니아 크레이들 국립공원에서 실종되면,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모두의 불행이 되겠기에 게임으로 생각하지 않고 가장 보수적 판단을 한 것이다. 5분을 되돌아가니 태수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씩 웃는 얼굴에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이 서린다. 게임에서 자신이 이겼다고 여기는 것이다. 태수는 이런 경험이 자꾸 대열에서 벗어나 숨어버리는 전술을 써먹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게임에서 지는 역할을 하기로 했다. 그게 지금은 옳다. 다른 때는 틀릴 수 있겠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면서 1시간은 걸었다. 더 걸으려고 하니 빗방울이 굵어졌다. 계속 비를 맞고 걸을 수는 없었다. 아이들은 셔틀버스로 베이스 포인트에 내려가도록 하고 나는 30분을 더 걸어 다음 셔틀버스 정거장까지 갔다. 잠시 아이들과 떨어져 혼자 걷는 맛이 달콤하다. 다음 정거장에 도착하니 한국인 관광객도 만났다. 호주에 와서 처음이다. 태즈매니아에 오는 한국 관광객은 아직 드물지만 점점 늘어날 게 분명하다. 오버랜드트래킹 쇠간판 옆에서 찍은 사진은 인천에서 왔다는 한국인이 찍었다. 태즈매니아 19개 국립공원 중에서도 크레이들 국립공원이 대표격인데, 크레이들 국립공원에서도 오버랜드트래킹 코스가 얼굴이다. 뉴질랜드 밀포드 트레일, 미국 존뮤어 트레일과 함께 세계 3대 트레킹 코스로 알려진 곳이다. 트레커들로부터 산이 훼손되는 걸 막기 위해 전체 코스의 대부분은 나무 데크를 깔았다고 하고, 종주에 6일이 걸린단다. 이곳을 한 나절은 걸어야 할 텐데, 어떻게 아이들을 설득할 것인지 차츰 고민해야겠다.
한 다리 건너 아는 관광 기획자가 체코 프라하와 크로아티아 관광 열풍을 자신이 기획했다며 자랑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곳 태즈매니아도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는 곳이다. 하지만 한국 관광객이 떼로 다니며 어떤 모습을 보일지 미덥지는 않다. 나만 아는 장소로 남기려는 심산은 아니다.
사실 아이들을 이곳에 데리고 올 때는 미국 자폐아동을 그 부모가 몽골의 오지까지 찾아가 샤먼을 만나고 굿을 해서 아이가 달라졌다는 다큐멘터리의 영향도 있었다. (2009년 부산영화제 다큐 부문 참가작; The horse boy) 샤머니즘을 아이들에게 적용한다는 말이 아니라 교육에서 사람이 할 수 없는 영역을 인정하고 겸허한 자세로 자연 속에서 생활하겠다는 뜻이다.
또한 동물 말의 영적 능력에 기댄 테라피 프로그램도 염두에 둔 호주행이었다. 호주에서도 자연환경이 뛰어난 태즈매니아에 온 이유가 위 두 가지를 배경으로 한다.
여기에 와서 아이의 보호자(부모)가 ‘결과’로 생각하는 것은 모든 행동의 ‘원인’이 된 것이라고 파악했다. 그러니 그 한 가지를 잡으면 전체가 제자리를 잡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제자리 잡기'가 사람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게 수십 년 교사 생활의 결론이다. 어차피 사람이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사이클 속에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뛰어야 부처님 손바닥이란 말처럼 도시 문명과 전자 기술 속에서 살지만 인간의 삶이 자연을 벗어날 수는 없는 법이다.
때문에 크레이들 국립공원이나 태즈매니아의 뛰어난 자연환경이라면 머무는 자체로 의미가 있다. 공기가 좋다는 게 이런 건가 느낄 수 있다. 여기와서도 과잉 노동을 계속하지만, 만성적인 어깨결림과 뒷목 당김이 한결 좋아졌다. 기분 탓인가.....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다가 저녁부터 밤새도록 장맛비처럼 내린다. 새로 얻은 에어비앤비는 전화 통화 조차 되지 않는 오지에 있는 말 목장이다. 설명에는 목동들이 일하다가 쉬는 현장숙소라고 하는데, 손님을 받기 위해 일부 개조한 곳이다. 끝없는 초원에 말들이 한가로이 노닌다. 말의 행동이 마치 이갈라(EAGALA) 목장의 말과 같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거는 듯하다. "니 속을 나는 다 알 수 있어." 뭐 이렇게 말하는 걸로 들린다. 말의 커다란 눈을 들여다보면 곡면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보인다. 계속 들여다보면 말이 특별한 영성을 가지고 있다는 설명이 이해가 된다. 말에는 뭔가가 있다.
자려고 누웠는데 빗소리가 시끄럽다. 전기담요가 아니라면 추워서 힘들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