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일곱번째날

2019.4.29

by 박달나무

#수업을하다

수학수업을 했다. 호주와서 처음으로 시도하는 학습이다. 내가 오래 고민하고 연구한 도형그리기 수업이라서 일년 치 교육과정이 내 머리에 다 들어있다.

12년 전인가.... 신촌 한겨레신문문화센터에서 이 수업을 진행했을 때 참가자 중 막내가 초3이었다. 그 당시 3학년 아이는 엄마가 옆에 앉아 보조를 했는데도 따라오기 힘들어했다. 내가 생각해도 3학년은 무리다. 이 녀석들은 4학년이라고 하지만 이제 초반이고 태수는 학교 학습에 관심이 없던 친구라 둘 다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천천히 꼭꼭 싶어먹듯 조금씩 진도를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잘못 예상한 것이었다.

기하 공부는 언어 습득과 다른 직관력과 관련이 깊다. 주의력이 부족하다는 오해를 받는 아이들이 (즉 ADHD 진단을 받은 아이들은) 직관력이 뛰어나다. 말로서 정보를 주고 받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알아내는 신비로운 능력이 있는 걸 수없이 목격했다.

태수도 그렇다. 마우스로 그림을 그리듯 수업을 진행하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활동이라고 하면서 금방 흥분한다. 주의력이 부족하기는 커녕 집중력 만랩으로 빠져들어서 가지고 논다. 뭐라 잔소리도 소용이 없다. 할 수 없이 너는 놀아라 하고 시하하고 수업을 진행했다. 시하 또한 배경지식과 말귀가 발달한 아이라 쉽게 쉽게 알아듣고 다음 단계로 마구 넘어간다.

도형의 각을 재는 활동을 하다가 정다각형 작도 방법을 연구했다. 삼각형은 한바퀴 도는데 세번 멈췄다가 가야하니까 몇 도에서 멈춰야 똑같은 각도를 만들까 질문하면 120도라고 금방 대답한다.

"음..... 역시 수학 전공자 아들답군"

격려하느라 이런 괜한 추임새도 넣으면서 신나게 진행하고 있는데, 태수가 끼어든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나도 할래요."

"너는 지금처럼 계속 놀아도 됩니다. 우리라도 수업하게 그냥 내버려두실래요?"

호기심을 자극할 겸 놀리듯이 말하니까 역시나 더 덤빈다.

"아앙~ 나도 할래요. 어떻게 하는 거예요? 정삼각형?"

이래서 태수도 같이 작도하게 됐는데.....

시하가 자신 있게 정삼각형, 정사각형, 정오각형, 정육각형을 작도하고 태수는 겨우겨우 한 템포 느리게 따라왔다.

그리고, "이제 정구각형을 작도해라. 선생님은 아무 말 안 할 테니 고민해서 그려봐." 했다.

태수가 휘리릭 작도를 끝낸다. 시하는 이제 구상을 끝내고 시작하려고 하는데..... 흘끔 곁눈질로 보니 시하 얼굴이 상기된다. '아, 피할 수 없는 그놈의 경쟁심.....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하겠지'

시하도 금방 정구각형을 완벽하게 작도했다. 첫날 한 시간 만에 이만큼 진도 뺀 건 처음이다. 거의 성인 수준.

그래서 좀 어려운 걸로 가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래 그림과 같이 스케치하고 각 표시된 곳의 각도가 얼마인지 생각해보라고 했다. 미션을 제시할 때도 태수는 딴짓을 한다. 작도 프로그램이 너무 재밌다며 혼자 놀이에 빠진 것.

시하가 끙끙대더니, "저는 예전에 수학을 아주 잘 했죠. 하지만 이제 시들해졌어요. 지금은 과학을 아주 잘 하고 수학은 예전만 못해요." 이런다.

쩔쩔매는 시하를 보더니 태수가 관심을 가진다. "그건 뭔가요? 내게도 문제를 내보세요."

"너는 몰라도 된다."

짐짓 거리를 두는 말을 했더니 더 덤빈다. 그래서 이래저래 작도를 하고 각도를 계산해라 설명했다. 시하가 말했다.

"선생님은 새로 문제를 내면서 힌트를 다 주는 거 아닙니까?"

시하가 태수를 엄청 의식한다. 태수 정도는 내 밑이지 하고 확신하다가 태수가 먼저 문제를 해결할까봐 엄청 견제한다.

예감이 안 좋다. 안 좋은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 법.....

태수가 쉽게 문제를 풀었다. 내 표정을 보더니 정답임을 확인하고 펄적펄쩍 뛴다. 눈치도 없이.

시하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나중에 설명을 듣고 이해했지만, 이미 자존심은 구겨졌나보다.

"이번 문제는 저는 저장하지 않겠어요. 이 작도는 지워주세요."

아, 생각하지 못한 복병이 나타났다.

"그것도 모르냐?"

태수가 말했다. 그런데 이 말은 시하가 태수에게 가끔 썼던 말이다. 눈치 빠른 태수가 무시당하는 걸 모를리 없지만, 발끈하지 않고 얼버무리며 "알았는데 잊어버린 거야. 난 기억을 잘 못하는 병이 있어서 그래" 하곤 했다.

이번에 완전 반대가 된 것. 여기서 내 입장에서는 건진 게 있다.

"그것도 모르냐"하는 비꼬는 듯, 비아냥의 뉘앙스를 풍기는 말을 하는 건 발화자가 비아냥거리는 품성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자기가 당해봤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태수에게 같은 말을 한 시하도 누군가에게는 "그것도 모르냐"는 말을 들었을 게 분명하다. 그때 자존심 스크래치나는 소리도 올라왔을 게다. 확실히 정황은 함께 이룩하는 것이다. 개인의 박스포장된 품성이 만드는 건 없다.

내가 조마조마한 마음이지만, 둘은 곧 콧노래를 부르며 침대로 들어갔다. 웃고 떠들고 하다가 같이 잠들고, 다음날 아침에도 좋은 기분을 유지한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태수가 하는 말,

"선생님, 수학수업해요."

아니 안 할 거야. 우리 아침 산책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