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여성들의 자살에 관한 연구
<한국 청년여성 자살률이 치솟고 있다>
1.
이소진은 이대에서 여성학 석사를 하고, 현재 연세대 박사 과정에 있는 연구원이다. 질적연구 논문을 일반 출판물로 손을 봐서 내놓은 책이 <증발하고 싶은 여자들>(오월의봄)이다. 부제는 ‘청년여성들의 자살생각에 관한 연구’. 나는 주제 의식이 또렷한 에세이로 읽었다.
90년 대 출생 여자 청년들 중 자살생각에 고민이 큰 20명을 온라인 인터뷰하고 한 권의 책으로 정리했다.(다음카페 ‘여성시대’에서 인터뷰이를 모집했다) 이소진은 인터뷰 결과를 분석하면서 생애사건을 코딩하였고, 코딩 결과를 그룹화해서 ‘노동’ ‘돌봄’ ‘가족’의 세 주제로 분류했다고 말한다.
2.
다 읽고 책장을 덮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반전이 없네’이다. 나는 남성이고, 이소진 연구의 대상인 20대 청년여성을 딸로 둔 아버지 입장이다. 따라서 자살생각을 하는 청년여성에 감정이입은 가능하지만 주체로서 설 수는 없다. 그래서 ‘반전이 없다’는 표현이 조심스럽지만, 읽기 전 제목에서 느끼는 내용의 맥락을 벗어난 전복적 상황은 없었다.
3.
이소진은 말했다.
“나는 ‘나’라는 존재들이 ‘우리’로 묶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썼다. 우리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 비록 세상을 뒤엎진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내가 발 딛고 있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시야를 넓힐 수 있다. 당신의 불안에서 아주 조금만이 당신의 책임이다.”
이소진은 ‘개인적 책임’이 강조되는 것은 능력주의(메리토크라시)를 천민자본주의가 교묘하게 세뇌한 결과라고 말한다.
“계급상승을 위해 자기 자신을 개선해야 한다고 설파하는 자아실현 담론과 능력주의는 조직의 입장에서 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전환하는 유용한 정치적 도구로 작동한다.”
4.
이소진은 에필로그에서 고백한다.
“이런 나에게 결혼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안중에 없는’ 사건이다. 유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는 가족 내에 잔존하는 성차별을 목도해왔다. 1년에 두 번 있는 명절은 그러한 성차별의 집합체다. 자신들의 조상을 모시는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며느리들만 전을 부치고 남자들은 소파에 앉아 ‘밤이나 까며’ 텔레비전을 본다. 성별분업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곳에 녹아들어 있었고, 내가 청소년이 되자 몇몇 사람들은 내게 ‘여성다움’을 강요했다.”
이소진의 낮은 톤 절규에서 매우 뜨끔했다. 내가 어려서 보던 장면이고, 어른 이후에는 ‘밤이나 까며’ 텔레비전을 본 사람은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내 딸에게도 ‘여성다움’을 강요했나? 전혀 아니라고 말하기 어렵다.
5.
이소진이 인터뷰이들과 함께 한목소리로 외치는 한탄에 가슴이 미어진다.
“언제쯤이면 아무런 생각 없이 살 수 있을까. 아침에 눈을 뜨고, 아무런 걱정 없이 일을 하고, 돌아와 저녁을 먹고, 맥주를 마시며 하하 호호 내일을 기대하는 일상이 가능하기는 할까.”
그들의 희망은 나의 희망이었고, 이게 혁명의 얼굴이다. 이게 정치의 효용성이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는 뭐하러 사회를 이루고 마을과 직장과 식당에서 사람들과 섞여서 살겠는가 말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아무런 걱정 없이 일을 하고, 돌아와 저녁을 먹고, 맥주를 마시며 하하 호호 내일을 기대하는 일상’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이소진이 대안을 제시하기에 어려움을 느꼈다면 적어도 그물코 어느 지점이 빵꾸가 났기에 그물(네트워크)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지 짚었어야 했다. 그러지 못했기에 밋밋한 에세이가 되고 말았다.
6.
물론 이소진은 책 전체를 다음과 같이 구성하여 병든 우리 사회를 분석했다.
1부에서는 가족으로부터 기인하는 가족위험 및 돌봄위험에 대해 다루고, 2부에서는 남성중심적 노동시장의 편파성을 지적한다. 3부에서는 성별화된 위험이 존재론적 불안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분석한다.
결국 종합적으로 이소진이 하고 싶은 말은 이렇다.
“능력주의 이데올로기 아래에서 청년여성들은 자신이 경험한 불공정을 노력의 부족으로 해석하여 결과를 변화시키고자 노력하지만, 개선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 그 결과는 자기혐오로 귀결된다. 이러한 혐오는 살아냄의 의미를 회의하게 만들고 결국 청년여성을 자살생각에 이르게 한다.”
뭐 하나 틀린 말은 없다. 그런데 왜 이리 공허하지....
7.
내가 배운 게 있다. 이소진은 여성학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의 연구원이기에 그의 주장에 신뢰하고 동의하는 대목이 있다. 읽기 전에는 몰랐던 내용이다.
“1990년대 이후 출생한 청년여성은 온라인을 중심으로 확산된 페미니즘 리부트의 주역으로 인식된다. 특히 본 연구에서 참여자를 모집한 웹사이트 ‘여성시대(다음카페)’는 페미니즘 리부트를 주도한 사이트 중 하나로 평가되며, 실제 인터뷰에 참여한 여성들 모두 페미니즘의 가치에 동의한다고 대답했다.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진 흐름이다. 내가 대학에 입학한 201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페미니즘을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대학을 다니는 동안 줄곧 새터나 엠티, 답사 등의 행사를 할 때마다 반성폭력교양을 도맡아 진행했다. 할 사람이 마땅히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6년 즈음이 되면서 상황이 급변하여 온라인을 중심으로 페미니즘이 화두가 되기 시작했다.(*새터 : 새내기 새배움터, 과 단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말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자살생각을 둘러싼 이들의 경험이 노력에 대한 강박, 성과를 내지 못한 자신에 대한 혐오를 기반으로 서사화된다는 사실은 최근의 페미니즘이 신자유주의 통치성에 균열을 내기보다 능력주의에 대한 강한 동의를 기반으로 신자유주의 통치성과 결합하는 ‘신자유주의 페미니즘’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적 관점에서 해석해볼 수 있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전만 하더라도 대학 내에서 페미니즘은 학생운동의 의제였다. 나는 노동(계급)과 페미니즘은 당연히 교차한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이러한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능력주의와 결부된 신자유주의 페미니즘 흐름에서 계급은 쉽게 지워진다.”
고민 많은 청년여성인 딸에게 위 내용에 대해 평가를 부탁했더니, 대체로 동의한다고 대답한다. ‘능력주의와 결부된 신자유주의 페미니즘 흐름’을 기준으로 근래 10년 동안(그러고 보니 세월호 참사가 구분점이 될 수 있다고 인정한다) 한국사회의 이슈에 대해 머리로 스캔해보니 이해가 간다. 나도 페미니즘을 잘 모르고 계급운동의 측면에서만 이해하면서 고개가 갸우뚱한 일이 많았다.
8.
독후감을 쓰고 있는 책상의 데스크탑에 메시지가 뜬다. 마침 내용이 <자살예방교육을 위한 배포 자료>다. (나는 기간제 초등교사) 열어보니 ‘자신의 스트레스를 잘 파악하고 마음의 근육을 키우면 자살의 유혹을 이길 수 있다. 그래도 힘들면 주변의 도움을 꼭 받아라’의 내용이다.
전형적인 사회 권력의 입장이다. 바로 심리주의를 말한다.
이소진도 정확한 지적을 한다.
“치료담론을 통해 개인은 불안정한 환경을 기반으로 안정적인 자아서사를 구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문제들의 극복을 위한 치료담론이 역설적으로 고통과 트라우마를 특권화해 치료 불가능성을 내포한다는 점에 있다. 우리가 과거의 난관을 극복하고 더 나은 자신이 되었다고 설명하는 방식의 치료학적 자아실현 내러티브는 문제 상황이 발생하고 난 후에, 내 과거에 있었던 특정 사건을 소환해 현재의 사건을 설명하는 방식을 취한다. 따라서 현재의 고통은 노동이나 가족, 계급과 같은 전통적인 가치들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각 개인들은 자신이 느낀 감정을 성찰함으로써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서사를 구축하는 능력을 통해 정당성과 자기가치를 획득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내러티브는 본질적으로 고통스러운 경험의 극복 내러티브 혹은 고통의 기억 그 자체가 될 수밖에 없다.”
문장이 좀 복잡하지만, 힐링/테라피/상담으로 표현하는 심리치료가 역설적으로 ‘치료불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말이다. 적극 동의한다. 치료담론은 능력주의의 교묘한 세뇌와 연결된다.
9.
이소진의 분석에 무릎을 친 대목이 있다.
“현재 한국의 청년여성들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규정하는 영역은 노동영역에 한정된다. 이러한 상황은 여성들이 자신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정박지를 잃어버리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한반도 남쪽을 뒤덮고 있는 이데올로기로서 ‘중위소득 이상의 급여를 받는 노동을 하지 않는다면 사람 구실 못한다’는 데마고기에 불과하다. (*데마고기 : 유언비어 성격의 정치적 선전선동) 청년여성 뿐 아니라 대부분 잘못된 데마고기에 휩쓸리고 있다.
사람의 삶이 노동하는 존재에서만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즉 돈을 버는 존재만이 사회적 삶을 산다는 건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 숨만 쉬는 존재도 똑같이 존귀한 사람으로 대접하는 것이 당연하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어도, 음악감상으로 시간을 보내도, 둘레길을 걷는 사람도, 카페에서 수다를 떨어도 모두 사회적으로 확실한 존재이다.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정박지를 잃어버리게 되었음’은 청년여성만의 문제가 아님에도, 자살을 생각하는 청년여성에게 씌운 올가미로서 치료담론, 능력주의, 노동존재 데마고기가 작동하는 것 자체가 여성에게 이중으로 고통을 안기는 오래된 현실이 지속된다는 증거다.
10.
한국이 전 국민 기본소득을 지급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기본소득은 철저하게 자본주의 정책이다. 기본소득은 돈의 흐름을 가속하는 마중물이다. 세계최고의 자산불평등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기본소득 정책만이 2018년 이후 급증하는 청년여성의 자살률에 대한 올바른 처방이다.
아니면 세상을 뒤집든가. 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