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한국 사회는 청년들의 내면을 어떻게 파괴했는가
저서도 많고 유튜브에서 맹활약하는 심리학자 김태형의 <청춘심리상담>을 읽는(읽어야하는) 계기가 있었다. 존경하는 선배들과 반 년 만에 만난 자리에서 족발 안주에 빨간딱지 진로소주를 부지런히 마시면서도, 더욱 부지런하게 인문학 수다 향연이 이어졌다. 총선에 대한 얘기는 살짝 스쳐지나갔고, 허먼 멜빌의 <모비딕>에서 출발하여 백낙청 교수의 미국문화비평, 한국사회가 걷는 퇴행의 길, 젊은 세대의 고통으로 이어진 이야기는 김태형이 쓴 <청춘심리상담>을 읽고 각자 독후평론을 써서 비교해보자는 제안이 나왔다.
나는 선배들의 권유니까 기분 좋게 책을 주문하고 시간 나는대로 읽었다. 그런데 주장의 근거가 모두 10년 이상된 데이터이거나 기사여서 고개가 갸우뚱했는데, 다 읽고 출판날짜를 나중에 확인해보니 세상에 나온 지 8년 된 책이다.
책의 핵심은 간단하다. 청년들이 신자유주의 부모에게서 상처를 입었기에 상처를 치유하는 건 필수이며, 저항하고 싸워서 극복하겠다는 의지가 중요하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더 간단하게 줄이면 치유와 저항의 투 트랙으로 상처받은 청춘을 살려야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우리 사회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경고도 함께 한다.
통념을 깨는 망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무릎을 치는 구절을 발견하지 못했다. 따라서 몰입해서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디스크 치료를 위해 운동을 꾸준히 해서 등근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조언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2,30대 청년들에게 희망의 자극을 주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줄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건 니 잘못이 아니야”만 들어도 얼마나 안심이 되었던가.
내가 견해를 달리 하는 지점 하나만 언급하고 싶다. 바로 정체성(아이덴티티)에 대한 의견이다. 김태형은 ‘정체성의 확립’을 여러 군데에서 강조하고 있다. 먼저 책 속의 구절을 확인하고 가보자.
----p.46-47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으면 자기확신이 생기지 않아 대인 관계를 원만하게 맺을 수 없고, 인생을 흔들림 없이 살아갈 수도 없다. 2014년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정체성이 대화나 소통의 전제’임을 강조했다. 그가 그런 말을 한 까닭은 무엇보다 성직자로서의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으면 타인들과 건강한 관계를 맺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체성이 대인 관계, 사회관계의 전제임은 다음과 같은 예만 떠올려보더라도 쉽게 이해된다. 자신이 남성인지 여성인지를 잘 알지 못하는, 즉 성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이런 사람은 정상적인 연애를 할 수가 없다. 자신이 남성인지 여성인지가 명확하지 않으므로 여성과 연애할지 남성과 연애할지를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으면 원만하고 건강한 대인 관계를 맺을 수 없으며, 그 결과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기 어렵다.
------
김태형은 헌신적인 시민운동가였고, 미국 중심의 주류심리학에 반기를 들며 한국에 없는 사회심리학 분야를 개척한 공로가 크다. 하지만 주류심리학의 중심에 ‘변하지 않는 정체성’을 강조하고, 정체성의 흔들림이 개인의 삶을 망치고 사회적으로도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사실 ‘개인(individual)'의 탄생이 근대의 탄생과 궤를 같이 한다. 서양에서 in+dividual 낱말이 300년 전에 탄생했고(나중에 일본인에 의해 ’개인‘으로 번역), '나눠질(divide) 수 없는(in)'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다중 정체성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근대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20세기 중반에 들뢰즈가 ‘dividual'을 사용함으로써 개인(individual)과 구분되는 어떤 새로운 사회적 존재를 언급한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상징과도 같다.
“자신이 남성인지 여성인지가 명확하지 않으므로 여성과 연애할지 남성과 연애할지를 결정할 수 없다”는 언급은 조금만 생각한다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자신의 신체적 특징이 아닌 심리적 성 정체성의 구분을 무엇으로 판단한단 말인가. “자, 내가 남성인지 여성인지 고민해서 알아보자” 이렇게 생각으로 자신의 심리적 성 정체성을 알 수 있단 말인가. 판단 이전에 행위가 있어야 판단의 근거를 제공한다.
주류심리학이 개인을 설명할 때 암묵적으로 채용하는 서구의 ‘근대적인 자기상’ 즉 사회․문화․역사 그리고 시간으로부터 ‘유리된 자기 이미지(Disengaged Image of the Self)’를 철저하게 비판한 타일러(C. Taylor)는 1985년에 쓴 그의 저서(『Human agency and language』)에서 예컨대 ‘행동주의’ 같은 심리학적 사조가 인간 혹은 인간의 삶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오류투성이임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살아남아서 활개를 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행동주의 사조는 여전히 한국 사회에 주류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타일러는 ‘유리된 자기 이미지’의 출현을 17세기에 서구에서 일어난 세계관의 대전환과 연결 짓고 있다. 그 이전에 사람들은 관념에 기초해서 세계질서를 이해하였는데 그것이 기계론적 이해로 전환하였다. 이 전환의 결과 ‘유리된 자기 이미지’가 탄생을 한 것인데 이것은 ‘외부의 간섭과 외부권력에의 종속을 물리치고 자기 자신에게만 의지해서 행위를 하는 능력으로서 근대고유의 자유개념의 일부’가 되었다.
주류심리학은 다름 아닌 이 ‘원자론’(개인이란 더 이상 쪼개질 수 없으니까)의 관점을 그 발생초기부터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채용하고 있다. ‘변하지 않는 나’, ‘중추적인 나’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진정한 자기 찾기’라는 사탕발림은 원자론를 전격적으로 채용한 주류심리학의 그림자가 길게 내려 앉아 있는 곳에서 그리고 그 덕분에 ‘심리학화’ 되어가는 사회에서 활발하게 서식한다.
더군다나 신자유주의에 매우 비판적인 김태형은 주류심리학이 신자유주의와 결합하여 한국의 기괴한 사회현상을 보이는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음에도, 정체성에 대한 입장은 거의 주류심리학의 주장과 다르지 않다.
일본 사회심리학회 이사로 일하는 원로 심리학자 오자와 마키코가 쓴 <심리학은 아이들 편인가>(서현사)의 견해와 김태형 입장은 다르지 않다고 본다. 오자와 마키코는 ‘카운슬링(상담)은 문제를 없었던 것으로 은폐시키는 혹은 사회적인 문제를 개인의 (감정)의 문제로 바꿔치기 하는 힘을 갖고 있다’고 또한 ‘카운슬링은 개인이 안고 있는 여러 문제를 바로 그 개인이 발을 딛고 있는 사회의 지평 위에서 생각하는 힘을 뺏는 것과 동시에 우리의 삶의 터전인 평범한 이웃과 만나서 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고민하는 너무나 당연한 삶의 방식을 외면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김태형도 같은 생각으로 한국의 주류심리학계를 떠났다고 회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리는 정체성과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지 못해서 불안해하는 상담자 청춘에게 “먼저 정체성을 분명히 하라”고 강조하는 것은 이율배반이라고 본다.
주류심리학에 반기를 든 사회심리학의 관점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나’ 혹은 ‘주체’라는 존재는 애당초부터 있었던 어떤 ‘실체’가 아니라 어떤 관계망 속에서 혹은 특정한 활동 속에서 사후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일종의 ‘행위’ 혹은 ‘사건’이다. 선행하는 것은 ‘관계’ 혹은 ‘활동’이고 ‘나’ 혹은 ‘주체’라는 것은 관계 혹은 활동이 있고난 사후적인 효과로서 발생하는 일종의 ‘환상’이다. 따라서 ‘관계’ 혹은 ‘활동’이 바뀌면 그 사후효과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나’가 바뀌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주류심리학이 다 거짓이라거나 잘못된 주장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진정한 나’라는 것은 아마도 도량형과 같은 것이다. ‘미터’라든지 ‘그램’이라든지 ‘지능지수’ 그리고 ‘학력’과 같은 과학과 심리학이 만들어낸 조작개념을 사용하면 세계는 질서가 잡히긴 하지만 실재하는 것은 ‘1m’ 와 ‘2m’ 그리고 ‘80점’과 ‘100점’의 차이 뿐이지 미터 혹은 지능이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흔들리지 않는 초지일관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은 마음을 굳건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뚜렷한 정체성이란 사후적으로 만들어진 환상이라는 걸 모른다면 정체성 찾기 자체가 주체의 분열적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