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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달나무 Aug 17. 2024

유한과 무한

알랭 바디우

유한과 무한, 알랭 바디우, 이숲, 2021.3


알랭 바디우의 <유한과 무한>을 읽고     

1.     

<모모>의 작가 미하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에서 주인공 어린이 바스티안은 어머니를 잃은 이후 말을 잃은 아버지와 우울하게 살고 있으며 비만인데다가 운동신경은 꽝이고 학교에서 매번 낙제에 따돌림과 괴롭힘에 선생들의 멸시를 받는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소년으로 묘사된다. 그런 바스티안이 코레안더의 서점에서 ‘끝없는 이야기’를 훔쳐서 몰래 읽다가 책 속으로 빨려들어가 무너져가는 ‘환상의 세계’의 ‘어린여제’를 도와 천하무적의 힘을 얻어 활약하다가 현실로 돌아온다. 돌아온 ‘현실의 세계’에서 바스티안은 원래 외모로 복귀하지만 내면의 힘은 환상의 세계에 들어가기 전 바스티유와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맑시스트 철학자이자 수학자 알랭 바디우가 쓴 <유한과 무한>을 읽으며 나는 <끝없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끝이 없다는 말이 곧 ‘무한’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현실의 세계’는 ‘유한’의 세계이고, ‘환상의 세계’가 바로 ‘무한’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끝없는 이야기>에서 ‘환상의 세계’가 사라지면 ‘현실의 세계’도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어린 달님(어린 여제)’의 경고는 ‘유한’을 떠받드는 ‘무한’의 성격을 잘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     


2.     


2010년에 출간한 <유한과 무한>은 알랭 바디우가 어린이청소년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무한’의 개념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워낙 분량이 적고 압축적인 설명이라 수학을 전공한 시인 한기석의 해제를 절반 분량이 되게 편집해서 국내에서 번역서를 냈다.

바디우에게 던진 질문을 보면 대중들이 생각하는 ‘무한’은 ‘잠재적 무한’임을 쉽게 알 수 있고, 반면 바디우는 ‘실재적 무한’을 전달하려고 애쓰고 있다. 하지만 완독 후의 나 자신도 ‘실재적 무한’ 개념이 뚜렷하게 잡히지 않는다. 이러한 점이 독후감을 쓰는 데 큰 장애물이 됐다. 쉽게 독후감의 구조와 방향을 잡지 못하고 끙끙 앓는 시간이 길었다.

할 수 없이 한기석의 해제를 여러 번 거듭 읽고, 박병하의 <수학의 감각>(2018)을 참고하게 되었다.      


3.     


출발은 ‘유한’이다. 한계가 있다고 말하는 ‘유한’이나 없다고 말하는 ‘무한’은 한계에 대한 인식이 먼저다. 영어 표현도 finish가 없는(in) 것이라 infinite로 쓰지 않는가. 끝이 있다는 건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찾아오는 죽음을 생명체라면 알기에 ‘유한’은 처음부터 알고 있다. 

그러나 반대의 생각, 끝이 없다는 건 상상의 세계, 판타지의 세계에서만 가능하기에 인간에게만 가능하다. 그러하기에 ‘무한’은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인간적인 세계다.

무한은 수학의 탄생 이전에도 인간의 상상으로 존재했지만, 수학으로 표현할 때 새롭고 선명한 상상을 낳게 된다. 수학의 주제가 바로 ‘What could it be'(또 다른 것일 수 있잖아)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큰 자연수라도 1 더 큰 자연수가 존재하기에 자연수는 무한하다는 건 쉽게 받아들인다. “점점 커지고, 끝없이 커져서 무한히 증가한다”는 생각을 잠재적 무한(가假무한)이라고 한다.     


4.     


수천 년 전부터 현인들은 큰 수에 이름을 붙여 말할 수 있었다. 젊은 붓다가     을 ‘탈락차나’라 명명하고 큰 수 말하기 대회에서 우승했거나, 아르키메데스가     까지 말할 수 있었다는 에피소드가 큰 수에 대한 인간의 동경과 경외를 말한다. 중국에서 억, 조 다음에 경-해-자-양-구....무량대수 수 이름을 사용한 것도 마찬가지 예다. 하지만 무량대수가     을 의미하지만 무한은 아니다. 이름과 관계없이      같은 어마어마하게 큰 수가 있어도 그보다 더 큰 수가 있다고 상상할 수 있다. 이것은 잠재적 무한이다. 

한편 ‘이미 구현된 실체’로 인식하는 관점이 바로 실재적 무한(실實무한)이다. 실재적 무한은 19세기에 와서 게오르그 칸토어에 의해 제기됐다. 칸토어가 말년에 정신병원에서 삶을 마감했을 정도로 실제적 무한에 대한 공격과 논란은 격렬했다. (내가 실재적 무한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해서 괴로운 일에 위안이 된다)

0.99999...9 수는 소수점에 9가 1만개가 된다고 해도, 아니     가 있다고 해도 1보다 작다. 하지만 소수점에서 9가 무한히 이어진다고 하면 그것은 정확하게 1이 된다. 숫자 1은 이미 무한을 품고 있다. 이는 실재적 무한이다.

실재적 무한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불변의 법칙인 “부분은 전체보다 작다”를 “부분과 전체는 같을 수 있다”로 바꾸어 놓았다. 짝수의 자연수 집합은 자연수 전체 집합과 크기가 같다. 자연수는 유리수의 부분집합이지만 자연수 집합과 유리수 집합은 크기가 같다. 이것은 엄청난 인식의 혁명이다.      


5.     


무한에는 큰 수와 차원이 다른 고유의 법칙이 있다. 무한은 독립적이다. (박병하, 2018)

나는 무한이 독립적이란 말을 “‘환상의 세계’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로 이해한다. 위에서 말한 <끝없는 이야기>의 어린 여제가 다스리는 환상의 세계가 무너지면 현실의 세계도 사라진다는 경고를 다시 상기한다. 독립적인 무한이 사라지면 우리 삶의 터전인 유한의 세계도 사라진다.

수학의 세계에서 따져본다면 훨씬 명확하다. 프레게처럼 평생 숫자 <1>에 천착한 수학자가 있듯이 <1>은 만물의 출발이자 본질이다. 그런데 마이너스 1을 제곱하면 1이 된다. 플러스 1은 1 자체이므로 마이너스 1이 본질적 존재 <1>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허수     를 제곱하면 마이너스 1이 되니까 궁극적 근원은 허수     가 아니겠는가. 실수의 세계에서 제곱해서 마이너스 1이 되는 수는 있을 수 없다고 상상의 수(imaginary number)로 폄하된 허수(복소수계)를 빼고 공학이 존재할 수 없기에 가우스의 상상은 현실의 전자문명을 떠받치고 있다.

무한을 따라잡으려 할수록 무한은 자꾸만 멀어지고 마침내 무한이라는 말은 쳐다보기도 싫어진다. 선택은 둘 중 하나다. 신비의 대상으로 삼아 종교의 영역에 넣거나 ‘무한은 무한일 뿐이지 뭐’하며 무감해지거나, 어느 쪽을 선택하든 평온을 얻겠지만, 창조를 위한 자극은 잃게 된다.     


6.     


불교에서 시간의 단위 겁(劫)은 상상하기 어려운 긴 시간이다. 가로 세로 높이 10리(4km)의 바위 덩어리가 100년에 한 번씩 지상에 내려오는 선녀의 날개옷이 한번 스쳐서 닳아 없어지는 세월을 ‘겁’이라고 하지만, 겁의 시간도 무한은 아니다.

우리가 무한을 말하는 것은 판타지 소설을 읽는 일과 다르다. 현대 문학의 대가 보르헤스가 20세기 초반에 쓴 수필 <전체 도서관>에서 원숭이 6마리가 타자기를 무작위로 쳐대는 이야기가 나온다. 무한의 시공간이라면 원숭이 6마리가 우연히 타자기를 쳐도 대영도서관의 모든 책을 써 낼 수 있다고 상상한다. 상상에 무한을 ‘모셔’오면 무한의 괴력을 빌려올 수 있다. 무한은 작렬하는 태양처럼 어떤 제약 조건도 녹여버리기 때문이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수많은 과학적 난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일단’ 우리 앞의 걸림돌을 치울 필요가 있다. 걸림돌이 너무 크고 인간의 삶을 현실적으로 옥죈다고 해도 일단 치우고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시공간의 무한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7.     


물론 독립적 성격의 무한을 상상하는 것은 우리가 유한의 삶을 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으로든 무한하기를 꿈꾼다. 유한한 인간은 꿈꾸는 데 멈출 수밖에 없다. 꿈꾼다는 것이, 상상한다는 것이 불가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의 성격이라는 의식의 혁명을 강조한다. 무한은 인간을 살리고 이 세계를 살려 유지시키는 강력한 에너지다. 비록 유한의 인간이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인간이 유한한 삶을 살기에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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