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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달나무 Aug 17. 2024

짐을 끄는 짐승들

동물해방과 장애해방

<짐을 끄는 짐승들> (수나우라 테일러) 오월의봄, 2020.11



제목 만으로는 이 책의 가치를 알기 어렵다. 추천을 받았고, 매달 우리끼리 약속한 독후감쓰기의 7월 책인데, 정말 놀라운 책이다.

disable이 아니라 disabled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내 사고의 기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장애는 “장애로 만들어진” 형태의 수동태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쉽게 수긍할 수 있다. 하지만 거기서 그친다면 놀라운 책이 아니다. <짐을 끄는 짐승들>이 내게 망치가 됐다.

망치에 맞고 어질어질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지난 15년을 지우고 싶어졌다. 무릎 꿇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 그동안 부끄럽고 손가락질이 두려워 고해성사를 못하고 살고 있었다. 내가 교사 명찰을 가슴에 달고 긴 시간 동안 아이들을 만나왔지만, 어이없게도 “진보적이고 열정적인 선생”으로 자부했었다.

일단 책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 아래 구절을 읽자마자 벌떡 일어나 서성인다. 망치에 맞아서 아프지만, 한편 망치에 맞아서 비로소 보이는 희망도 있다.



“미국과 유럽의 농아학교에서는 100년이 넘게 수어를 가르쳐왔지만, 1880년대에 이르자 교육 현장에서 “구어주의oralism”가 수어를 대체했다. 사람들은 수어 교육이 구어를 배우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에 실제로 농인 학생들에게 해롭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는 구어가 더 우월하고 문명화된 언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렇듯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까지 사람들은 수어를 배우기 어려웠고, 소리〔구어〕를 통해 소통할 것을 강요받았다. 다수의 농아학교들이 수어를 할 수 없도록 아이들에게 엄지장갑mittens을 끼게 하거나 두 손을 맞붙인 채로 책상 위에 두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구어를 할 수 없는 아이들을 “구어 실패자”로 간주했다.”


위 글에 비유해서 말하자면 이런 거다. 지난 15년 동안 나는 아이들을 만나면서, 구어가 수어보다 진보한 것이고, 구어 사용자가 수어 사용자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 것이며, 수어 사용하는 청각장애자 경우 유감스럽지만 열등한 수준에 있으며, 내가 듣지 못하는 이에게 상대방 입술 모양을 보고 문장을 이해하는 <스킬>을 가르치면 청각장애자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한다고 확신했다. 너무 아프지만 정말 그랬다. 

수학(math)에 대한 태도도 그렇다. 나는 학교식 수학문제를 이해하고 해결책을 학생 스스로 떠올리도록 "나만의 특별한 방법"이 있노라 스스로와 타인을 조작했다. 수학을 이해하는 만큼 더 진보한(열등하지 않은) 사람이 되고, 더 행복한 삶을 위해 수학을 (남들보다 더욱) 이해하고 해결해야 한다고 말해왔다.

다음의 구절을 소개하고 이어가보자.


“대체로 도덕적·정신적·형이상학적인 문제로 다뤄지던 장애는 19~20세기 초 의료적인 문제로 탈바꿈했다.


이는 장애학 연구자나 운동가들이 ‘장애의 의료적 모델medical model of disability’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 모델은 장애가 있는 몸을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몸, 건강하지 않으며 비정상적인 몸, 따라서 치료가 필요한 몸으로 바라본다.


장애운동가와 연구자들은 다른 장애 모델을 차용하여 의료화에 대항했다. 그중 가장 많이 인정받는 것은 “장애의 사회적 모델social model of disability”이다. 이 모델에 따르면 장애는 손상impairment이 아니라, 사회가 구성되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수학을 힘들어하고 피하는 건 아이나 어른이나 마찬가지다. 유독 학생에 한해서 ‘시험 제도’가 문지기 역할을 하면서 ‘부족한 학생’으로 만드는 것을 사회적으로 구성한다. 그동안 내가 수학 성적을 올려주는 역할이 아니라 수학을 도구로 생각하는 힘을 키워주겠다는 의지를 선하게 내세우고 자랑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주장과 활동은 수학 성적으로 차별하는 사회적 권력 작동을 정당화했다. 이걸 확인하면서 한동안 괴로워했다. 이 정도는 ‘잎새에 이는 바람’이 아니라 토네이도 급이다. 그럼에도 나를 추슬러야 한다. 나는 어제와 다른 내가 된다.

<짐을 끄는 짐승들>의 중심 기둥은, 사람이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인간중심주의가 장애를 이해하는 비장애중심주의 논리구조와 같다고 말하며, 포스트장애학의 지평을 보여준다. 비장애중심주의가 폭력적이라면, 그동안 내 신념으로 자리잡았던 <똑똑이중심주의>도 똑같이 폭력적이다.

내가 고른 <짐을 끄는 짐승들:동물해방과 장애해방>의 핵심 문장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급자족 능력self-sufficiency이 아닌 자기결정self-determination을, 자립independence이 아닌 상호의존interdependence을, 기능적 분리functional separateness가 아닌 개개인의 연결personal connection을, 신체적 자율성physical autonomy이 아닌 인간 커뮤니티human community를 존중한다고 선언한다.”


①자급자족 능력→자기결정 ②자립→상호의존 ③기능적 분리→개개인의 연결 ④신체적 자율성→인간 커뮤니티, 네 가지 패러다임 턴은 앞으로 내가 나아갈 방향성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첫 번째, 사람을 자급자족 능력으로 구분(차별)하지 않고 자기결정이 가능하도록 서포트하는 것이 교육의 의미가 되기를 기도한다. 똑똑한 척하고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이 대부분 자기결정을 하지 못한다. 사회적 구성된 자기를 자율적 인간으로 착각할 뿐이다. 어리거나 몸과 마음의 손상을 가진 이들은 더욱 불리한 여건에 있다. 자기결정이 가능하도록 보장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믿는다. 아울러 자기 결정을 한다면 개체(개인)의 역량이 차별의 구분점이 되면 안 된다. 첫 번째 항목이 보장되면 나머지는 저절로 이루어진다.

마음 아픈 건(사는 게 우울해지는 건) 한국 사회가 위 네 가지 사항을 거꾸로 추진하기 때문이다. 누구의 도움 없이(도움 받으면 반칙이라고 가르친다) 스스로 미션 완결하는 사람이 메리트가 있고, 주변에 의존하지 않아야 메리트가 있고, 혼자서 고립되는 것을 독립이라고 호도하며, 날씬하고 근육질 바프(바디프로필)를 가져야 메리트가 있다고 가르친다. 현재 진행하는 올림픽 퍼포먼스가 극단적 반민주주의라고 말하면 동의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사실 나도 그랬다.

무조건 바꿔야 한다. 바뀌지 않으면 다같이 죽는 길이다. 난 죽고 싶지 않은데....

추신) 학교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새로운 교육과정이 자리잡을 때, 특수교사의 지위가 달라져야 한다고 믿는다. 특수교사는 ‘특수’자를 빼야 한다. 특수반에서 장애인을 돌보는 교사가 아니라 전체 교사의 지휘자로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현재 사용하는 ‘통합교육’ ‘통합수업’과 다른 의미다. 모든 교육(수업)은 특수하다. 그게 보통이기를! 물론 현재 특수교사를 기르는 대학의 교육과정과 방향성이 달라져야 하는 걸 전제로 하는 말이다. (아래는 캡터 11의 본문; 꼭 소개하고 싶은 글이다)


11


천생 프릭✤


내 장애의 정식 진단명은 선천적 다발성 관절굽음증athrogryposis multiplex congenita이다. 의학계에 따르면 관절굽음증은 신생아 3000명 중 한 명꼴로 비교적 드물게 발생하는 편이다. 그러나 이 통계치는 매일 관절굽음증을 가지고 태어나는 많은 염소, 개, 소, 쥐, 두꺼비, 여우 등을 포함하지 않는다. 소의 경우 아예 “컬리 캐프curly calf”라는 고유의 이름도 있는데, 《비프》라는 잡지의 2008년 12월호 표지 기사를 장식했을 정도로 공장식 축산 농장에서 흔히 발견된다.


✤ 원문 “freak of nature”는 일종의 관용구로, 본래 ‘기형’ ‘별종’ 등으로 번역되어 사회가 제시하는 ‘정상적인 몸’ 형태에서 벗어난 몸을 가진 존재를 뜻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freak of nature”를 그대로 ‘기형’이나 ‘별종’으로 옮기는 대신, 자신이 가진 ‘타고난 기형’의 몸에 대해 성찰하는 이 장의 맥락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천생 프릭’으로 옮겼다.



관절굽음증 송아지는 농장에 더 큰 손실을 끼치지 않도록 당연히 “섬멸된다”. 20세기에 인간으로 태어난 나는 그런 숙명을 피할 수 있었고, 그 대신 어릴 때 발과 다리의 움직임 범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수술과 물리치료를 받았다. 돌이켜보면 이런 의학적 개입이 일정한 도움을 주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 몸을 그대로 두었다면 어떤 다른 움직임과 능력을 갖게 되었을지 종종 생각해본다. 그런 몸으로 산다는 건 어떤 걸까? 때때로 이런 몽상은 감성적인 방향으로, 즉 이제는 더 이상 알 수 없는 “본래의 몸original body”이라는 환상으로 흘러간다. 그러나 또한 잠시나마 설 수 있게 해준 수술을 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내가 그만큼 “더욱 심한 장애”를 가졌더라면 어떻게 적응했을까? 나는 의학적으로 변형된 지금의 몸보다 장애가 있는 “선천적인” 몸에 더 끌린다. 다소 나르시시즘적인 면이 있지만, 이런 끌림은 나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비장애중심주의 그리고 내면화된 억압을 온몸으로 탐색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나는 지금의 몸에 애착을 느낀다. 딛고 설 수는 있지만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는 발, “원숭이 같은” 자세로 잠시 나를 떠받치는 두 다리를 나는 좋아한다. 만약 내가 다른 몸을 가졌다면, 나는 그 몸으로 사는 법을 배웠을까? 그 몸에(그 몸이 공간을 헤쳐가고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에) 애착을 느꼈을까? 어쩌면 내 안에 비장애중심주의가 아주 깊이 뿌리내린 나머지, 의료적 개입이 있기 전 아기였을 때의 “더욱 심한 장애”를 가진 몸에 그것을 투사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가진 이 두 가지 몸을 생각하게 된 건, 이러한 생각이 자연과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에 질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수술을 받지 않았다면 내 몸은 더 자연스러웠을까? 애초에 자연스럽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나의 자연스러운 몸이란 무엇인가? 어디에 있는가? 그런 몸이 있었다면 어느 시점에 가졌던 걸까? 내 장애의 원인은 내가 태어난 마을의 미군기지가 유발한 오염이었다. 내 모든 사연은 전형적이다. 군대와 업체들이 수십 년간 아무런 장치도 하지 않은 구덩이에 유독성 화학물질을 몰래 버린 것이다.


✤ 이로 인해 토호노 오담 네이션Tohono O’Odham Nation✤✤의 땅이 오염되었고, 그 오염이 대부분 비백인인 가난한 주민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내 몸은 독성 화학물질, 중금속, 비행기 탈지제, 다시 말해 군대의 일상적 폐기물들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다.

✤ 미군기지의 폐기물 무단 방출 문제는 과거 한국에서도 여러 번 불거진 바 있다. 주로 전문 업체를 동원해 구덩이를 판 뒤 그 안에 폐기물을 쏟아버리는 식이다. 이때 아무런 하수 처리 장치도 만들지 않기 때문에 주변의 땅은 심각하게 오염된다.

✤✤ 미국 애리조나주에 위치한 원주민 거류지 중 하나.



나로서는 “자연스러운” 몸을 상상하기 어렵다. 나는 한 번도 그런 “자연스러운” 몸을 가져본 적이 없다. 엄마가 주방의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독성 폐기물을 모르고 마셨기에, 나는 태아일 때 이미 사회, 문화 그리고 “인공적” 산물들에 의해 변형되었다. 이것들이 나를 부자연스럽게 만든 걸까?


내가 판에 박힌 장애인의 모습에 위험할 정도로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장애를 갖기 전 혹은 장애가 없는 멀쩡한 몸을 가진 자신을 갈망하며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진짜 알아내려는 것은 자연 상태state of nature의 몸, 즉 인간의 개입이 없는 몸이다.


나는 내 몸이 인간의 개입과 불가분하다고 본다. 그렇지 않은 몸이 과연 있을까? 인간이 환경에 끼치는 영향 때문에 꿀벌이 소멸해가고 북극곰이 물에 빠져 죽어가는 시대에 생태계 전체가 어떤 식으로 인간 사회의 영향을 받는지 생각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자연을 결코 우리 자신의 관점을 초월해서 볼 수 없다는 점을 좀 더 중요하게 언급하고 싶다. 우리는 “자연”이라고 불리는 것과 그것을 인지하는 인간의 감각을 따로 떼어놓고 볼 수 없다. 내가 상상하는 수술 이전의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 수술 이후의 몸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더 혹독했을 것이라는 나의 생각조차, 어떻게 해야 몸이 더 자연스러워 보이고, 어떻게 몸을 움직여야 하고, 몸이 어떤 식으로 공간에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전제에 단단히 매여 있다. 내 판단의 근거로 작용하는 이 “자연”이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어떻게 정의했는가?


“자연 상태”라는 관념, 즉 인간의 문화가 존재하기 전의 자연 혹은 인간의 문화가 부재하는 자연이라는 관념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 개념은 우리가 어떤 몸을 살기 적합한livable 것 혹은 즐길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지, 또한 어떤 몸들을 착취하고 소비하고 먹어치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에 관해 논하는 우리의 철학 이론, 정치 체계 그리고 견해들을 구축했다. 하지만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런 판단들과 구분들을 정당화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 스스로가 그렇게 정당화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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