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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달나무 Aug 17. 2024

고립의 시대

초연결 시대에 고립된 우리들

고립의 시대, 노리나 허츠, 웅진지식하우스, 2021.11


노리나 허츠 저 <고립의 시대>를 읽고     

코로나19 상황이 한창인 2021년에 출간한 영국 경제학자 노리나 허츠가 쓴 <고립의 시대>를 읽었다. 11개 챕터와 부제만 79개 달린 상당한 분량이다. 읽긴 다 읽었는데, 머리에 남은 걸 싹싹 긁어모아도 몇 줌 남지 않는다. 느낌에 의존해 책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신자유주의가 글로벌을 장악한 지 40년이 지난 결과로 공동체의 파괴와 디지털 기술의 발달이 가져온 단절의 문화로 대중은 외로움으로 고통의 삶을 살고 있다”로 말하겠다. 대안이라면 “민주주의 공동체의 복원”이다. 그런데 민주주의는 연습이 많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노리다 허츠는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가장 신망받는 경제학자’이자 여러 나라 경제 컨설턴트라고 소개한다. 방대한 데이터를 가지고, 긴 얘기를 이어가지만 굳이 읽지 않아도 모르지 않는 얘기다. 그러니 읽기가 지루하고, 읽은 후에 강렬한 메시지는 남지 않는 결과를 가져온 건 아닐까.

핵심 키워드는 ‘외로움’이다. 신자유주의를 천민자본주의라고 읽기도 하는데, 돈만을 좇다보니 사회적 연결망이 끊어지고 2010년 이후 각자 외로움의 고통을 겪는 와중에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고립 상태가 심해졌다는 진단이다. 

외로움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모순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소외>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저자 노리나 허츠는 딱 한 번 마르크스를 소환해서 소외를 언급하고 대부분 스토리는 스마트폰의 대량 보급과 SNS 중독, AI와 로봇의 시대에 일자리를 잃고 가난해지는 2010년 이후 글로벌 현상을 배경으로 한다.

책의 초반에 다음의 구절이 있어서 긴장했다.


오랫동안 고립된 생쥐들이 새로운 생쥐를 물어뜯듯이 외로움은 우리의 정치를 극단주의와 포퓰리즘으로 몰아간다. 

“우리가 설 자리는 아무데도 없었다. 나의 조국에서조차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는다면…… 바로 그때 나는 히틀러를 만났다.”


“바로 그때 히틀러를 만났다”고 말한 청년은 키 180센티미터 남짓의 호리호리한 체격에 머리칼과 눈동자가 검고 굉장히 지적인 인상의 잘생긴 빌헬름이다. 그는 경기 침체로 수년간 실업자로 지냈다. 빌헬름은 1930년 사람이다.

2020년의 빌헬름도 있다. 미국에도 있고 한국에도 있다. 그렇지 않아도 한반도 남쪽의 새로운 파시즘 회귀에 대해 가슴만 답답했기에 노리나 허츠의 진단에 귀가 솔깃해졌다. 하지만 후기 자본주의 국가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파시즘 광풍이 분 것은 제국주의 경쟁을 배경으로 한다고 널리 알려졌고, 개인 차원의 실업과 저소득이 파시즘적 포퓰리즘에 경도되는 건 자연스럽다.

저자는 외로운 이들이 종종 ‘뱀을 본다’고 표현한다. 외로우면 위축되고, 위축되면 과도하게 경계하기 때문에 길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뱀으로 본다는 말이다. 이런 진단은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 『거인의 정원』의 메타포로 익숙한 개념이다.     


직원들은 “실수를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남들 눈에 잘 보이려면 다른 사람들을 흠잡아야 한다는 걸 알죠.” 익명의 직원이 말했다. 《비즈니스 인사이더》의 폭로 기사에서 또 다른 직원이 언급한 것처럼 “직원들이 동료의 뒤통수를 치는 것으로 상을 받는” 환경에서 “진정한 업무 관계를 발전시키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책에서 발췌한 위 내용도 교실의 어린 학생들에게 20년 전부터 나타난 현상이라 낯설지 않다.     

내가 <고립의 시대>를 통해 통념의 전복을 가져온 것은 AI와 로봇의 광범위한 보급을 언급한 부분이다. 산업 로봇에게 일자리를 빼앗긴 노동자들이 외로움을 극복하고자 돌봄 로봇에게 위로를 받는다는 내용은 나의 기존 생각을 검토하게 만들었다.

저자 노리나 허츠는 시종일관 스마트폰 중독의 폐해와 SNS의 리트윗의 부작용에 대해 목소리를 높인다.


아동의 스크린 사용에 관한 경고는 각 가정에 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시작한 1950년대부터 꾸준히 있었다. 이번에도 문제는 규모다. 과거에는 아이가 스크린에 노출되는 시간이 한정적이었지만 오늘날에는 10세 아동의 절반가량(영국 자료이지만 다른 고소득 국가에서도 사정이 비슷하다)이 자기 스마트폰을 소유하고 있다. 그중 절반 이상은 스마트폰을 침대 맡에 두고 잔다. 직접 상호작용할 기회를 앗아가는 스크린의 특성도 문제이지만 어디나 디지털 기기가 함께하는 것 또한 심각한 문제다.


휴대전화 사용 시간을 줄여야겠다고 느낀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는가? 휴대전화를 너무 많이 쓴다는 소리를 듣고 짜증을 느낀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는가? 휴대전화를 사용한 시간 때문에 기분이 나빠지거나 죄책감을 느낀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는가? 아침에 눈을 뜨고 가장 먼저 하는 일이 휴대전화를 집는 것인가? 이 질문들 가운데 최소 두 개에 그렇다고 대답했다면 중독 상태라고 봐야 한다.


내 게시물이 리트윗될 때마다 우리 몸속에서는 헤로인이나 모르핀과 유사한 신경 전달 물질인 도파민이 방출된다. 물론 소량이지만 우리가 그 행동을 다시 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양이다. 그런데 가장 많은 리트윗을 유도하는 전형적인 게시물은 어떤 것일까? 가장 기이하고 극단적이며 혐오에 찬 것들이다.


저자의 이러한 절규는 쉽게 접할 수 있는 걱정거리들이다. 하지만 저자의 우려 덕분에 나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붙잡을 수 있었다.

‘과연 민주주의 복원과 자본주의 소외 극복의 결과가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기반으로 엮인 SNS의 폐지로 이어질까. 공동체의 복원이 이루어진다면 유튜브를 중심으로 영상 데이터의 이용을 줄이는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돌봄 로봇의 보급에 따른 인간과 로봇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할까. 금속 덩어리 로봇을 생명체로 인정할까. 휴머니즘이 포스트모더니즘과 함께 역사의 뒤안으로 스러지는 흐름에서 생명과 비생명의 구분을 붙들고 있어야 하는가.

우리는 과연 문 닫고 방에 들어가 디지털 기기로 온라인 연결하는 인류가 디바이스를 손에서 놓고 마당에서 함께 파티를 열고 소통하는 경우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온라인 초연결 사회가 고립의 시대를 열었다는 주장에 동의하고 고립을 벗어나는 미션이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션 해법이 인터넷을 끊고 디지털 디바이스를 버리고 로봇을 부수는 신 러다이트 운동을 벌이는 건 있을 수 없고 불가능하다.

저자 노리나 허츠는 대면 소통의 복원이 공동체 부활을 위해 필수라고 하면서도 디지털 디바이스 사용에 따른 부작용을 어찌 극복할 것인지 고민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일 년에 만 명 가까운 목숨을 교통사고로 잃고 있지만, 자동차 문명을 폐기할 수 없는 것처럼 스마트폰, 스마트 패드, 웨어러블 디바이스, SNS 사용을 줄이거나 없앨 수 없다. 그건 바람직한 해법이 아니다. 

현재 디바이스 사용의 불평등으로 고립되고 소외되는 사람이 없도록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민주주의 복원을 위한 “연습”은 적극적인 스마트 기기의 보급과 사용 교육을 통해 가능하지 않을까. 어린이청소년의 현실은 양극화를 보인다. 겨우 게임만 즐기고 디지털 기기의 이용은 매우 서툰 학생들이 더 많다. 성인도 마찬가지.

마케팅에서도 학교 교실에서도 메타버스와 AI를 강조하지만 기업의 물건을 팔아주는 수준에 머물고, 4차 산업혁명이 민주주의 기반에서 이루어지도록 고민하는 이가 없다.

<고립의 시대>는 중요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졌다. 신자유주의 반세기가 고립과 단절의 세계에서 다시 연결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을 물은 것이다. 물음에 대한 답을 특정 집단, 집중된 권력이 내놓는 것이 21세기 파시즘이다. 파시즘적 문제 해결을 위한 행동은 더욱 고립을 강화하는 길이 될 것이다.

결국 모든 해법은 정치의 영역이고, 현실적으로 교육의 장에서 풀어야 하겠지만, 환원주의 무한 루틴에 빠진다면 허무함만 남는다. 

우리가 우려하는 고립이 신자유주의 결과로 본다면 당연히 천박한 자본주의 폐기에 해법이 있다. 그런 구호만으로는 한 발자국 진전도 어렵지 않을까. 21세기 디지털 문명을 19세기 초 만화경(부루스터의 발명품 만화경은 당시 남녀노소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의 연장선으로 볼 수 없기에 디지털, 인터넷, AI, 로봇, 메타버스의 평등한 사용에 우선순위를 두자고 주장한다.

아하! 이런 생각도 정치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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