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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달나무 Oct 10. 2024

어떤 동사의 멸종

사라지는 직업들의 비망록

한승태 작가를 모르고 있었다. 내 독서량이 워낙 얇은 탓이다. 하지만 <어떤 동사의 멸종>은 내가 지금까지 읽었던 어떤 책보다 몰입하게 되었다. 개그 같은 가벼운 비유도 격이 있고 이해를 돕는 찰떡 표현이다. ‘아, 이 아저씨 글 좀 쓰네’ 이런 생각이 들어서 구글링했다.

이미 작가가 어떤 책을 발행했는지 금방 알았다. 우연히 데뷔작 <인간의 조건>을 읽은 분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쓴 독후감이 보이길래 찾아 읽었다. 짧은 글이라 부담 없었기에 정독으로 두 번이나 읽었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조건은>은 작가의 필력이 압권이다! 일하는 과정, 환경, 사람들의 모습을 매우 생생하게 묘사한다. 아주 심각하고 괴롭게 일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유머러스하게 표현할 때가 많다. 어쩔 수 없이 피식거리며 웃게 된다. 너무 비현실적인 상황에 대해서도 재밌게 표현해서, 재미있는 소설을 읽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구보라의 브런치 글에서 인용(2021)     

 <어떤 동사의 멸종>도 그렇다. 필력이라면 따라올 자가 없다. 부드러운데 선명하다. 따뜻하면서도 예리하다. 한승태는 소설가이면서도 르포 작가로 더 이름을 날렸다. 그가 르포르타주로 세상에 내놓은 책은 흔히 노동 에세이로 불린다. <어떤 동사의 멸종>도 예전에 막장일로 불릴 만한 고객센터 전화 상담 노동, 물류창고 상하차 노동, 주방 요리사 노동, 빌딩청소부 노동, 그리고 작가로서 쓰는 노동에 대한 체험 르포다.

누구든 호기심으로 책을 잡았다가 다 읽을 때까지 놓지 않을 것이다. 내 말이 맞는지 확인하려면 대형서점 서가에서 <어떤 동사의 멸종>을 꺼내서 읽어보면 알 거다. 아마도(내가 모두 읽은 건 아니라 추정컨대) 한승태의 르포 책은 읽는 이의 직업 체험을 불러올 게 분명하다. 나도 그랬다.

책을 펴면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 나오는 낮이나 밤이나 새우(shrimp) 얘기만 하는 포레스트 검프의 군대 동기 버바로 시작한다. 새우를 이용한 잡이/가공/조리/서비스 산업이 버바가 꿈꾸는 일이다.(내 기억으로, 영화에서 버바의 꿈이 이루어진다) 한승태는 자신에게 ‘버바의 새우’는 ‘노동’이라는 거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책을 손에 든 채 내가 30년 이상 종사했던 직업으로서 ‘노동’이 펼쳐졌다. 굳이 동사 형태로 말하면 teach 또는 support가 아닐까. 책을 든 채 다른 세계에 다녀온 시간이 좀 길었다고 느낀다.

이어서 작가가 일자리를 찾아 예전에도 이용했던 직업소개소 풍광을 그린다. 2010년 영등포 역 뒤편의 직업소개소는 아저씨들로 북적였다. 5년이 지난 같은 장소는 사실상 문을 닫은 상태였다고.... 일자리를 온라인에서 구하는 시대에 계단을 한참 걸어서 올라야 하는 후미진 직업소개소를 찾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기서도 책을 든 채 먼곳을 바라보게 됐다. 학교의 교실은 2015년 직업소개소와 평행이론을 공유하고 있다. 둘이 거울처럼 똑같지는 않지만 아주 흡사하다. 나는 지난 십 수년을 직업소개소 아니 교실이 소멸되는 것을 막아보겠다고 학교밖에서 뛰었다. 

한승태는 ‘쓰는 노동’의 종말을 쓸쓸하게 마지막에 배치했다. 아예 에필로그 부제를 붙여서 챕터를 꾸몄다. 여기서도 눈은 책 문장을 읽으면서 머리로는 ‘선생 노동’의 종말을 쓰고 있었다. AI가 글도 쓰고 스토리텔링도 한다는 건 들어서 알았지만, 한승태가 소개하는 것처럼 디테일하고 수준 높은 소설을 쓰는 지 몰랐다. 적지 않은 충격이다. 추운 겨울에 더 추운 날이 다가올 것을 준비하지 않는 자는 견디지 못하고 죽는다는 한승태 식 묵시록으로 400쪽 글을 맺는다.

하지만 가장 큰 한승태 작가와 만남의 미덕은 아래 문장을 만난 것이다.


결국 차이는 의사로서 말하는가, 환자로서 말하는가였다. 의사로서 글을 쓸 때 그는 판단하고 처방을 내리고 충고를 던졌다. 하지만 일하면서 남긴 기록에서 그는 시종일관 환자로서 이야기했다. 중증의 환자로서 치유와 회복을 향한 열망을 가득 담아 이야기했다.//*위에서 ‘그’는 한승태 자신이다.     

아, 발가벗겨졌지만 다행히 혼자만의 방에서 벌어진 일이라 혼비백산 지랄을 하지는 않았다. 머릿속은 지랄 이상이다. 나는 일기에 불과했지만 언제나 의사 입장이 아니었던가. 원효가 법을 구하러 먼 길을 가다가 해골물을 마신 사건이 나에게 이제야 일어났다. 처방전이 어디 비책서에라도 적혀있지 않을까 찾아헤맸다. 한승태 덕분에 처방전은 절규하는 환자의 고통 속에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단 한 권의 책을 읽고 작가에게 우정을 느낀다. 그의 고백 때문이다.


그는 글로 세상을 상관있게 만들고 싶었다. 그는 한국어에서 가장 공격적인 단어가 바로 ‘상관없어’라고 믿었다. 칼이나 총은 사람을 죽이지만 ‘나랑 상관없어’는 관계를 죽이고 환경을 죽이고 세상을 죽인다고 믿었다. 그는 사람이 닭과 서로 상관있게 되기를, 사람과 돼지도 서로 상관있게 되기를, 고시생과 선원이 서로 상관있게 되기를, 사장과 직원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인간과 자연이 서로 상관있게 되기를 바랐다. 그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관있게 만드는 글을 쓰고 싶었다.//*여기서도 ‘그’는 작가 한승태 자신이다.     

평소 내 생각을 필력 좋은 한승태가 끄집어냈다. 내 속을 꺼내서 눈으로 보는 희열과 고통이 공존한다. 하지만 다 끝났다. ‘쓰다’가 멸종됐다는데 뭘 더 고민하겠는가 말이다. 아이고. 굿바이~ 아디오스~ 사요나라~ 짜이찌엔(이거 다시 만나자 뜻이니 부적합) 작가, 텍스트, 라이터 

이제 나도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선다. (독후감도 떠나보내야 하는 거 아닌가요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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