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날

집에만 있는 날 (2019.12.2)

by 박달나무

#집에만있었던날


1.


아직도 시차에 따른 수면 시간이 고르지 않다. 여기는 5시 반에 해돋이, 저녁 8시 반에 해넘이다.


아이들을 깨우지 않으니 정오가 넘어서 일어난다. 자정에 침대에 누웠는데 실제 잠든 시간은 새벽 1시를 훌쩍 넘겼나보더라.


2.


오늘도 간헐적으로 비가 내렸다. 하늘은 파란데 비가 내리기도.... 우리들의 애정 장소 크레이들마운틴은 하루종일 눈이 내리고 낮에도 2~3도에 불과하다는 일기예보다.


집앞 숲에라도 나가려고 했지만 아이들이 꿈쩍을 하지 않는다. 잔소리가 없으니 마냥 좋단다.


사실은 내가 움직이기 싫어서 종일 공상과 유튜브 시청, 독서, 부엌일로 보냈다.


3.


평생 그랬지만 호주 생활은 특히 매일 숙제를 짊어진 생활이다. 하루 하루를 알차게 보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스페인 다녀온 핑계로 모든 미션을 내려놓고 어떤 의무도 없는 상태가 되니 아이들도 나도 아주 해피해졌다. 태호가 내 뺨에 뽀뽀를 할 정도니 더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모든 이들이 마찬가지지만 평생을 지켜야 할 덕목과 생계를 위한 몸부림, 뒤쳐질 지 모른다는 불안으로 산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4.


학교가 주3일만 등교하면 좋겠다. 듣자하니 많은 프랑스 학교가 주4일 운영한다고 하고, 내가 체험한 오키나와의 대안학교는 주3일 등교한다. 아쉬운대로 월,화,수,목 4일 등교하고 금~일 3일은 가정과 기타 장소에서 지내면 좋겠다. 그래도 문제 될 건 없다. 결국 주3일 등교로 가야한다.


우리 아이들은 그동안 주7일 등교였을 것이다. 내가 언제나 곁에 있으니 통제 없는 시공간에 있을 수가 없었다. 시즌4에 할 일도 머릿속에 정리했지만, 아직 발동을 걸지 않았다. 스페인 이후 아이들은 마치 방학으로 등교 하지 않는 기분을 즐기고 있다.


5.


늦은 저녁을 차리고 아이들을 부르니까 어제 잠자리 들 때 입은 내복차림 그대로다. 뭐 그럴 수도 있지....


밥 싫다고 해서 식빵 한 개와 햄버그스테이크, 몇 가지 과일로 접시를 채웠더니 싱글벙글이다. 메뉴 때문이 아니고 전혀 잔소리와 통제가 없는 하루종일에 대해 만족하는 웃음이다.

IMG_7668.JPEG

저렇게 행복해하는데, 교육이 어쩌구, 발달이 어쩌구 말하면서도 나 역시 세속의 미션에 머리 박고 목표 달성을 위해 매진하라고 밀어붙인 것과 다르지 않다.


6.


히말라야 유기농 커피라고 해서 구입한 로스팅 원두를 갈아서 내려 마시려고 했지만, 종이필터 깔대기를 구하지 못했다. 종이필터는 모든 마트에서 팔지만 깔대기는 백화점까지 가서도 구할 수가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종이필터를 손으로 들고 커피 드롭이 떨어지도록 기다려서 마신다. 집에 있으니 하루에 세 번은 마시게 된다.종이필터를 들고 멈춘 30초 정도의 시간 동안 다양한 생각을 한다.

깔대기 없어도 괜찮아. 다르게 드립할 수 있잖아. 정답이 하나일리가 없잖아. ‘살아냄’이 교육의 전부라면 아이들의 웃음만으로 충분하잖아. 오히려 초조한 것은 나 자신뿐이잖아.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 하는 거니, 너는!


7.


갈수록 먹는 일이 중요하다는 판단이다. ‘살아냄’을 중심에 두고 생각하면 더욱더 먹는 일련의 과정은 핵심적인 활동이다. 그것도 사회적 활동이다.


먹는 것을 중심주제로 놓고 기존에 시도했던, 앞으로 해보고 싶은 아이템을 재배치 해봤다. 공부, 독서, 걷기, 수학연주회, 배움여행, 출판, 여행을 일부러 먹는 일의 하위에 배치해보니 그동안 볼 수 없었던 그림이 그려진다.


시간 여유를 가지고 빈둥거리니까 비로소 새로운 생각을 한다. 그동안 정해진 루틴을 반복했을 뿐이었는데..... 아이들 웃음과 함께 행복을 준 ‘공상의 여유’가 좋은 하루.


이제야 스페인 피로가 풀리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