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슬 발동을 걸어봅시다 (2019.12.3)
1.
태즈매니아 생활이 석 달이 채 안 남았다. 1~2월은 손님도 많다. 1월 중순에 내 가족도 방문하고, 2월 초에는 태호 엄마와 이모네 가족이 다녀간다. 지지학교 학생으로 1년 이상 나와 함께 살았던 각각 2007, 2009년 생 학생이 한달살이로 오기로 했다. 1월15일이 방문 예정일이다.
두 녀석들은 딱 현재의 시하와 태호와 같다. 부모의 전폭적 지지, 송파 지지학교 기숙생활, 한달 전국 여행, 양평살이를 함께 했다. 서로 정이 많이 든 녀석들이라 기대가 크다.
현재 두 녀석은 형(2007년 생)과 친구(2009년 생)의 방문 소식에 긴장한다. 내가 1년 반을 같이 살았던 선생님의 제자라고 하니 그제서야 안심한다. 사는 게 온통 경계하고 조심해야 하는 것을 저절로 알아버린 아이들...물론 외부인에게 경계심을 갖는 건 모든 목숨들의 본능이지만, 우리 아이들은 어른의 방문은 기대하고 환영하는데 또래라고 하니까 긴장하는 거다. 그냥 귀여운 댕댕이다.
2.
2월 첫날은 시하 생일이라 이벤트를 고민하다가 멜번 왕복 여객선에서 생파하고, 멜번 한인식당 갔다오기로 합의했다. 기존의 경험이 없었다면 아이템 리스트에 오르지 못할 이벤트라 하겠다. 존경하는 현장교사가 페북 포스팅 하기를 아비투스(문화자본)의 차이는 가정에서 구사하는 어휘수 차이라고 하면서 초4가 마지막 기회라고 말하던데, (포스팅에 동의하는 의미에서) 우리 아이들의 호주 태즈매니아 생활과 사이사이 피지여행, 스페인 까미노 걷기 경험이 아비투스 구축에 지대한 공헌을 할 거다. 구사 어휘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없는 경험이라는 건데, 이 문제와 관련한 아쉬움을 한국에 복귀해서 남은 여생의 과제로 삼을 생각이다.
3.
어제보다 더 많이 더 자주 비가 내리는데다가 바람까지 세차다. 한참 겨울이었을 때와 같은 날씨다. 참으로 답답하지만, 한편으로 집 안에 있다는 안도감으로 편안함을 넘어 행복하기도.... 스페인에서 하도 자주 비를 만났는데, 길 위에서 맞이하는 빗줄기는 불편과 우울감의 원인이었다. 여기는 비가 자주 와도 눅눅한 느낌이 없다. 커피 내려서 소파에 앉으면 세상 편안하다.
4.
그러니까 집은 개인재산이라기보다 공공재다. 허경영이 출산수당 1억이 아닌 국민 누구나 1가족 1주택을 공약으로 건다면 무조건 표를 줄 거다. 촛불 켜서 개 준 꼴 아닌가. 한국 뉴스를 들으니 돌아가는 게 개판이다. 호주는 자동차가 공공재 성격이다. 특히 태즈매니아는 차 없이 생존 불가다.
5.
내일부터 8시30분 기상(목요일은 7시 기상; 도노반파크 수업 때문에)오전9시~오후3시는 선생님 스케줄에 따르고, 오후 3시 이후 자유시간 보장. 저녁 9시 취침으로 합의했다.
내년 상황을 가늠하다보니 아이들은 학교 아닌 집에서 생활하고 싶다고 한다. 나와 만난 초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둘 다 친구가 있는 학교로 돌아가겠다고 했었는데, 생각이 달라졌다. 물론 부모 없는 낮 시간에 맘껏 디지털월드를 즐기겠다는 심산이지만, 막상 내년이 가까워지니까 학교가 부담스러운 거 아닐까 싶다.(절대 나는 탈학교를 유도하지 않았다^^ 나는 초등학교를 꼭 다녀야한다고 강조했다)
6.
가라지 세일 구경 갔다가 20호주달러(17000원)주고 산 잉크젯 프린터를 오늘에야 꺼냈다. 이게 와이파이 이용한 무선 프린트가 된다. 처음 써본다. 한참을 시행착오를 거쳐 드라이버를 설치하고 테스트 하니 잘 작동한다.
인사이드아웃 애니가 상당한 수작이라, 아이들과 함께 거듭 보면서 영어 대사를 가지고 “학습”하려고 계획했었다. 인터넷에서 영어대사 내려받고, 지난 주 겨울왕국2 보러갔다가 마트에서 DVD도 사왔다. 이제 대사집을 프린트도 했으니 준비 완료. 아이들은 자막 없는 영화보는데 거부감이 없다. 인사이드아웃은 대사를 이해하지 않으면 감상이 곤란하다. 재밌는 공부가 될 것이다.
아이들이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머릿속에 다섯 감정이 살면서 상황에 따라 능동적으로(또는 수동적으로) 간여한다는 설정이 신선하고 유효하다.
7.
페이퍼 시험에 대한 얘기도 나누다가, 검정고시 기출문제를 풀어보라고 했다.
“6학년 마치는 자격시험이라 너희들이 배우지 않은 내용도 있지만, 분명 당장 시험을 쳐도 너희는 합격할 거라 확신한다. 올해 기출문제를 한번 구경해볼래?”
쾌히 받아들이고 시험에 응한다. 아주 진지하게 몰입한다....고 했더니 시하는 5분 만에 국어시험지를 제출한다. 반드시 정답은 한 개만 있다는 걸 모르고 있더라. 두 문제에 대해 정답을 두 개 표시했다. 자기가 볼 때 답이 두 개였다나.... 답을 두 개 표시한 문제 말고 모두 정답이다.
정답률이 높은 건 놀랍지 않고 5분 만에 답을 표시하고 제출한 건 좀 놀랍다. 내가 읽고 채첨하는데 5분 더 걸린 것 같은데....
태호는 더 많은 시간을 썼지만 20분에 해결했고, 역시 두 문제만 오답을 표시했다. 매우 훌륭한 거다. 칭찬했더니,
“헤헤.... 제가 많이 연습했거든요. 문제집 풀기....”
이런 정도니까 학습에서 완전 해방되고 싶은 마음이지만, 내 자식이 아니니까 맘대로 할 수는 없다. 부모의 기대치도 있으니..... 한편 말귀 알아듣고 글도 이해하는 편이니 학교식 학습에 어디까지 따라올 지 실험하고 싶은 생각도 조금 있다. 하지만 아주 위험한 생각이라는 걸 많이 경험했다. 작년에 돌아가신 존 테일러 개토 선생의 책 제목이 왜 <바보만들기>였겠느냐 말이다.
중2때부터 과외선생으로 동네에서 평판이 자자한 내가 초등교사가 되고 초기 5년 정도는 반평균 올리는데 온힘을 기울인 적이 있다. 당시엔 월말고사가 있었고, 반 성적 통계를 제출했었다. 6학년 수학을 암기과목처럼 가르치면 성적이 올라간다. 썸머리를 내가 해주고 복사본을 돌린 다음 외우도록 압박하면 좋은 성적 나온다. 핵심은 썸머리 방식과 노하우에 있다. 시중의 수련장을 가지고 아이들 다그치는 옆반은 따라오지 못했다. 그걸 기분 좋다고 즐겼으니.... 참~ 그런데 그건 진정한 바보만들기의 길이라는 걸 깨닫고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른다. 결국 학교 밖으로 나온 단초이기도 하고....
8.
내 아들 딸에게도 해준 적이 없는 활동과 서비스를 두 아이에게 제공하고 있다. 내게도 영업비밀이 있으니(농담이다) 모든 패를 깔 수는 없고, 나와 헤어진 이후 아이들이 좌절하는 일이 없거나 줄어들도록 조치를 취해야겠다는 판단이다.
9.
언제나 길에는 함정이 있다. 그리고 반드시 빠진다. 빠지지 않겠다는 조심성보다 함정에 빠졌을 때 당황하지 않고 탈출하는 것이 중요하더라. 어차피 빠지게 되니 말이다.